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음도 낮음도 없어라…모두가 평등한 '벌집' 도시


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이 이렇게 이야기 한 적이 있다. “내가 『율리시즈』 읽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언제 어느 페이지를 들춰 읽든 그 책의 전체 내용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좋아하는 도시는 이처럼 내가 어디에서 시작하건 그 도시 전부를 알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의 말을 풀이하면 좋은 도시는 한 모퉁이에서도 그 도시의 특성과 구조를 알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즉 도시를 구성하는 작은 부분이나 하나의 개체라도 도시 전부에 비해 결코 못지 않아야 좋은 도시가 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전체의 구조가 더 중요한 봉건적 도시를 질타하는 말이었다.

 
우리가 사는 도시를 가만히 살피면 그 구조가 상당히 계급적으로 되어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우선 도로체계가 계급적이다. 광로나 대로로 불리는 간선도로나 중로 소로 골목길 등의 이름이 그렇다. 각 급에 따라 속도나 교통방식이 다르다. 땅도 주거지역이나 상업·공업지역 등 기능별로 그 등급이 주어지고 그에 따라 건축행위가 달라져 결국 우리가 사는 방식도 달라지게 된다.

더 노골적인 것은 도심이니 부도심이니 변두리니 해 계급화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시의 중심 상업시설에서 일하는 사람은 변두리 근린생활시설에서 사는 사람보다 어쩐지 귀해 보이고 높아 보인다. 그뿐만 아니다. 중앙공원이나 중앙로.중앙광장 같은 이름이 붙는 곳은 다분히 우월적이며 권위적이어서 봉건시대의 중앙집중적 도시구조와 다를 바 없다. 가히 계급도시 아닌가.

요즘 만드는 신도시들은 죄다 이 모양으로 그 얼개를 갖고 있다. 뿐만 아니라 옛 도시들도 재개발의 구호를 내세워 그런 계급적 방식의 구조를 덧씌워서 개조한다. 마치 도시는 으레 그렇게 계급화된 구조로 되어야 합리적이며 기능적인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하다. 과연 도시는 그렇게밖에 될 수 없는 건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도시를 계획하고 만드는 교과서가 편파적이며 낡은 것일 뿐이다. 인구밀도계획.교통계획.토지이용계획 등 교과서에 항상 등장하는 이런 항목은 계량적 수치를 동원하여 마치 과학적인 것처럼 보랏빛 도시를 그리지만 우리를 계급적 사회에 예속시킬 위험이 있다. 어찌 우리의 오묘한 삶이 그렇게 기능적으로 정량화되어 예측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한 도시와 견주어 모든 면에서 반대되는 곳이 있다. 아프리카 모로코에 있는 페스(Fez)라는 도시다. 서기 789년에 최초로 건설되었으니 1천2백년 역사를 훌쩍 뛰어넘는 천년의 고도(古都)이지만 현재에도 여전히 모로코의 문화와 종교 지식의 중심지로서 영광을 잃지 않는 도시요, 모로코인들에게는 마음의 고향으로 자리하는 이슬람의 도시다.

787년 이슬람 세력권의 분열로 시아파를 이끌던 마호메트의 후손 술탄 이드리스가 수니파의 압박을 피해 모로코로 이주하여 이드리스 왕조를 창건한 곳이 모로코의 첫 이슬람 도시 페스다.

아틀라스 대륙의 교통 요충지에 세워진 이 도시는 14세기에 절정의 황금시대를 이루기까지 줄곧 번성하였다. 많은 사원이 세워져 종교적으로 성지가 되었고 스페인으로부터 학자들을 유치하고 대학을 세워 학문으로도 중요한 곳이었으며 지리적으로도 교역의 중심지여서 중요한 상업도시로도 번창하게 되었다. 12세기에 이미 12만 가구가 살았으며 공예품을 만드는 공장 수만 3천5백개에 달할 만큼 세계적 문명도시였다.

