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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언어
케이스 데블린 지음, 전대호 옮김 / 해나무 / 2003년 5월
평점 :
쉬운 내용을 재밌게 풀어놓은 수학 대중서들이 많다. 한가지 아쉬운 점은 이들 다수가 독창성과 깊이에서 부족해 보인다는 점이다. 지은이가 어느 정도 문장력만 가지고 있으면 수학에 대한 일화나 수학이 일상생활에 적용되는 예 등을 가지고 적당히 말랑말랑한 내용의 책을 쓰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너무 심오한 내용은 대중서로 적합하지 않으니까'라는 핑계로 다 고만고만 비슷한 내용만 찍어내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수학의 언어'는 무사안일하게 수학의 주변 이야기들을 적당히 뭉뚱그려 놓은 (결국 뚜렷한 주제도 없는) 교양서가 아니며, 서론부터 분명한 목표를 정해놓는다. 수학이란 무엇인가? 수학을 다른 것과 구별하는 본질은 무엇인가?라는 결코 '대중적'이지 않은 심오한 물음을 던진다. 그리고 서론에서 이렇게 대답한다. '수학은 패턴을 인지하고 연구하는 학문이다'라고. 사실 책의 부제에서도 같은 답을 하고 있다. '안 보이는 것을 보이게 하는 수학'이라는 말로. 나는 이 문구가 아주 맘에 들었다. 'making the invisible visible'
서론에서부터 저자가 말하고 싶은 내용을 분명하게 제시하기 때문에 독자는 책을 읽어나가면서 각각의 내용을, 그리고 이것이 주제와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수학이 인지하고 분석하는 '패턴'이란 것이 어떻게 서로 다른 여러가지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지 수, 논리, 운동, 모양, 확률 등 8개 챕터에서 아주 자세하고도 체계적으로 그 근거를 제시한다. 그리고 이것이 별개가 아니라 매우 절묘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볼 때, 고대 수학부터 최신 수학까지 정말 수도 없이 많은 예들을 보이면서 이들을 하나의 통일된 주제, 즉 '패턴의 과학'으로 귀결짓는 솜씨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내용은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아마 중학생 이상이면 기술적으로 도저히 어려워서 책장이 안 넘어가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저자가 제시하고 있는 주제는 결코 가볍지 않으며, 이공계열 전공자들이 읽으면서도 뭔가 새로운 통찰을 얻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인상적인 구절이 있었는데, 요약하면 '악보를 눈으로 보는 것만으로도 음악을 들을 수 있으려면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연주되는 음악은 누구나 즐길 수 있고 특별한 훈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반면 수학을 '감상'하는 유일한 길은 수학의 기호를 보고 읽고 생각하는 방법을 훈련하는 것뿐이다. 인간은 음악 속에 있는 패턴을 바로 받아들이는 귀를 갖고 있지만, 아직 '수학적 감각기관'은 개발하지 못했다.'라는 것이다. 이 책이 수학적 감각기관을 후천적으로 훈련시키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책은 하드커버에다 표지 디자인도 아주 깔끔하고 고급스럽다. 장정이나 활자도 맘에 든다. 책갈피까지 있으니.. 다만 가격이 너무 비싼 것이 흠이다.
사실 번역 문제만 아니면 가격에 대해 불평할 생각이 없었는데, 번역이 너무나 엉망이다. number theory(정수론), twin prime(쌍둥이 소수) 등 이미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용어를 수 이론, 쌍 소수라고 한 것으로 보아, 역자가 수학과 별로 친한 사람이 아닌 것 같다. 게다가 수식이나 표가 틀린 것은 몇개 지적하려고 적어두다가 너무 많아서 포기했다. 예를 들면 110페이지는 표 전체가 통째로 틀렸다. 또 영어를 직역한 티가 너무 나서 actually는 문맥 무시하고 모두 '사실상'으로 번역해놓아서 지겹고, 분사구문을 직역한듯 쉼표들이 너무 많으며, 어색한 문장들도 많다. 하나만 지적해 보자.
'명제논리학에서 증명, 즉 타당한 연역은, 명제들로 이루어진 계열(series)인데, 이때 각각의 명제는 ~이거나 ~이다.'
라고 되어 있다. 원문에 아마 a series of ... 가 있었던 모양이다. 다음과 같이 하면 좋지 않을까?
명제논리학에서 증명이란 타당한 연역의 과정을 말한다. 이것은 ~이거나 ~인 일련의 명제들을 늘어놓은 것이다.
*결론* 원서가 매우 매우 좋은 책이니 가능하면 원서를 구해서 읽으시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