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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얀 성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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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에 관한 책이라고 일컫어지는 <하얀 성>. 상반된 문화에서 자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놀랄 만큼 외양이 같다는 흥미로운 지점에서 시작되는 이야기.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질문은 "나는 왜 나인가" 인데, 작품을 읽으며 스스로 답을 내려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다 질문의 방식이 잘못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나는 왜 나인가" 가 아닌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혹은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를 나라고 지칭할 수 있는 건 무엇이 될 수 있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바꾸면 더 명확해지지 않을까. 그리고 질문을 바꾸니 작품 속 인물들이 보여주는 · 말하는 것으로부터 내 나름의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지는가.

나는 이 질문에 '기억' 이라고 답하고 싶다.

 

작품 속 호자라는 인물은 끊임없이 '나' 의 기억을 갈구한다. 처음에는 다른 세상에서 내가 배우고 접해 온 학문과 생활양식에 관해 궁금해하는 걸 보고 무언가를 끊임없이 탐구하고 자신이 아는 바를 누군가에게 가르치는 지위에 있는 자가 가진 습성이겠거니 했다. 그러나 장이 넘어갈수록 보이는 그의 집착과 갈구는 결국 나라는 인물의 <기억>, 그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자신이 갈망하는 세계에서 온 '또 다른 나' 의 <정체성> 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기억은 실존, 즉 현실 경험을 토대로 구성된다. 자신의 기억을 호자에게 '가르치며' 내심 호자와 호자의 세계에 대해 차별성 및 우월성을 느끼던 나는 호자가 사는 세계에 동화되게 된다. 끈질기게, 집착적으로 나의 기억을 '뽑아낸' 호자는 그 기억을 토대로 내가 되고, 호자의 삶을 살던 나는 호자가 된다.

 

흥미로웠던 점은 호자가 기억을 캐묻는 중에도 타자가 감추고 싶었던 기억에 관해 혹독하리만치 집요하게 캐물었다는 것이다. 이는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제각각의 이유로 불행하다" 라는 '안나 카레니나' 속 구절처럼 불행을 겪거나 악행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저마다의 순간과 배경이 다르니 그 순간의 기저에 깔린 얽힌 실타래와 같은 모호한 감정의 근원을 알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책을 덮으며 나 자신에게 질문을 던졌다. 나라는 존재는 무엇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어떤 기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그 기억은 어떤 실존 경험에서 비롯된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이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함께 해준 사람들이 기억 속 행복의 모자이크를 만들어 주었다는 생각이 미쳤고, 삶의 기억, 즉 나라는 존재를 이루는 곁에 있는 사람들의 존재를 소중하게 여기며 더 많은 것을 읽고 접하자는 결론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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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빨강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51
오르한 파묵 지음, 이난아 옮김 / 민음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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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 은 서구 르네상스 시기, 투시법이 (소설에서는 원근법이라 지칭되나 투시법이 더 적확한 표현이다) 터키 이슬람 세밀화가들 사이에서 어떤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이것이 그들의 사상과 세계관에 어떤 영향을 (사실 영향이라 쓰고 위협이라 읽는) 끼치는가를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며칠 전 병렬독서 하던 다른 책들이 좀처럼 손이 가지 않아서 오랜만에 소설을 읽고 싶단 생각에 책장을 째려보다 골라들었고, 이후 저자의 <하얀 성> 을 읽어볼 예정이다.

 

우선, 시대적 배경을 고려하겠지만서도, 이 작품을 소개할 때 감동적인 사랑 이야기도 있다고 하는 건 정말 몰염치한 일이라 생각한다. 남자 주인공 카라와 여자 주인공 세큐레는 열두 살 차이가 나는 이종사촌 사이인데, 카라는 세큐레가 열두 살 때부터 좋아했고 (세큐레가 열두 살이면 카라는 스물네 살 ··· ) 그걸 들켜서 세큐레에게서 멀어졌다고 끊임없이 징징거린다. 작품 전반에 걸친 다른 인물의 시각을 통한 세큐레에 대한 묘사와 <나는, 세큐레> 로 이어지는 세큐레 본인의 생각을 종합해 보아도 세큐레는 남자 주인공이자 세밀화가인 카라, 시동생 하산, 그리고 아버지와 함께 일하는 또 다른 세밀화가 올리브의 욕망의 대상, 혹은 아버지 에니시테의 (혹은 죽은 남편의) 소유물과 다를 바 없는 존재로밖에 그려지지 않으며, 작품에서 여성이라고는 세큐레와 창녀들, 그리고 거기에 더해봤자 방물장수 에스테르를 포함하여 세큐레 하녀의 포지션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여성들뿐이다. 여하튼, 중간중간 구역질 나는 부분이 일부 있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대적 배경을 감안하고 읽었다.

