세계문학 오디세이아 -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
안치용 지음 / 르몽드코리아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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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다른 이들은 계속해서 새로운 세상으로 나아가는데 나는 고여 있지 않은가 생각하곤 한다. 그럴 때면 우울한 기분을 떨치고자 책을 읽곤 한다. 그중 문학을 통해 이전에 알지 못했던 세상을 만나는 걸 좋아하는데, 특히 세계문학을 통해 인류 보편의 정서나 생각이 무엇인지, '그들도 나와 다르지 않구나' 를 알게 되는 것에서 많은 위안을 얻곤 한다. 

 

책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는 인간이란 무엇이고 인간 삶에서 사랑이란 어떤 의미인지에서부터 시작하여, 신이란 무엇이고 신과 인간의 관계가 어찌 설정되는지, 신으로부터의 탈피를 감행한 계몽된 인간이 들어선 근대라는 세계는 어떤 세계인지, 그 속에서 주체와 타자 · 존재와 비존재 · 구조와 비구조의 관계는 어떻게 설정되며, 자본주의 · 식민주의 · 실존주의 등과 어떤 연관을 맺고 있는지, 그리고 궁극적으로 다시 '무엇이 인간인지' 를 세계의 다양한 문학 사례들을 통해 보여준다. 

 

사실 처음에는 각장의 소제목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의아했는데, 읽다 보니 시대 흐름에 따라 인류가 몰두했던 화두를 문학적 비유로 상징한 것이었다. 우선 각장을 면면이 살펴보면 초반부는 인류 문명 전반을 강에 비유하는 듯했다. 이 강은 두 존재를 가로지르는 강으로, 한 존재는 반대편 존재인 타자에게 닿기를 갈망하면서도 어쩌면 그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그를 사랑하는 자신에게 심취한 것이기에 끝내 닿지 못한다. 그리고 그 (닿지 못한) 사랑은 문학이 되며, 문학이 어떻게 자아를, 자아와 타자의 관계를, 더 나아가 그들을 가로지르는 강물과 같은 세계를 그려내고 내보이는지를 보여준다. 

 

강에서 시작된 자아의 여정은 "혼자만 행복하다는 것은 부끄러운 일" 이라 이야기하며, 그를 둘러싼 가장 작은 단위인 가족(씨족) 사회로 눈을 확장시킨다. 그리고 전근대 가부장 사회가 어떻게 유전자를 확장시킨다는 명목으로 여성을 억압하고 착취하였는지를 살핀 후, 여성의 역사에서 자기만의 방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자기만의 방' 을 가진 근대의 개인은 이제 신의 질서로 이루어진 사회의 규범에서 탈피하고자 한다. 책은 신 없는 신성을 탐색하며 고독과 구원을 탐색한 카프카의 작품을 탐색하며, 근대성이란 무엇이며 그 근대성 속에서 개인이 느끼는 고통과 불안을 이야기한다. 이후 작품은 신으로부터 탈피한 개인이 어떻게 자신을 인식하고 인간 존엄에 다다를지, 그 속에서 마주한 세계의 부조리함은 무엇인지를 탐색한다. 

 

근대 세계에 던져진 개인은 결코 행복하지만은 않다. 신(아버지)의 질서로부터 벗어난 그는 이제 자신과 타인을 욕망하는 걸 넘어서 타인(이데올로기)의 욕망 자체를 욕망하는 걸 내재화한다. 자본주의로 대표되는 이데올로기는 개인을 욕망의 소용돌이로 던져버리나, 그 속에서 개인을 지워 물화시켜 버리고, 궁극적으로는 개인의 자기소외를 야기한다. 이런 와중에 국가라는 이름의 거대 괴물은 개인을 억압하고 규율화하기 시작하고, 리바이어던과 같은 국가 권력을 내재화한 계몽된 개인은 또 다른 이를 계몽시킨다는 명목으로 자신들의 소실점에 있는 질서를 타자에게 강제한다. 

