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완전판) - 0시를 향하여 황금가지 애거서 크리스티 전집 4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이선주 옮김 / 황금가지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 아래 서평들을 보니 몇몇은 간접적이나마 범인이나 트릭을 살짝 언급한 것들이 있으니 주의하시길.. #

대체로 이 작품은 좋아하는 분들과 그렇지 않은 분들이 뚜렷하게 나뉘는 것 같다.

사실 <0시를 향하여>는 장르의 전통을 따르는 본격추리물로 보자면 진부함이 있다. 사건의 트릭이 너무나 평범하다. 우발적인 범행도 아니고 무려 8개월 전부터 세밀하게 계획해 놓은 살인이라고 하기엔 용의주도함이 부족해 보인다. 좀더 손쉽고도 확실한 방법들은 찾아보면 많지 않았을까?

그리고 작가는 거의 마지막까지 결정적인 단서 두어 개를 손에 꼭 쥐고 독자에겐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이것이 극적인 효과를 낳기도 하고, 그중 하나는 살인범 자신의 계획에서도 미처 생각하지 못한 허점이었기는 하다. 다만, 답을 제시하게 독자에게 도전장을 내미는 엘러리 퀸 스타일의 페어플레이를 좋아하는 독자는 약간 실망할 수도 있겠다.

줄거리 진행의 작위성을 지적할 수도 있겠다. 우선 주인공 네빌 스트레인지가 전 부인과 지금 부인을 휴양지의 저택으로 초청하여 둘이 친구도 되고 함께 지내자고 하는 설정이 좀 작위적인 건 사실이다. 말도 안된다며 길길이 날뛰는 현재 부인, 괜찮다고 말은 하지만 속마음은 반대인 전 부인, 둘 다 어쨌든 비교적 쉽게 제안에 응한다. 하여튼 이런 상황 설정에 대한 설득력은 떨어진다.

작위적이라고 지적되는 다른 한가지는 소설 앞부분에 아주 잠깐 나왔다가 잠잠하던 사람이 막판에 갑자기 나타나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그런데 이건 작위적인게 아니라 '단지 카메라가 8개월 전부터 그 곳을 촬영하고 있었던 것뿐'이다. 물론 시간을 거스를 수 없으므로 현실이었다면 이 사람이 나중에 이런 역할을 할 것을 미리 알고 과거부터 보여줄 수는 없다. 작가가 신(神)의 관점에서 '나중에 한 곳에 모이게 될 운명인 사람들'의 행적을 짚어 나간 것 뿐이다. 이것은 소설 속 인물과 사건의 작위성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이 이야기를 꺼낸 것은, 사실은 이러한 구성미가 <0시를 향하여>의 가장 뛰어난 개성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과 같은 영화 장면을 상상해 보자. 현재 시점에 운명적으로(?) 만나게 될 사람들의 과거 이야기를 교차편집해서 보여준다. 관객은 처음에 이게 뭐야.. 얘들이 서로 무슨 상관이람.. 하고 어리둥절하다가 시간이 현재를 향해 달려감에 따라 결국 아! 하고 무릎을 치게 된다. 지금은 전혀 새로울 것도 없는 기법이지만 과연 크리스티가 작품을 쓰던 60년 전에도 그랬을까?

<0시를 향하여>가 이러한 아이디어를 처음으로 구현한 소설은 아마 아닐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살인사건에서 살인은 이야기의 시작이 아니라 마지막이다'라는 아이디어는 분명 독창적이다. 그리고 이 아이디어를 구현하기 위해 크리스티는 서로 관련 없는 인물이나 사건이 0시를 향하여 시간/공간적으로 모여드는 기법을 적절하게 이용했다는 점에서 역시 애거서 크리스티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게 만든다.

나중에 보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처음 그 아이디어를 생각하기란 정말 어려운 법이다. 크리스티는 <열 개의 인디언 인형>, <애크로이드 살인>, <오리엔트 특급 살인>, 그리고 <0시를 향하여> 까지 아무도 생각 못한 아이디어들을 창안하고 훌륭하게 구현했다. 많은 작품을 쓴 흥행작가이어서만이 아니라, 추리소설의 고정관념을 뒤집고 창의성의 극단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나는 그녀가 진정 대단한 작가라고 생각한다.

다음과 같은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탐정 소설이란 게 대개 시작부터 잘못되어 있어! 살인에서 시작을 한다고. 하지만 살인은 그 결말일세. 이야기는 살인 사건이 있기 훨씬 전부터 시작되네. 때로는 수년 전부터 시작되지. 어느 날 몇 시, 어떤 장소에 어떤 사람들이 모이게끔 하는 원인과 사건들에서 시작하는 거란 말일세. .... 이 모든 정황이 하나의 지점을 향해 가는 거야. 그리고 정해진 시각이 되었을 때 정점으로 치닫는 거지. 0시라고 해 두세. 그렇지, 모든 것이 0시를 향해 모여드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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