 

 

태초에 어둠이 있었다. 어둠은 그림 이전에도 이후에도 존재했으며, 세계의 근원이 되는 신은 인간에게 "보라" 라고 명했다. 그리하여 인간은 '신이 보라고 명한 것' 을 '볼 수' 있게 되었다. 신의 명을 안다는 것은 본다는 것이요, 세상을 본다는 것은 기억하지 않고도 아는 것이다. '기억' 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의 존재도, 신이 주었던 어둠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일생을 신의 말씀을 구현해내기 위해 세밀화를 그려왔던 위대한 장인들은 색채 안에서 시간 너머의 어둠을 보고자 한다.

 

작품의 묘사에 따르면, 세밀화가의 작품에 있어서 '화가가 누구인지' 는 중요하지 않다. 화가는 신이 "보라" 라고 한 것을 재현해내는 신의 도구일 뿐이며, 인간 마음속 삶의 풍요와 사랑, 신이 창조한 세계가 가진 다채로움과 그에 대한 존경심 및 신앙심을 드러내기 위해 그림을 그리는 존재일 뿐이다. 신정제로 대표되는 이슬람의 술탄 체제는 표면상으로는 위대한 알라(신)가 있고 그 알라의 뜻을 받들어 왕인 술탄이 통치하는 것으로 보이나, 실상 그 알라의 자리에 술탄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술탄은 세계의 근원이며, 술탄의 명이 곧 진리이다. 그리고 이 세계의 근원인 '그' 술탄이 (1) 베네치아 장인들의 그림처럼 (2) 자신의 세계 전체를 재현하길 원하면서 비극은 시작된다.

 

사실 술탄을 꾄 건 베네치아로 파견을 다녀온 후 새로운 문명에 감화받은 세큐레의 아버지 에니스테였는데, 그는 화풍에서 만큼은 작중 그 어떤 세밀화가보다도 진보적인 인물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슬람교는 그 어떤 종교보다도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종교이다. 이에 따라 당시 그림은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지, '그림 자체' 를 위해 존재할 수는 없었다. 처음 베네치아에서 베네치아 화풍에 따라 그려진 그림을 본 에니스테는 자신이 살아온 세계가 주입한 세계관에 따라 "어떤 이야기를 장식하기 위해 그림을 그렸을까?" 라고 생각하지만, 이내 곧 그림이 이야기가 아닌 그림 그 자체를 위해 그려졌음을 깨닫고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점점 이세계異世界 의 화풍에 매료된 그는 술탄의 세계, 즉 신의 세계가 아닌 '자신' 을 그린 '초상화' 를 그리고 싶어 한다. 문제는 베네치아 화풍의 그림이 신성모독적이란 것이다. 술탄으로 상징되는 '신이 정한 중요성'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인간이 어디에 있느냐' 에 따라 크기가 정해진다. 즉, 세상의 중심이 화가 본인이 되는 셈이다.

 

작품 속에는 각 인물이 고뇌하는 몇 가지 중요한 질문들이 있다. 조사원을 자처하는 카라는 차치하고, 극 중 에니스테, 화원장, 나비, 황새, 올리브으로 대표되는 각각의 세밀화가들은 작 초 다음 질문에 마주한다. "세밀화가는 스타일style 을 가지고 있는가, 아니 가지고 있어야 하는가," "신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눈이 먼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스타일style 이란 무엇인가. 스타일은 '지금, 여기' 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내(화가)' 가 그 누구보다 뛰어나게 신의 세계를 재현해내는 그림을 그리고 있다는 화가의 자의식 표출이자, 영원의 시간 속에 존재하고자 하는 바람이다. 작중 신실한 세밀화가들은 선대 거장들의 스타일을 모사하고, 그에 따라 신앙심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므로 스타일을 드러내는 건 죄악이자 신성모독이라고까지 일컫는다.