 

 

광인의 복화술과 텍스트의 오르가슴,

그것은 근대성의 폭력 하에
이데올로기의 욕망을 욕망하다
찢어진 '광인狂人' 과
그를 위한 저항의 도구로서의
텍스트인 문학의 관계

 

 

이 책은 제목부터 <세계문학 오디세이아> 인 만큼 다양한 문학을 레퍼런스로 하나 읽지 않은 작품들도 있어 모르는 작품이 언급될 때마다 구글링 하여 내용을 살펴보곤 했다. 언제고 읽어봐야지라는 다짐과 함께. 책을 읽으면서 가장 인상 깊었던 질문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대 ‘무엇이 인간인가’" 였다. 만물의 척도를 인간으로 두는 인간중심사상에서 비롯된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 근대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인간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뀌어가는 게 흥미로웠다. AI가 도래하여 기존의 인간다움을 결정하던 정의들이 무용해진 시대, ‘이미’ 와 ‘아직’ 사이의 실존 속에서 인류는 무엇을 채워야 하고, 그 속에서 문학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내 인생의 소실점에 무엇을 두고, 그 소실점으로 말미암아 외면해 온 것들이 있지 않은지, 이미 이루어낸 것들 속에서 아직은 요원하나 그럼에도 인간으로서의 삶 속에서 이루어야 하는 것들은 무엇인지 다시 한번 문학을 통해 되새겨볼 수 있지 않을까. 

 

르몽드코리아로부터 제공받은 도서에 대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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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곤의 연대기 - 제국주의, 세계화 그리고 불평등한 세계
박선미.김희순 지음 / 갈라파고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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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주의와 세계화는 국제 관계 속에서 어떻게 한 국가를 빈곤국이라는 약자의 위치로 전락시키는가. 이 책은 대항해시대에서 이어지는 제국주의와 산업혁명, 포디즘의 근대 시기에서 신자유주의 시대까지, 어떻게 각 선진국들이 다른 나라를 착취해서 부를 이루었는가를 정치 · 사회 · 문화적으로 연관시켜 풀어낸 이야기다.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효율성을 증진시켰다는 면에서 신화와 같이 언급되는 분업 체계가 인간을 부품으로 만드는 것을 넘어 한 국가를 다른 국가의 발전 동력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는 점이었다. 서구 1 세계 국가들이 피착취국을 식민지 시절부터 정치 · 군사적으로 원자재 생산국의 위치에 묶어 헐값에 원자재를 사들이고, 공산품을 강매하듯 판매하는 것에서 이윤을 얻으면서, 국제 관계 속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된다는 것이다.

 

또한, 명목적인 제국주의 시대는 지났지만 여전히 미국과 같은 강대국의 초국적기업들이 그런 양상의 횡포를 부린다는 것과 국제기구의 유명무실함, 공정무역의 허상 등의 이야기를 세계사 연대기와 엮어 이야기한다. 더 나아가, 신자유주의와 함께 세계화가 어떻게 각국의 젊은이들을 '아웃소싱' 하고 때론 사각지대에 내몰기까지 하는지를 그리고 있다.

 

기분이 우울할 때는 건조한 비문학을 읽는 것이 좋다. 독서 에세이를 써야 하는데 책이 너무 어렵다고 한탄하는 학생을 다독이면서 나도 같이 읽을 테니 끝까지 읽어보자 했던 책이었다. 그게 한 달 전쯤이었는데. 별말 없는 거 보니 에세이를 잘 써서 제출한 것 같고, 나로선 바빠서 포디즘 파트 정도까지 읽고 중단했다가, 주말에 다시 완독 했다. 세계사의 흐름과 국제정치학 교양책을 읽어본 적이 있다면 그리 어렵지는 않은 책이다. 사례가 방대하고 주류에서 일러주지 않는 시각에서 서술되는 이야기이기에 교양서적으로 좋은 책이라 생각한다. 특히 막연하게만 기억하고 있었던 전근대 은의 흐름과 향료 전쟁의 의미, 원자재 수출국에서 탈피의 중요성 등이 논의 쟁점으로써 재밌고 유익했다. 민영화 · 아웃소싱 얘기까지는 끄덕끄덕했는데 공정무역에 있어서도 대기업들이 점유한다는 점을 보고 다소 놀라기도 했다. 읽을수록 "싸워서 가난해진 게 아니라 가난했기에 싸운 것이다." 라는 한 아프리카 내전국 국민의 말이 인상적이기도 했고.

 

그런데 인간마저 부품으로 취급하며 전 세계에 아웃소싱시키는 신자유주의 자본의 시대에 개인으로서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책은 연대를 희망으로 내어놓고 있지만 공정무역의 영역마저 자본이 잠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막연하게 느껴지기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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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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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담을 쌓은 채 문두스Mundus 라는 별명 하에 고전을 연구하고 가르치는 낙으로 살던 그레고리우스. 어느 날 그는 눈앞에서 이루어지는 한 여자의 자살 시도, 구해내었으나 눈앞에서 홀연히 사라진 여성의 자취를 쫓아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으로 향한다. 그리고 우연히 아마데우라는 한 포르투갈 귀족 의사의 일기에 매료되어 그의 삶의 흔적을 쫓아가기 시작한다.