이 도시는 크게 세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다. 최초의 도시인 '페스 엘 발리'와 그에 이어져 왕궁과 사원 구역을 만든 '페스 엘 예디드'가 구도시 지역이며 프랑스 식민시절에 지은 유럽풍 도시가 덧대어 전체 도시를 이루고 있지만 페스의 성격을 가장 잘 나타내는 곳은 역시 가장 오래된 메디나 지역이다.

이 도시를 공중에서 내려다 보면 가운데 중정을 가진 ㅁ자형의 집들이 마치 벌집처럼 붙어 있다. 특별한 형상의 집은 아무리 찾아도 없고 모두가 고만고만한 풍경을 이루고 있는데 사원 같은 공공건물로 쓰이는 부분이 다소 큰 중정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센트럴 파크라든가 중앙광장은 있을 리가 없고 주작대로나 간선도로도 결코 보이지 않는다. 모두가 평등하니 도시의 축도 없고 도심이나 부도심이 있을 수 없다. 당연히 주거지역이나 공업.상업지역 같은 구역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의 삶부터 애초에 그런 구분이 없는 듯하다.

이들이 믿는 이슬람이 기독교와 다른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하느님 아래 성직자.평신도에 이르면서 많은 위계를 가진 기독교와는 달리 이슬람의 알라 아래는 모든 이들이 평등하며 계급이 없다. 이슬람교의 교회인 모스크의 내부구조를 보면 이를 잘 알 수 있는데, 성소나 지성소 같은 높은 곳 없이 모든 신자가 평등하게 예배를 보도록 그냥 텅 비워져 있다. 모두에 대해 모든 이가 평등한 삶, 그런 믿음이 그들의 건축과 도시를 그렇게 만든 것일 게다.

이 도시를 방문객이 안내자 없이 들어갔다가는 언제 나올 수 있을지 모른다. 거의 모든 길들이 한 길 남짓한 폭의 미로를 형성하고 있으며 시작점도 없고 끝나는 곳도 없다. 관광객과 뒤엉켜 엄청나게 많은 이들이 이 좁은 길을 메우고 있는데 이 길은 단순히 통행만 하는 길이 아니라 도시의 중요한 공동영역이다. 도로 자체가 장터이고 애들의 놀이터이며 노인들이 쉬는 곳이고 마을 사람들이 모여서 삶을 나누는 작은 광장이 되기도 한다.

불규칙하게 진행되는 길들은 때로는 위로 걸쳐진 집의 하부를 지나가기도 하고 더러는 계단으로 혹은 경사로로 되어 있기도 한데 밝고 어두움이 반복되면서 다이내믹한 움직임을 가진다. 이 길을 지나다 보면 마치 이 도시의 절단면 속에 와 있는 것을 느낀다. 멀리서 도시를 조감하면 황토덩이가 쌓인 것처럼 무미건조하지만 그 속에는 지극히 화려한 색깔들의 물건들이 널려있고 그들의 표정도 화려하며 활기에 차 있다. 마치 우리 몸의 혈관처럼 이 길의 공간은 생동하며 넘쳐 흐른다.

길이 다소 한적해진 곳에 면한 한 '벌집'의 문을 열고 그 속으로 들어가면, 아 밝고 맑은 빛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린다. 저 하늘에서 내려오는 햇살은 중정에서 걸러져 부드러운 빛으로 변하여 중정에 면한 방들 속으로 침윤한다. 밖에서는 예상할 수 없는 밝음이었다.

모든 집들이 각기 저마다의 태양을 다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모든 이들이 다 자기의 중심을 달리 가지고 있다는 말이며 확대하면 그 집은 그들의 독립된 세계이고 작은 도시다. 그러하다. 페스는 이 작은 도시들이 모여서 만들어진 집합의 세계였다.

계급적 도시는 그 중심축만 허물어뜨리면 전체가 와해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모든 부분이 평등하며 다른 중심들을 가진 도시를 멸하고자 하면 모든 부분을 제거해야 가능한 일이다. 한 집만 남아도 그 도시는 존속되기 때문이다. 20세기 초에 프랑스가 모로코를 침공하고 이 페스를 공격했지만, 수많은 작은 도시들로 이루어진 이 미궁 같은 도시를 도무지 정복할 수가 없었던 그들은 이 도시 곁에 신도시를 세웠을 뿐이었다.