 

그러나 에니스테의 말에 따르면, 훌륭한 화가는 자신의 스타일을 통해 그린 그림을 통해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는 것으로 그치지 않는다. 어쩌면 스타일은 사람들의 마음속 풍경까지 바꾸며, 그 예술풍이 사람들의 영혼 속에 자리 잡고 나면, 그것은 세상을 보는 하나의 창이자 잣대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불어, '진정한 그림' 은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것 속에 숨겨져 있으며, 사람들이 보자마자 나쁘고 신성모독적이라고 여길 그림 안에 숨겨져 있다. 진정한 화가는 <그곳> 에 이르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곳> 에 이르렀을 때의 외로움을 두려워한다.

 

이런 에니스테의 견해에 반反 하는 화원장 오스만을 위시한 보수적 세밀화가들은 무의식적으로 끊임없이 자신들의 존재를 신(술탄)의 세계를 재현하는 도구로서만 국한한다. 그들에게 있어 말을 그리다가 장님이 되고, 장님이 된 자의 손이 '외워서' 말을 그린다는 건 하나의 축복이다. 그들은 그림에 대한 열정 때문에 신앙에서 멀어지는 것을 경계하며, 새로운 화풍을 받아들이고 그 화풍을 위한 다양한 테크닉을 익히는 것은 재앙이다. 변하지 않는 영원불멸의 신의 시간 속에 남고 싶은 그들은 (사실 변화를 받아들이기 두려운 것임에 틀림없다) 자기 손으로 직접 자기 눈을 찔러 '빨간' 피로 뒤덮은 눈으로 영원의 '검정' 속으로 잡아 먹히듯 침잠한다.

 

어떤 견해를 따르든 작품 속 모든 인물이 다음 말에 공감하리라 생각했다. (1) 얼마나 완벽한 인생을 살든, 얼마나 완벽한 그림을 그리든 간에 유한한 삶을 사는 화가(인간)는 자신의 시간이 언젠가는 끝날 것이란 걸 인지해야 하며 (2) 세밀화가의 재능이 얼마나 뛰어나든지 간에 그림 자체를 완벽하게 만드는 건 시간이나, 아이러니하게도 시간을 초월하는 유일한 방법은 뛰어난 기술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즉 아무리 자신의 예술성에 대해 자의식을 표출하고 싶어도 시간의 유한성 때문에 결국 어둠 속으로 가라앉을 것이며, 그 어둠 속에서 다시금 건져 올려져 색을 발하게끔 하는 것은 화가의 자의식에서 발로되는 예술적 탁월성을 향한 추구라는 것이다.

 

작중 세밀화가들은 실제로든 표면상으로든 술탄을 위해 그림을 그린다. 그러나 에니스테에 따르면, 술탄은 - 모든 술탄이 그러하듯 - 세밀화가가 재현해낸 신의 세계인 '그림' 이 아니라, 그림 속 '자신의 모습' 에 매료된다. 그 과정 속에서 술탄 자신이 표면적으로 중시했던 신이 창조한 세계를 재현해내는 것의 중요성뿐만 아니라 세밀화가들의 존재 또한 지워진다.

