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정국, 제3자가 그어놓은 북위 38도선을 근거로 갈라진 남과 북은 집단의 생각이나 논리가 만들어 낸 욕망을 분출할 수 있는 그릇으로 서로 다른 국가와 공동체를 영위 할 인민(국민)을 만들어냈다. 대한민국이야 알다시피 손색이 있는 민주국가로 출발하여 반 세기 넘는 시간 동안 쓰레기더미에서 장미같은 민주주의를 피워냈지만, 북한은 체제의 원형을 거의 바꾸지 않은 채 초창기의 국가 탄생 설화를 그리워하며 강성대국을 그저 꿈만 꾸고 있다. 그러고 보면 반도에 깃든 두 국가의 탄생과 존속에는 신비스러운 면이 있는 듯싶다. 역사 서술은 정치지도자 중심이지만 실질적 추동과 존속은 인민에 의해 주도되는 듯 보이니.
이러한 공동체를 버티는 힘인 인민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체제가 완성된 다음의 인민은 이전 세대에 의해 교육되고, 국가 풍토에 의하여 길러지는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다면 북위선 북쪽이건 남쪽이건 미래나 체제에 대한 전망과 계획을 전연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신념’ 또는 ‘생활 근거’로 인해 ‘국가를 선택한’ 인민은 어떻게 선발/탄생 되었다고 보아야 하지 않을까? 개개인이 선망하거나 선호하는 체제를 따라 옮겨 가기도 하고, 미처 이주하지 못해 그럭저럭 살아가야만 하는 민중 가운데 현재 공직자나 앞으로 공직자가 될 가능성이 높은 사람들은 국가의 미래라는 점에서 더욱 그럴 필요가 있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초기 국가는 뽑아 쓸 사람과 배제해야 할 사람을 어떻게 가려냈는가, 혹시 손등이나 손바닥을 보고 노동자인지 농민인지 사무원인지 그 출신성분을 가려냈던가?
쓸 사람과 그렇지 않을 사람을 가려낸 도구는 바로 자서전과 이력서였다. <고백하는 사람들>에서 저자는 879명의 이력서와 자서전, 평정을 분석하였는데, 공직자가 아닌 보통민의 이력서도 십 여 가지 상세 항목을 기재하도록 하였으며, 태어나서 자서전을 쓰는 오늘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낱낱이 고백하는 형태의 글을 써내야 했다. 이러한 사회주의국가의 인민 자서전 쓰기는 북한의 원조인 소련에서 시작되었다. 레닌 사후 쏘비에뜨 지도자는 완벽한 사회주의 국가 완성을 위해, 나아가 통제를 위해 공직자를 중심으로 한 모든 계층의 사람으로부터 자서전과 이력서를 수합 하였다. 북한 역시 학생, 교원, 공직자, 하급 국가기관의 사무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에게 상세 항목의 이력서와 소위 자서전을 받고, 학생에게는 교사, 교원에게는 교장과 지역의 시학(=장학사쯤 되려나?), 상급 공직자, 부서장 등에게 평정을 받아 이를 모두 기록했다. 인민의 사상 검열과 차별, 나아가 배제를 위한 장치였던 것.
고백하는 사람들의 짜임새는 역사의 큰 틀을 구성하는 큰 인물 중심이 아니라 눈 밝은 학자라도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무수히 많은 장삼이사의 자서전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 같다. 북한사를 서술 할 때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니다. 저자는 해방정국에서 전쟁 전야에 이르기까지 작성 수집된 이력서를 열 가지 굵직한 사건으로 재구성했다.
확고한 체제 기반을 닦기 위해 마련한 계획이었겠지만, 작성자들의 이력서는 단일하고 단선적인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일본인과 일본 자본 축출, 이북 내 좌파와 우파의 분열, 촌락 심부에 파고든 세포 조직 구성, 토지개혁 시 토지를 잃어 분통을 터뜨리는 지주의 이야기, 소작을 하다가 갑자기 땅을 얻게 된 빈농들, 현상 유지를 원하는 중상계급 사무원과 교육자, 일제로부터 하급 기술을 받았다가 벼락 출세한 기술자들. 이른바 ‘민주 혁명’을 요구하는 좌파 학생들, 지주 출신으로 신체제에 눈치만 보다가 어쩔 수 없이 굴복한 사람들, 무수한 사람들의 자서전과 이력서는 개개인이 서로 다른 사고방식으로 사건과 상황을 대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그렇지만 무명의 민중이 쓴 글일지라도 윤색이 없었을까? 내가 느끼기에 오히려 더욱 윤색을 가했던 것 같다. 윤색을 하는 이유는? 신체제 내에서도 출세에 대한 욕망, 자기 보호에 대한 기본적인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에게 불리한 것은 축소하거나 어쩔 수 없는 그런 분위기에 휘말렸다거나. 이를 두고 저자는 전략적 글쓰기 라고 하였는데 평정자들이 작성자의 뱃속을 들여다보는 듯, 날카롭게 평정하고 비판을 가하는 등, 개인을 해부하고 집단에 철저히 예속시키기 위한 사전 작업이었다.
이 모든 일은 국가 만들기, 국민 만들기의 일환이었다. 북한 사회주의 초기의 정책이 민중 사이로 얼마나 깊숙이 스며들었는가, 또 북한에서 일제강점기 부역자를 대거 숙청했다고 하는데 평범한 소시민 계층이 부역한 결과로 어떠한 차별 혹은 숙청을 당했는지 알 수 있었다.
책을 통해 북한 체제 하 인민 대중의 탄생을 보다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북한이 사회주의 국가를 천명하며 계급 없는 평등을 강조했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하지만, 소설 <태백산맥>만 보아 남로당 출신 인사들이 북로당으로부터 질시와 차별을 당하는 한편 당에 대한 충성심을 의심받는 것으로 보아 국가 탄생 이면의 인민 만들기는 이보다 훨씬 강고했을 것이다. 이러한 계급과 출신성분에 따른 차별은 북한이나 남한이나 분명히 존재했다. 북한에서는 일제 부역 여부, 가족의 성분, 월남자 존재 여부 등을 가지고 작성자를 좌천, 강등 시키는 등 연좌제를 적용하였다.
국가 기획 초기, 강고하지 않은 체제를 보위하기 위한 전략이었을테지만, 기술자나 교원 채용 등에 있어 능력을 우선시하지 않고 출신성분, 당성과 소위 ‘혁명 사업’을 우선시 하는 등, 체제 우위의 사고 방식은 80년대 이후 노정된 북한의 기술 미발달의 원인을 이미 배태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일전에 비밀결사에서 저자의 이전 저작이나 논문을 거론한 적이 있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편집한 <북한 체제의 기원>(역사비평사, 2018)에서도 인민 대중의 이력서와 자서전에 보이는 내용을 다채롭게 인용하는 한편, 한국전쟁 직후 수복된 소위 인제군 기록들은 북한 현대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 보여진다. 북한에 대해서 환상을 가질 필요도 없고 막연한 적대감을 가질 필요도 없겠다. 체제의 원형을 현미경을 들이대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어떤 동질성에서 함께 출발했으며, 어느 부분에서 달라지는가를 자세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는 이유에서 매우 유익한 독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