 

내 인생을 투자하여 나와 완전히 다른 삶을 산 이의 궤적을 따라간다는 것은 일견 시간 낭비처럼 보이나, 어쩌면 그 삶을 거울삼아 내 인생을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나 마찬가지다. 사실 그는 고전 속 라틴어 문장들이 "침묵을 품고 있으며 대답하라고 강요하지 않기 때문에" 고전을 사랑했다. 그러나 이는 어쩌면 고전 속 인물들의 <자기 삶을 사는 것> 에 대한 동경 때문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제 동시대의 그러한 인물, 어쩌면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 다름없는 어느 포르투갈 귀족의 삶의 궤적을 따라가면서 아이러니하게도 그 영웅의 부서질 듯 여린 내면과 자기 삶을 반추하게 된다.

 

리스본에 도착 후 망가진 안경을 고치는 과정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새로운 삶이 확장되는 경험을 한다. 중립국 스위스에서 현실과 동떨어진 고전을 연구하는 학자로 살았던 그레고리우스. 누군가에겐 삶을 내걸어야 하는 혁명의 <현실> 이 그에게는 책 속 삶처럼 현실과 유리된 파편화된 <장면> 에 불과하지 않았을까? 중립국인 베른을 떠나 리스본으로 온다는 것, 그리고 안경을 고친다는 것은 곧 자신이 알아온 낯익은 "문법" 세계에서의 탈피, 새로운 그러나 현존하는 "말하면서 배워야 하는" 세계로의 진입이나 마찬가지였다.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
독재, 폭력, 침묵, 그리고 여행


그레고리우스가 '읽고' 아마데우가 '살았던' 리스본은 2차 대전 이후 독재에 맞섰던 정치적 혁명이 일었던 한 서구 유럽 도시의 상징이었다. 아마데우는 비록 의사로서였지만 "리스본의 인간백정을 살렸다" 는 이유로 공동체의 비판에 직면하면서 저항운동에 가담하겠다고 각성하게 된다. "독재가 하나의 현실이라면 혁명은 하나의 의무다." 인간 백정을 구한 죄, 독재 정권 하에 활동했던 판사의 아들이라는 그의 신분은 어쩌면 반드시 저항운동에 참여해 자신을 정당화해야 할 필연적 이유였을지 모른다.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사람이 내게 보이지 아니하려고
누가 자기를 은밀한 곳에 숨길 수 있겠느냐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나는 천지에 충만하지 아니하냐

(예레미야 23:24)

 

그런데 타인의 시선이 왜 그로 하여금 생을 걸 위험한 저항운동에 뛰어들 근거가 되는가? 귀족이어도 현실 정치와 유리될 수 없음을 깨달아서인가? 어쩌면 이는 그의 성장 배경에서부터 짚어봐야 할 점인지도 모른다. 사실 그가 겪어 온 현실 속 독재는 외부 세계의 독재만이 아니었다. 이미 그는 성장하는 내내 집안 내 미시적 독재에 억눌리고 있었다. 신뢰와 인내라는 이름으로 자신을 옥죄는 사랑을 전하는 어머니, 평생 숨이 막힐 만큼 일방적으로 고마움을 표하는 동생, 그리고 독재 정권 하의 판사였던 아버지의 침묵. 아마데우는 아버지가 말한 "타인은 너의 법정이다" 라는 말에 진저리 치면서도, 이를 영혼에 각인시킨다. 그는 단 한 번도 집안에서 자신의 속내를 속시원히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언제나 침묵을 지켰지만, 침묵에 싸인 사람들은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한쪽의 침묵이 다른 쪽의 침묵을 불러온다는 사실 또한 깨닫지 못했다.

 

불안정하고 민감한 그에게 에스테파니아의 존재는 그녀가 지각하던 대로 "법정 바깥으로, 자유롭고 활기찬 인생의 장소로 나갈 수 있는 기회, 오로지 그의 의지와 열정대로 살 기회" 나 마찬가지였다. 아마데우는 그녀와 함께 리스본을 떠나면서, 자신을 억누르던 그 모든 압제와 요구와 금기를 벗어나고자 한다. 그러나 에스테파니아는 이것은 오로지 아마데우 혼자만의 여행일 뿐, 에스테파니아 자신과 '함께' 하는 여행은 될 수 없음을, 자신은 아마데우가 이루고자 하는 삶의 해방을 위한 도구가 될 수 없음을, 더불어 아마데우가 자신의 모든 것을 알려고 하는 것 또한 일종의 관계적 폭력임을 인지시키며 각자의 길을 걷게 된다.