 

 

작중 여러 화자가 있는데 책의 이름은 왜 <내 이름은 빨강> 인지를 고민하며 읽었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다. 작품은 화려한 세밀화의 세계를 묘사하고 있으나, 나는 이 작품을 관통하는 두 가지 주요 색이 있다고 생각한다. 바로 <빨강> 과 <검정> 이다. 앞서 말했듯, 그림 이전과 이후에도 존재하는 어둠의 세계, 신이 보라고 명한 것을 볼 수 있게 되기 이전의 '세계의 근원' 이 되는 세계, 위대한 장인들이 색채의 시공간을 초월하여 보고자 했던 어둠의 세계가 바로 검정의 세계이다. 즉 삶의 이전과 이후를 지배하는 색이 검정인 것이다. 그리고 웃기게도 작품의 남자 주인공 이름은 카라(Black, 검정)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술탄(신)의 명령을 받들어 조사하며 사건의 실체와 관련된 모든 것에 근접하게 되는 사람, 세큐레로 상징되는 사랑과 신의 도구인 세밀화가의 세계를 넘나드는 사람, 세밀화가였으면서 여러 해를 이스탄불 바깥의 세상을 떠돌아다녔기에 한 세계의 내부자이면서 외부자일 수 있는 사람. 작중 카라는 끊임없이 자신이 인간적인 고뇌를 하고 있노라 이야기하나, 읽는 내내 작가가 동서양을 모두 경험하고 신의 세계에 발을 디디기 전의 어떤 초월적 존재를 카라로 설정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렇다면 빨강이란 무엇인가. 핏덩이 인간이 세상을 처음 만나며 감싸이는 색. 이스탄불 '바깥' 세상에서 카라가 가지고 선물해온 물감통 속 에니스테가 넣어두었던 빨간 염료, 어쩌면 화가로서의 그의 영혼. 세큐레가 카라를 만나러 가기 위해 입었던 빨간 옷, 바늘을 가지고 자신의 눈을 찔러 스스로 눈 멈을 자처했던 이들이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느꼈을 살아 있음의 상징, 그리고 죽음의 문턱에서 망자를 감쌌을 비린내 나는 피. 작중 '빨강' 이 자칭했듯 빨강은 삶의 "어디에나 존재" 하며, 삶의 면면을 함께 한다. 자각하지 못하는 자는 부인하나, (빨간) 색은 언제나 우리 앞에 있다. "되라!" 라는 명과 함께 어디에나 존재하는 빨강은 어쩌면 이 작품 속 세계관을 관통하는 세계의 의지, 혹은 세계 그 자체일지도 모른다.

 

 

피와 함께 진행된 두 세계관의 충돌은 어쩌면 근본적으로는 신의 세상에 더 근접하고자 하는 열망과 그 속에서 현존재로서의 자신을 자각하고자 하는 개인의 필사적인 분투일지도 모른다. 작품 속 인물들은 '베네치아' 화가들도 소실점과 투시점의 중심에 예수를 비롯한 자신들이 중시하는 인물들을 놓는 것의 연속이었고, 그것으로부터 탈피하는 과정이 몇백 년에 걸쳐 이루어졌다는 것을 몰랐다. 다양한 기법을 활용해 화가 개인의 예술적 탁월성을 추구하다 보면 신이 "보라" 라고 명한 세계를 더 정확하게 재현해낼 수 있다는 것, 즉 신에 대한 믿음과 함께 갈 수 있음 또한 몰랐던 것 같다.

 

 

보지 못하는 자와 보는 자가

같지 아니하며

<코란 제 35 장 「파티르」 19 쪽>

 

동방과 서방이

신의 것이니

<코란 제 2 장 「바까라」 115 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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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인간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조병영 지음 / 쌤앤파커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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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터러시란 텍스트를 매개로 하여 세상을 읽고 쓰는 사회문화적 실천이다.

 

조병영 교수님의 <읽는 인간 : 리터러시를 경험하라> 는 읽고 쓰는 능력인 리터러시literacy 에 관해 이론적+실천적 방향을 제시해줄 수 있는 책이다.

 

<세 줄 요약> 의 시대에도 불구하고 남이 대신 정제한 정보는 결코 <나의 읽기> 가 될 수 없다. 자신에게 가치 있는 텍스트를 발굴하여 그 내용과 의미를 곱씹어 소화시키는 것은 스스로 노력을 들여 직접 실천해야 하는 일이다.

 

그렇다면 글을 '잘' 읽는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 걸까. 현실 세계는 이해한 바를 정리해서 요약하는 차원을 넘어 그 이상의 다양한 문제해결력을 요구하고 있고, 이를 위해 우리는 더 정확하고 깊게 이해하는 능력이 필요하다.

