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이란 무엇인가 - 한울과학문고 2 한울과학문고 2
에르빈 슈뢰딩거 지음, 서인석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1년 11월
평점 :
절판


물리학의 거장 슈뢰딩거가 쓴 '생물학 책'이라는 점, 그리고 이보다 더 거창할 수 없는 <What is Life?>라는 제목을 보고 바로 주문해 버렸다. 생명이라는 현상을 약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면 어떤 아이디어를 내놓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말이다.

이 책은 그가 2차대전 중에 더블린 대학에서 한 강연을 모아 놓은 것이다. 내 소감을 솔직히 말하자면 기대만큼은 아니라고 해야겠지만, 절대 이렇게 간단히 평할 수 없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전인미답의 연구 대상인 생명 현상의 본질이 그렇게 쉽게 설명될리가 없다는 당연한 이유이다. 책 제목만 보고 부푼 기대를 품은 내가, 이 어려운 주제를 게으르게 '날로 먹으려 한' 내가 잘못이다. 뭐 엄청나게 큰 기대를 한 것은 아니었으니 과장이기는 하지만.

둘째, 슈뢰딩거는 매우 환원론적인 접근 방식을 택하고 있다. 미시적 물리 현상을 규명하는 양자론의 대가답게 그는 생명현상의 특징(자기 복제, 항상성, 엔트로피 증가에 대한 저항)을 미시 수준의 물리학으로 환원시켜 설명 가능한지 시험해 보려고 한다. 생명이라는 주제가 역시나 아주 심오하고 방대하기 때문에, 이같은 관점은 무척 흥미롭지만 '너무나 멀리 있는 목표를 단순하게 바라보는' 것 같다는 느낌이다. 물론 정통 생물학자가 아닌 한 남들 같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주제를 다룬 것이니 거장은 거장이다.

셋째, 이 책은 1944년에 씌여졌다. 왓슨과 크릭의 DNA 이중나선 발견이 1953년이며 그 이후 50년간 분자생물학이 생명에 대해 알아낸 지식은 그 이전의 인류가 수천년동안 알아낸 것보다 수백배는 많을 것이다. 따라서, 지금은 구식으로 보이는 내용 - 예를 들어 유전자의 실제 크기가 얼마 정도 될지에 대한 추측과 같은 - 에 대해 할애하고 있는 부분들이 있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때문인지 책의 부록으로 1970년대에 한 생물학자가 슈뢰딩거의 이 책에 대해 논평한 논문이 실려 있다.(이 내용은 어려웠다.)

이런 점을 감안하고 본다면 그의 앞서가는 생각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명불허전이다. 실제로 이 책은 현대 분자생물학의 태동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니까. 사실 책장을 빨리 넘기기는 했는데 뒷부분은 완전히 이해 못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 다시 차근차근 곱씹어볼 생각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 책이라고 본다.

다만, 내용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과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독자에게는 흥미가 떨어질지 모르겠다. 또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분자생물학의 최첨단 연구 성과를 접하고 싶은 독자에게도 적합하지 않을 것이다.

슈뢰딩거는 왜 자신의 전문 분야를 벗어난 생물학 책을 낸 것일까?(물론 책이라기보다 강연록이지만.) 그는 서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분명 다음과 같이 느끼고 있다. 우리는 지금에 와서야 세계를 전체로서 온전하고 제대로 이해하는데 필요한 믿을만한 재료들을 얻기 시작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누구든 자신의 매우 좁은 전문분야를 넘어서서 세계 전체를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앞에서 말한 우리의 진정한 목적이 영원히 사라진 것이 아니라면 나는 우리들 가운데 누가 되든지 비록 어떤 것은 불완전하고 간접적인 지식일지라도, 그리고 그 때문에 이러한 작업을 하는 사람이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여러가지 사실과 이론들을 종합하는 작업을 시작하는 것 말고는 이 딜레마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고 생각한다.]

자기 전문 분야에서의 독보적인 실력을 가지고 다른 학문에 크나큰 영감을 줄 수 있다는게 정말 멋지고 부럽다.

번역에 대해서는 불만이 좀 있다. 번역이 매끄럽지 못한 문장이 꽤 많다. 꼭 두번을 읽으면 원 저자의 의미가 이해되면서 '이렇게 번역해 놓았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걸로 보면 내 이해력의 문제라기보다는 역자의 성의가 부족하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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