 

우리는 과연 서로에 대해

무엇을 아는가

우리는 많은 경험 가운데

기껏해야 하나만 이야기하며,

침묵하고 있는 경험 가운데,

알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의 삶에

형태와 색채, 멜로디를 주는 경험은

숨어 있어 눈에 띄지 않는다

 

사실 이는 나조차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살면서 나라는 존재의

일부만을 알 수 있다면,

나머지 '내 삶' 은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작품에서 계속적으로 은유되는 열차는 내릴 수도 없고, 궤도와 방향도 목적지도 알 수 없는 삶 그 자체로서의 공간이다. 사람들의 만남이란 한밤중에 아무런 생각 없이 달려가는 두 기차가 서로 스쳐 지나가는 것. 그 속에서 서로를 알아볼 시간도 없는 사람들은 그저 덧없는 시선을 주고받을 뿐이다. 그러나 기차 '속' 사람들은 자신의 기차를 꾸려나가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칸에 들어오는 낯선 이들의 존재에 환기되기도 한다.

 

문득 문두스(Mundus, 세계·우주·하늘)라 불리던 그로 나타나고서야 내면의 고통에 침잠했던 아마데우의 아픔이 이해 받을 수 있었던 건 아닌지, 생각해본다. 아드리아나의 말대로 그레고리우스는 그를(사실 그의 죽음을) 영원의 시간 속에 봉인한 것과 동시에, 그가 곧 살아 돌아온 아마데우 그 자체였으니까.

 

아마데우에게 리스본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속박과 금기를 상징하면서도 자신의 현실이자, 떠나면 향수병을 일으키는 곳이었고, 그레고리우스에게 리스본은 새로운 삶의 시작이나 마찬가지인 곳이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실망시키는 것들을 추적하고 수집하여, 진짜 삶을 따라가야 한다.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 솔직한 삶을 위해서는 <아마데우의 리스본> 을 떠나면서 <그레고리우스의 리스본> 으로 향할 용기와 강인함이 필요하다.

 

목적지 없이 끝없이 달리는 밤의 여정 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마주하고, 마주해야 하는가. 목적과 방향을 정할 수 없는 열차는 불확실한 삶과 같지만, 터널을 뚫고 맞이한 밤의 끝자락에는 빛과 내일이 존재하리라 생각한다.

 

침묵으로 가득 찬 고전 문법서가 아닌 말하기 위해 말을 배워야 한다는 걸 깨달은 자의 이야기.

저항의 물결로 가득찬 외부 세계와의 조우 속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내면 속 침묵이라는 억압을 깨고 해방을 맞이했던 자의 이야기.

그리고,

어두운 현실 속에서도 저항의 목소리를 높여 밤의 침묵을 깨고자 했던 이들의 이야기.

 

어두운 시대 속 부모의 권위에, 시대의 독재에, 자신의 내면에 짓눌려 침묵하던 이들이 언어를 찾고자 하는 투쟁. 그것이 고전이라는 자기만의 성에 갇혀 있던 이방인의 시각과 맞물려 서술되어 그 이방인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어주는 이야기.

 

리스본행 야간열차.

 

발췌


[...]  다른 사람들을 향한 우리의 시선은 스치며 지나가는 밤의 만남처럼 언제나 서로에게서 벗어나고, 추측과 생각의 단상과 날조된 특성들만 우리에게 남겨두는 건 아닌지. 만나는 게 사실은 사람들이 아니라, 상상이 던지는 그림자들은 아닌지.

 

[...]  인생은 우리가 사는 그것이 아니라, 산다고 상상하는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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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과 연인 2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0
D.H. 로렌스 지음, 정상준 옮김 / 민음사 / 200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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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사랑하는 이들은 끊임없이 서로를 사랑함과 동시에 증오한다. 상대가 자신에게 온전히 소유되기를 거부하면 증오하고, 그로 인해 생기는 불안감 때문에 증오한다.

 

2부의 폴 모렐이 가진 그런 불안감은 어머니와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엄마와 아들의 관계는 서로에게 빈틈없이 속한 관계였을 테니. 그러나 그런 관계를 아무리 연인이라 해도 타인에게서 찾고자 하면 갈등이 생기지 않을 수가 없다.