나는 이 도시를 민주주의의 도시라고 부른다. 그것도 모든 이들이 중심이 되는 다원적 민주주의의 도시다. 우리가 민주적 사회에 살기를 원하고 다원적 가치를 신봉한다면 마땅히 우리의 도시도 그렇게 건설해야 한다. 그럼에도 여전히 봉건도시를 건설하고 있는 까닭에 그 도시와 건축의 영향을 피할 수 없어, 우리의 갈등과 대립은 갈수록 깊어가는 것일 게다.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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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前 도시, 이토록 완벽할 수가

 
근래에 우리만큼 많은 신도시를 건설한 나라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1970년대 서울의 강남을 필두로 바뀌어지기 시작한 우리 땅의 풍경은 그야말로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되었고 천지가 개벽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고 계획되고 있다. 넓은 도로와 높은 아파트들, 표준화된 놀이터와 근린공원, 그리고 난삽한 간판의 상가들…. 판박은 듯 어디서나 보이는 이런 신도시들의 모습은 이미 우리 시대가 꿈꾸는 이상도시의 풍경이 된 듯하다. 그런가? 그런 신도시에서 사는 우리 삶이 옛 도시에서의 삶보다 진보된 것이며 이상적인가?

도시가 형성된 시기는 BC 3500년께라고 한다. 잉여생산물을 처리하기 위한 시장기능이 필요하게 되면서 발달한 도시는 본질적으로 이익 공동체이다. 따라서 그 추구하는 이익과 목표에 따라 흥망성쇠를 끊임없이 이루어 왔지만 도시의 역사에 급격한 팽창을 기록한 것은 18세기에 일어난 시민혁명과 산업혁명의 결과였다. 개인의 자유와 재물의 축적이 가능해지면서 '도시의 공기는 자유롭다'는 슬로건 아래 농촌의 인구는 끊임없이 도시로 집중되었고, 이를 수용하기 위한 새로운 도시의 건설이 수도 없이 이루어졌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는 건축가들은 이상도시 건설을 목표로 수많은 계획을 발표하고 실현하였으며 바야흐로 모든 이들이 낙원 같은 환경에서 살 것을 굳게 믿었다.



격자형이 기본 구조를 이룬 도시의 중심은 포럼(광장)이었다. 뼈대만 남은 포럼 뒤로 폭발을 일으켜 폼페이를 한순간에 죽음의 도시로 만든 베수비오 산이 보인다.

그러나 그로써 등장한 20세기의 도시는 그전의 어느때보다 더 많은 문제와 갈등을 일으키고 만다. 빈부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고 계층 간의 갈등은 더욱 깊어졌으며 각종 소외와 범죄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의심마저 불러일으키는 데까지 이르렀다. 건축가들이 그렸던 장밋빛 미래는 곧잘 잿빛 현실이 되었고 첨단과학으로 만들어진 현대 도시들은 흉기가 되어 우리의 삶을 오히려 위협하곤 한다. 이게 이상도시인가.

이러한 의심을 더없이 짙게 만드는 곳이 있으니, 폐허로 남은 도시 이탈리아의 폼페이이다. 이 도시가 한창 번성하던 79년, 베수비오 산의 폭발로 일시에 멸망한 뒤 오랫동안 도시 전체가 화산재 속에 묻혀 있었기 때문에 이 도시의 생활을 지금도 생생히 알 수 있다. 폼페이는 토지가 비옥한 캄파냐 지역에 위치하고 로마에서 남쪽으로 뻗는 아피아 가도에 접한 교통의 요충지였던 까닭에 일찍부터 발달하였다. BC 8세기부터 그리스인들이 거주하였고 이어 북부에서 내려온 에트루리아인들이 고유의 문화를 이루었으며, 로마시대에 접어들면서 로마인들의 휴양지로서 번성하기 시작하여 상주인구 2만명이 넘는 대 도시가 되었다.