 

책에 따르면 단순히 글을 읽고 정보를 취합해내는 것과 글을 깊고 정확하게 이해해서 삶에 의미 있는 방식으로 적용하는 건 아예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한다. 읽고(보고 이해하고) 쓰는(표현하고 구성하는) 일이란 기호sign 로써 의미meaning 를 다루는 행위로, 기호를 선택, 연결, 조합, 분석하면서 어떤 의미를 만들어내는 일은 고도로 복잡하고 정교한 지적 사유의 과정을 요하는데, 이러한 리터러시를 제대로 배우기 위해서는 <질문> 과 <대화> 가 필수적이며 대화자들 사이에 공유된 <책임감> 이 필수적이라고 한다. (질문 없는 사회, 대화 없는 사회, 책임 없는 사회는 문해력의 차원을 넘어 사회문화적 문제를 야기한다)

 

우리는 불확정성의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기 위해 '세상을 읽는 독자' 가 되어야 한다. 세상을 읽는다는 것은 비판정신criticality 을 요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상대를 깊이 이해할 열린 마음을 가지고 다양한 출처에서 비롯된 가치 있는 정보를 선별하여 꼼꼼하고 정확하게 읽어야 한다.

 

<읽는 인간> 은 비판적 읽기를 위한 일종의 툴tool 을 제공하는데 여러 툴을 조합해서 정리해봤다.

 

Q. 나는 무엇을 읽고 있는가

Q. 나는 무엇을 읽을 수 있는가

Q. 나는 무엇을 읽어야 하는가

 

Q. 지금 읽고 있는 텍스트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Q. 어떤 근거를 가지고 주장이나 견해를 내세우고 있는가

Q. 다양한 아이디어들이 어떤 논리적 관계로 연결되고 있는가

Q. 텍스트의 이면에 누가 있는가, 그들이 숨기고 있는 의도, 목적, 선입견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가

Q. 텍스트에서 지워진 존재들은 없는가

Q. 동일한 주제에 관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개인적으로도 아는 것과 알고 있는 것을 내 언어로 요약하고 정리하는 것, 그리고 그걸 타인에게 전달하는 것은 각각이 다른 차원의 문제임을 인지하고 있다. 저자가 말하는 "읽지 않았지만 읽었다는 착각" 을 늘 경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혼자서만 끄적이는 나만의 방에서 벗어나 타인과 견해를 듣고 타인과 소통하는 공간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SNS를 열심히 하자 생각했다.

 

"우주를 탐험하려면 의심과 상상 모두 필요하다. 상상은 종종 우리를 말도 안 되는 세상으로 데려간다. 그러나 상상하지 않고는 아무 데도 갈 수 없다. 의심을 통해서 우리는 환상과 사실을 구별한다. 의심하면서 우리 자신의 사유를 검증한다."

《 코스모스 》, 칼 세이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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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의 소멸 - 우리는 오늘 어떤 세계에 살고 있나 한병철 라이브러리
한병철 지음, 전대호 옮김 / 김영사 / 202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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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물事物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현세대 인류는 과잉정보 세계 속에 살고 있다. 그 속에서 스마트폰 스크린 속 소통을 위해 발악하는 우리는 '지금, 여기' 에 있는 우리 주변의 세계를 이루는 세계사물에 관해 잊어가고 있다. 현실 속 가늠할 수 없는 타자의 존재를 외면하고 스마트폰 세상 속으로 눈을 돌린 우리는 정보화된 이미지를 통해 타자를 대상화하고 '처분' 가능한 존재로 만든다. 우리는 스마트폰을 통해 세계를 처분 가능한 정보화된 디지털 그림으로 만들고, 그렇게 제작된 (디지털화된) 세계는 과도현실적 실재와 다름없다.

 

우리는 끊임없이 스마트폰을 쓰다듬으며 우리 자신을 생산한다. 끊임없이 정보를 생산하며 <좋아요> 라는 '디지털 아멘' 을 받고자 애쓴다. 타자를 쫓아내기 위해 SNS에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꾀기 위해 글을 쓴다. 오늘날 디지털 인류의 구호는 '공유' 이며 우리는 모든 것을 공유하고자 우리 자신을 내보이고 연출한다. 디지털 세상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공고화하고 절대화시키기 위해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마저 지운다.

