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으름에 대한 찬양 - 개정판
버트란드 러셀 지음, 송은경 옮김 / 사회평론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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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트랜드 러셀 같은 사람을 보면 부럽다 못해 경외심마저 느끼게 된다. 그는 박학다식하고 깊은 사고로 학문의 수많은 영역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글도 완벽하리만치 잘 쓴다. 매우 심오한 주제를 명료하고 군더더기 없이 설파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이 책은 그의 에세이 15편을 묶어 출판한 것이다. 에세이라 해서 한가한 신변잡기가 전혀 아니다. 누구나 가졌을 법한 소박한 질문들(우리는 이렇게 죽도록 일만 해서 뭐하는가, 학교에서 배우는 결국 쓸모없을 것 같은 지식들은 가치가 있는가 등)에 대한 생각부터 좀더 어려운 주제까지(사회주의를 서구에 도입할 필요성, 세계정부, 젊은이들의 냉소주의 등) 아우르고 있다. 길이는 각각 2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지만, 하나같이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시각이 돋보이는 명문들이다.

각 편의 소재는 다르지만,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의식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그것은 러셀의 표현을 빌자면 '불관용과 편협함, 그리고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하더라도 정력적인 행동은 그것 자체가 존경할 만한 것이라는 믿음으로 세계가 고통받고 있다는 것'이다. 내맘대로 정리하여 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다. (1) 배움과 지식의 진정한 가치 (2) 현대 산업사회에 적합한 가족 공동체 (3)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결합한 사회/경제 시스템 (4) 인류의 보편적 선(善)에 반하는 사상과 경제/정치체제에 대한 비판.. 등등이다.

주제를 보면 무척 딱딱한 글이 될 것도 같지만, 이 책은 현학적이지 않고 풀어 쓴 문장 덕분에 읽기도 수월하다. 러셀이 워낙 경제적이고 밀도 높은 글을 쓰는 사람인지라 같은 한 페이지라도 다른 이들의 글에 비해 많은 생각이 들어 있고, 이를 음미하는 맛이 무척 좋다. 그의 책을 읽을 때면 사람이 어찌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나 싶어 나같은 사람은 부럽기만 하다. 여기에 보편적 인류애와 은근한 유머까지 녹아 있어 더욱 좋다.

'게으름에 대한 찬양' 편에서 그는 근로의 미덕에 대해 물음을 제기하고 역설적으로 게으름을 찬양한다. 삶의 목적은 죽어라 일만 하는게 결코 아니라는 것이다. 노동은 지금보다 훨씬 적은 시간만 해도 모두의 물질적 필요를 충족시킬 수 있다. 나머지 시간은 여가와 사색에 할애하고, 나아가 과학이나 예술 같은 창조적인 활동에 투자하여 문명을 발전시키자는 것이다. 사실 나 자신도 이런 생각은 많이 했었지만, 이렇게 설득력 있는 논리를 나름대로 갖추지는 못하였다. 러셀은 근로의 미덕이라는 이데올로기를 역사적으로 고찰하고, 과학 기술의 발전 덕분에 이제는 일을 지나치게 많이 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모두를 행복하게 할 이런 체제가 왜 아직도 이루어지지 못하는지를 돌아본다. 하루 4시간 노동이라는 꿈같은 얘기는 물리적/경제적으로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적어도 무제한의 노동과 경쟁을 강요하며 일에 지쳐 버리는 사람과 일할 거리가 없는 실업자를 낳는 현대사회의 모순에 대한 비판은 백번 타당하다.

그 외에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현대판 마이더스',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하는가', '사회주의를 위한 변명', '금욕주의에 대하여' 등을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내가 필요한 것만 배우면 되지 먹고 사는데 지장도 없는걸 왜 학교에서 가르치냐고 묻는 학생이 있다면, 지식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인가를 명쾌하게 들려주는 '무용한 지식과 유용한 지식' 편을 보여주고 싶다.

내가 유독 마음에 들었던 이 책의 장점은 '게으름에 대한 찬양'이나 '서구의 문명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서 보듯 '당연해 보이는 것에 대해 반문해 보는 자세'이다. 오래도록 당연하다고 생각하고 살아 온 문화나 가치관을 타자의 입장에서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단순한 반동이 아니라 대안을 수반한 발전적 비판이라는 면에서 특히 훌륭하다. 게다가 1935년 이전에 씌여진 것을 감안하면, 그의 생각 가운데 상당부분이 오늘날까지도 아니 오늘날 더욱 더 와닿는 내용이라는 점에서 그의 혜안에 탄복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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