사방 2㎞의 영역을 성벽으로 두르고 내부에 포럼이라는 공간을 설정한 뒤 이를 중심으로 엮인 격자형이 이 도시의 기본 구조이다. 격자의 구조에서는 모든 부분이 평등한 관계를 갖는다. 이는 민주 사회(데모크라티아)의 건설을 목표로 하는 그리스 도시국가의 형태였으며, 기하학을 집대성한 피타고라스의 제자 히포다무스가 설계한 밀레토스가 처음이었고 알렉산드리아와 프리에네.페르가몬, 그리고 폼페이가 그 뒤를 이어 건설된 격자형의 도시이다. 모두가 민주적 이상도시를 꿈꾼 계획이었으며 더구나 폼페이 시절은 바야흐로 '팍스 로마나'의 시대였다.

예나 지금이나 도시의 하부구조는 그 도시가 가진 문명의 수준을 정한다. 첨단 기술시대인 21세기를 사는 지금에도 각 가정에 물을 공급하는 수도망이 없는 못한 도시들이 즐비한데, 2천년 전인 그 당시 폼페이는 집집마다 수도가 공급되는 도시구조를 이미 가졌다. 뿐만 아니라 마차와 사람이 서로 다른 길을 다니게 하는 도로 시스템을 이루고 있었으며, 돌로 포장된 모든 도로 밑의 하수로는 완벽한 망을 구축하고 있었다. 물론 그들이 세운 건축의 아름다움과 구조적 건실함은 대단한 것이다. 집집마다 화려한 모자이크로 장식된 마당이 있고 아름다운 그림의 벽과 천장, 각종 조각물과 생활용품은 고도의 세련된 솜씨를 보인다. '베티의 집'이나 '목신의 집'이라고 이름이 붙은 큰 주거에서 발견되는 생활양식의 질적 수준은 놀랍거니와 낮은 계층민이 살았던 작은 집들에서도 그 수준은 변하지 않고 있다.

도시의 프로그램은 또 어떤가. 공회당이나 신전 같은 정치적 종교적 시설의 완벽함은 말할 것도 없고 도시민의 풍요로운 삶을 위한 극장과 체육관.경기장 등의 여가시설이 즐비했다. 엄청나게 큰 규모의 공중목욕탕은 갖가지 기능의 공간들을 내부에 갖고 있어 그곳에서 그들이 즐긴 황홀한 삶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느 한 골목을 돌면 적당히 구석진 곳에 선술집이 있고 서민들이 애환을 나누고 술을 마시며 떠들던 흔적이 생생히 남아 있는데, 그 선술집 건너에는 매춘부의 집으로 여겨지는 곳도 있다. 그 속에는 춘화가 잔뜩 그려져 있었으니 아마도 공창(公娼)이었을 수도 있다. 저녁 무렵 왁자지껄 부산하게 움직이는 이 폼페이 골목의 풍경이 너무도 선명하게 그려진다.

사랑하고 꿈꾸기에 자유로운 도시, 때로는 슬퍼하고 좌절하는 삶을 즐기는 도시, 성과 속,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이 서로 적당한 대립과 긴장을 이루고 적절한 처방을 얻는 도시, 그 도시는 산 자를 위한 공간이 된다. 이 폼페이에서는 그 살아있는 도시의 모든 것을 볼 수가 있다. 이미 폼페이는 '자유로운 공기'를 가진 도시였으며 이는 현대의 도시계획가들이 꿈꾸던 이상도시였다.

나로 하여금 이 도시를 더욱 경외롭게 바라보게 한 것은 주거지역 내에 있는 동네 모습이다. 그들이 사는 동네는 모든 계층이 같이 모여 있었다. 큰 집과 작은 집이 같은 블록 내에 있을 뿐 아니라 귀한 직업을 가진 이와 천한 일에 종사하는 이들이 이웃하여 살았으며 부자와 빈자가 한곳에 모여 동네를 이루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물론 신분의 계층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모여 사는 지혜를 알았으므로 서로를 이웃으로 해 평등한 사회를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민주적 사회를 부르짖지만 갖가지 계층으로 갈라질 대로 갈라져 사는 우리의 현대 도시보다 훨씬 진보한 것이다. 그야말로 이상사회이며 이상도시임에 틀림이 없지 않은가. 그렇다. 폼페이는 완벽한 도시였다.