 

그런 우리는 진정 '소통' 을 통해 '공허함' 을 채울 수 있는가. 한병철 교수님은 스마트폰을 통한 과도소통이 우리를 외롭게 만드는 존재론적 이유는 다름 아닌, 타자를 '너' 라는 존재가 아닌 '그것' 으로 만들어 사라지게 한다는 점이라고 지적한다. 즉 스마트폰은 '지금, 여기' 에 존재하는 타자를 사라지게 하기 때문에 우리의 존재론적 공허를 채우지 못한다.

 

이에 대해 <사물의 소멸> 은 인간에게 (1) 무언가를 할 능력과 (2) 아무것도 하지 않을 능력이 있음을 주지시키며, 과도활동에서 탈피하여 고요하고 관조적인 방식으로 하염없이 머무를 능력을 강조한다. "네게 장미가 소중한 이유는 네가 장미를 위해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라는 <어린 왕자> 속 여우의 말처럼 삶의 어떤 날을 다른 날과 구별하고, 누군가를 다른 이와 구별하는 무언가는 <지금, 여기> 에서 <함께> 머무르는 시간의 차이임을 이야기한다.

 

한편으론 공감이 가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갸웃하게 되는 책이었다. 손글씨를 쓰는 게 타이핑을 하는 것보다 좋다는 점에서는 확실히 공감이 가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를 수기로 쓸 때면 내 생각을 온전히 다 잡아내어 표현해내지 못하기 때문에. (타자를 치면 떠오르는 생각을 그때그때 표현해낼 수 있다고 믿는다) 인공지능에 관련해서는 이전에는 나 또한 컴퓨터가 인간이 제공하는 정보의 상관성만을 파악할 뿐 인과성을 파악할 능력까진 되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얼마 전 현세대 인공지능은 이제 막 세상을 '인식' 했을 뿐이라는 말을 듣고 다소 충격을 받았다. 왜냐하면 그 영상 속 교수님에 따르면 "정보의 양이 늘어나니 컴퓨터가 세상을 '인식' 하기 시작했다" 는 것이다. 여기서 정보가 더 늘어나면 세상을 인식할 뿐만 아니라 처리하고 생산해내는 단계까지 갈 것이 분명하지 않을까. 여하튼,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 속 세상보다는 내가 직접 만지고 접할 수 있는 존재 및 물체를 자각하며 살아야겠다는 반성이 든다.

 

 

읽던 중의 기록.

 

<사물의 소멸> 이 생각보다 술술 읽힌다. (물론 타자의 추방 때처럼 뒤에 이해 못 할 편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왜 놀랐냐면 처음 샀을 때만 해도 첫 페이지에서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었기에. 본디 논문이라고 하니 어쩔 수 없겠지만 대중을 고려한 친절한 책은 아니기에 다른 저서들을 읽으면서 쌓아온 관련 지식이 없으면 뇌가 계속 뱉어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이 저자의 다른 저서와 다른 점이 뭐냐 하면 인터뷰가 있다. 역자 후기도 아니고 한병철 교수님의 말. 새삼 '구어' 의 힘을 느꼈다. 이 인터뷰가 정말 쉽게 읽히는데 중요한 건 저자의 저서 대부분에 관한 방향성이 녹아 있기에 한병철 교수님의 철학에 관심이 있지만 읽기가 너무 버거우신 분들은 <사물의 소멸> 뒤에 수록된 인터뷰를 꼭 챙겨보시는 게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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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의 추방
한병철 지음, 이재영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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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사회에서 '다양성' 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나와 다른 존재가 가진 부정성을 부정한, 체제가 '허락' 하는 다양성은 아닌가? 신자유주의의 도래 이후 자아는 줄곧 자신을 생산, 실행, 상품화하도록 하는 판매 논리에 따른 진정성의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시스템과 일치하는 차이 (잡다함) 만이 허용된다.