 

늘 자신의 미래 속에 어머니 모렐 부인의 존재를 그려 넣던 폴이 어머니의 임종 앞에서 어머니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동생 애니와 이야기하는 장면이 충격적이면서도 작품을 읽는 내내 겪어온 바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아 숙연해졌다. 그러나 모렐 부인에게는 미안하지만, 죽음의 순간에서 폴 모렐이 해방을 맞이한 거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두 번의 연애를 실패했지만 그럼에도 폴 모렐의 삶이 끝난 건 아니다. 자신의 삶을 지탱해 준 엄마의 상실로 인한 슬픔을 가슴에 묻고, 남은 인생을 향해 앞으로 걸어간다는 면에서. 어쩌면 폴에게는 축복이기까지 하다. 삶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드는 구속을 떨치고 진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이니까.

 

자신을 사랑하고 자신에게 삶을 선물한 어머니.
그러나 진짜 삶을 살기 위해서는 그 사랑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걸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발췌

 

[...]  어머니는 이 모든 것들 가운데 그 자신을 지탱해 준 유일한 존재였다. 그리고 그녀는 가버렸고 이 어둠 속에 뒤섞여 버렸다. 그는 그녀가 자기를 만져주고 그녀 옆에 자신을 두기를 바랐다. 그러나 아냐, 그는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갑자기 몸을 돌리면서 도시의 황금빛 인광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주먹을 꼭 쥐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는 어머니를 따라서 그 방향으로 어둠을 향해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는 희미하게 소음이 들리고 불빛이 타오르는 도시를 향하여 재빨리 걸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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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멀 피플 아르테 오리지널 11
샐리 루니 지음, 김희용 옮김 / arte(아르테)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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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 작품을 성장물로 생각하기 때문에, 답답이들의 연애담으로만 치부되는 것이 안타깝다. 사실 둘은 겉으로는 늘 '보통 사람' 인 척하고 싶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이를 위해 세간의 중심에 있었으나 가족에게조차 방임과 학대를 당해 정서적으로는 세상의 변두리에서 겉돌기만 했던 메리앤은 자기 내면의 중심을 자아가 아닌 타자로만 채우려 했고, 이는 코넬 외 다른 연인과의 자기파괴적 관계를 지속하던 지점에서 절정에 달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반면, 코넬은 견고한 자신만의 성을 쌓고 그 속에서 스스로 옥죄며 살고 있는 자신을 타자가 들여다볼까 노심초사했던 것으로 보이고, 이는 자존심 때문에 메리앤에게조차 자신의 재정적 어려움을 이야기하지 못했던 점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말하자면 메리앤은 자아의 부재가, 코넬은 자의식 과잉이 문제였던 건데, 이런 둘에게 서로는 서로에게 다른 종류의 용기를 주었다. 코넬은 메리앤에게 세상 속으로 스며들 용기를, 메리앤은 코넬에게 세상 밖으로 나아갈 용기를 주어, 둘은 비로소 보통 사람(Normal People)처럼 살 수 있게 되고 그래서 결말이 정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사실 처음에 마지막 장면을 맞닥뜨렸을 때는 두 사람이 함께하며 행복하길 바랐던지라 이별 장면이 슬퍼서 하염없이 울기만 했었다. 하지만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 작품은 마지막 장면을 위해 달려온 거나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다. 연리지처럼 서로를 옭아매면서도 함께 성장해 온 두 사람이 서로의 미래와 안녕을 위해 이별하게 된 셈이었으니.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병이 들지도 몰라" 라고 이야기하는 코넬에게 그럴지도 모르겠으나 그건 곧 순간일 뿐이고 일 년 뒤 서로가 어디에 있을지, 무슨 일을 경험하고 있을지 '장담하지 말라' 라는 말을 전하는 메리앤. 그러면서도 코넬의 "네가 없었으면 난 여기에 없었을 거야" 라는 말은 부정하지 않는다. 실제로 메리앤이 불안하고 힘들 때마다 코넬이 메리앤에게 언제든 돌아와 쉴 수 있는 안식처가 되어주었던 만큼, 메리앤 또한 코넬이 자신의 알을 깨고 나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서로의 존재로 인해 내면의 안팎을 단단하게 다진 둘은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게 된 셈이었으니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서 가장 명대사스러운 대사를 꼽자면 "We have done so much good for one another." 이나, 둘의 삶을 관통하면서도 앞으로의 희망을 보여주는 대사는 "(코넬) I will go. (메리앤) And I will stay. And we will be okay." 라고 생각한다.

 

세상을 방황하던 두 사람이 서로를 만나 삶을 마주하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그러면서도 상대로부터 독립하여, 서로와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어긋난 길을 걸을지라도, 각자가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서로의 행복과 안녕을 빌어주는 모습이 참 인상 깊었던 작품. 원작도 드라마도 다 너무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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