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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중독 - 미국이 군사주의를 차버리지 못하는 진정한 이유
조엘 안드레아스 지음, 평화네트워크 엮음 / 창해 / 2003년 2월
평점 :
2004년 오늘, 반공/친미 이데올로기에 오래도록 세뇌된 사람이 아니라면 미국을 자유의 수호자, 모범적인 세계의 경찰로 생각하는 한국인이 과연 얼마나 될까? 미국이 전세계적으로 수많은 전쟁과 공작을 일삼고, 어용 정권을 세우고, 자기들의 이해에 맞아떨어질 때에만 인권 문제를 내세우는 등 깡패짓을 하고 있다는 건 많이들 알 것이다. 내가 이 책을 구입한건 이 사실을 새삼스럽게 확인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예전에 본 마이클 무어의 'Bowling for Columbine'에, 신대륙 발견부터 인디언 학살, 남북전쟁, 군사주의 국가로 발전(?)해 가는 미국의 근대사를 우스꽝스러운 애니메이션으로 편집한 부분이 있다. 무어는 미국에서 왜 총기사고가 빈발하는가 하는 질문에서 출발해서 미국이 '태생부터 폭력과 전쟁으로 일으킨 나라'인 것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진단을 제시한다. 과장이나 편파적인 해석이 섞여 있을지는 몰라도, 상당히 흥미로워서 기억에 남는다.
(정말로 적절하다고 생각되는 이 책의 표현을 빌자면) 미국이 전쟁에 '중독'된 근본 원인은 무엇인지, 어떤 역사적 귀결인지가 궁금해졌고, 그래서 이 책의 부제(Why the US Can't Kick Militarism)를 보고 바로 구입을 결정했다.
그런데 책 내용은 생각보다 실망스러웠다. 우선 책은 60페이지(앞 뒤 부록 빼면)밖에 되지 않는다. 즉 알라딘의 미리보기로 보면 책 내용 전체의 20% 정도나 읽어보게 되는 셈이다. 챕터가 여러개로 나뉘어져 있지만, 각 챕터의 제목에 걸맞는 내용을 담고 있지 않으며 책 전체의 논리적 연관성과 구조는 매우 약하다. 그 대신, 미국 정부와 대통령, 군산복합체가 그동안 어떤 나쁜 일들을 했는지를 평면적으로 나열하고 강변하는 수준이다. 예를 들면 후세인/빈라덴이 왜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되었는지, 미국이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을 지원하게 된 애초의 배경은 무엇인지에 대해 거의 설명이 없다.
그리고 일부 내용은 왜곡/과장된 것도 있는 모양이다. 이 책의 원서(영문판)에 대한 아마존 서평에 보면 어떤 사람이 조목조목 따져 가면서 '사실관계'를 잘못 짚은 걸 지적하는걸 볼 수 있었다. (맞는지 아닌지 나는 알 수 없다.) 물론 어느 정도의 왜곡이 있다 하더라도 책의 큰 줄기가 완전히 어긋난 것은 아니겠지만, 책의 문구나 연설문에서 한문장씩 떼어다가 놓은 인용 방식은 (상당수가 인물들을 매우 극단적이고 악랄한 전쟁광으로 표현한 것들이다) 좀 주의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든다.
결국 차분하게 사실을 지적하고 군사주의의 위험성을 조목조목 논하는 대신 성급하게 선동하는 듯한 느낌의 책이 된 것 같다. 나는 이 책의 부제인 'Why the US Can't Kick Militarism'에서 'Why'를 거의 읽을 수 없었다. 하긴 60페이지짜리 만화에 실을 내용이 얼마나 되겠는가. 이렇게 얇은 책인줄 구입하기 전에 진작 알았다면 재고해 보았겠다만. 서문을 보니까 애초부터 행사에서 배포할 조그만 booklet 컨셉으로 제작된 책이었다고 하니, 너무 큰 기대는 갖지 않는게 좋을 것 같다. (심도 있는 내용은 아니지만 부담 없이 읽어보기엔 좋은 책이다.)
미국을 자유 민주주의의 전도자 쯤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올만 한 책이다. 하지만 이제 '깨일만큼 깨인' 우리나라 독자들은 그다지 새로울 것이 없거나 다 아는 내용들이 많다. 재미있는 것은, 자기들 나라가 자유, 평화를 수호한다는 자부심으로 가득찬 미국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충격으로 받아들여질 것 같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