 

세계화는 모든 것을 같게 만든다. 그 동일화의 폭력 속에서 맥락은 소멸되고 오직 자본주의를 기반으로 한 신자유주의를 받들기 위한 정보 · 소통 · 자본의 순환만이 이루어진다. 이 과정에서 거슬리는 타자들은 잡초 뽑듯 제거되고 배제의 반옵티콘banopticon 이 형성된다.

 

타자에 대한 항체는 타자의 부정성을 전제로 형성된다. 그러므로 애초부터 그 부정성이 존재하도록 용납하지 않는 사회는 결국 자기 파괴의 결말을 낳는다. 갈등을 처리하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 사회에서 자신의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에고로만 가득 찬 자아는 자기 자신에 대한 걱정이 지나쳐진 나머지 상상적 정체성을 갖게 된다. 가상의 적을 만들어 상상적 면역성을 획득한다. '적' 이란 사실 자신에 대한 문제가 형태화 된 것이다.

 

시선 없는 매체이기에, 역설적으로 어디에나 존재하는 시선을 내포한 디지털 매체는 자아 속에 자아가 가득 차도록 만들고 타자가 들어설 공간을 없앤다.

 

에고ego 라는 집의 밖으로 나오기 위해, 자아는 문턱을 넘어야만 한다. 자아는 전에 겪어본 적 없던 새로운 차원과 삶을 문턱을 넘으며 경험한다. 문턱은 부정성을 내재하며, 자아는 고통을 겪음과 동시에 타자에 대한 환상을 갖게 된다.

 

낯섦, 부정성, 수수께끼를 전제한 예술은 이런 세상 속에서 나와 다른 부정성을 가진, 다른 존재로서의 타자를 마주할 용기를 가질 수 있게 한다. 우리는 타자의 고유성이 머물러 있는 타자의 시간을 인정하며 타자와 만나 대화하고, 타자를 향하고, 타자를 대신해 주기 위해 지각을 열어 타자를 인식해야 한다. 낯선 것을 일상으로 편입시키는 자기 초월을 보여야 한다.

 

환대란 "이방인이 타지 사람의 땅에 도착했다는 이유로 타지 사람에 의해 적대적으로 취급받지 않을 권리 (p. 32)" 로 타자를 타자성 안에서 인정하고 환영하는 것이다. 이는 자기 자신에 도달한 보편적 이성의 가장 높은 표현으로 한 사회의 문명화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라 볼 수 있다.

 

 

드디어 다 읽었다. <심리정치> 와 병렬 독서용으로써 함께 시작했음에도 이제야 완독 한 이유는 '음성' 파트 때문이다. 아직도 그 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고, 아마도 이후에 다시 읽어야 할 듯하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결국 귀결되는 질문은, 제목인 "'타자의 추방' 을 야기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다. 이는 곧 자신밖에 모르는 공허한 메아리, 타자의 부정성이 두려운 나머지 '소멸' 시켜버리는 것이 이유일 것이다.

 

 

아마 최근에 리뷰를 쓴 영향 때문이지 싶은데, 문턱의 장에서는 영화 <듄> 이 타자의 생각 및 경청하기의 장에서는 <나의 해방일지> 가 떠올랐다. 드라마는 일평생 사회의 반옵티콘banopticon 속에 머물러 온 '타자' 인 구자경에게 염미정이 '환대하라' 는 말을 건네는 장면을 보여준다. 염미정은 세간의 사람들은 부정하고 말았을 그가 가진 거스를 수 없는 부정성을 포용하고, 자신의 논리에 맞추어 그를 변화시키기보다 그의 말을 경청하고 환대하자 이야기한다. 평생을 에고라는 단단한 집 밖으로 나오지 못해 이별 후 염미정의 이름을 부르짖을 때조차도 자신의 감정을 온전히 깨닫지 못했던 구자경은 그제야 자신을 둘러싼 단단한 막을 깨고 환대를 실천하며 염미정의 손을 잡고 세상 밖으로 나오게 된다. 세상을 헤매며 방황했던 돌아온 탕자가, 추방되었던 타자가 한 사람의 '환대' 로 다시 세상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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