완벽한 행복을 즐기던 폼페이 시민들에게 바로 인근에 우뚝 선 베수비오 산은 그들의 도시를 지켜주는 든든한 신의 구체적 형상으로 섬겨졌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었던 그 산은 서기 79년 8월 24일 정오, 대폭발을 하고 만다. 어떤 이는 낮잠을 즐기다가, 더러는 목욕을 하다가, 또 어떤 이는 식사 도중에 그대로 그 행복한 삶의 순간이 영원이 되었다. 모든 도시의 순간이 정지하고 만 것이다.

그 조짐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이미 63년에 지진이 있어 그 징조를 보였으나 폼페이인들은 오히려 일부 파괴된 시가를 신속히 복구하여 더욱 완벽한 도시로 다듬어 어쩌면 더 이상 진보할 방법이 없는 도시로 만들었다. 완벽한 행복에 대한 복수일까. 그러한 그들의 행복에 더해 줄 것이 없던 신은 이를 참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을 멸망시켰을 게다.

"문명은 결코 진보하는 것이 아니다." 이 폐허의 도시 순례를 마친 뒤 동행한 선배 건축가인 민현식씨가 내뱉듯 한 말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못난 도시들을 생각하면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신도시는 우리 삶에 대한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상도시는 어디에 있을까.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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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도시 건축 순례] 1. 멕시코 테오티후아칸(神들의 도시)

인간 제물이 걷던 '死者의 길'엔 광기가 …

 
중견 건축가 승효상(52.이로재 대표)씨의 '세계 도시 건축 순례'를 새로 시작합니다. '비움의 건축'을 내세우며 개발 일변도로 치달았던 한국 건축문화를 반성해온 승씨는 앞으로 세계의 주요 건축물을 돌아보며 건축을 둘러싼 이념.권력.종교.윤리 등을 짚어볼 예정입니다. [편집자]

인간은 종교적 동물인가. 누군가는 그렇게 정의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가 도처에서 수없이 영향받는 종교적 환경을 설명할 도리가 없다. 요즘 일어나는 세계적 분쟁도 이념보다는 종교 간의 반목 때문처럼 보인다. 많은 이가 부인하지만, 이라크전쟁도 그런 갈등의 냄새가 짙다. 권력보다 더한 종교의 힘, 그런 힘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인가. 아마도 '피의 대가'가 아닐까.

신앙인으로서 가장 성스러운 행위는 순교(殉敎)일 게다. 그래서 절대자에게 자신의 목숨을 바친 그에게 성인이라는 칭호가 주어진다. 


순교는 그가 가진 믿음에 대한 박해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고대종교에서는 인간의 목숨을 신에게 바치는 일이 통례적 의식이었다. 성서의 창세기에 아브라함이 여호와의 명령을 따라 그가 백살에 낳아 애지중지 하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려 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것도 그 당시 종교적 의식으로 거행되던 관례였을 것이다.

원시종교라는 것이 대개 자연현상의 신비에 대한 경외로 인해 발생한 것이고 안녕과 풍요에 대한 기원의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 한다. 비록 그 숭배하는 대상이 지역과 종족에 따라 다르지만, 그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제물로 바치는 일은 어디나 마찬가지였다. 그들에게도 가장 소중한 것은 그들의 목숨이었고 순결한 처녀나 흠 없는 어린 아이들의 몸이라면 가장 귀한 제물이었을 것이다. 소위 이 인신공양(人身供養)의 습속은 문명이 발달하면서 인명 대신 살찐 양이나 잘 익은 곡식 등으로 대체됐지만, 중세에 이르도록 여전히 사람을 제물로 삼는 이들이 있었으니 중앙아메리카에 찬란한 문명을 이루어냈던 잉카와 마야, 아즈텍인들이 그들이다.

*** 멸망前 12만명 살던 대도시

멕시코 중원을 다스리던 아즈텍의 지배자들이 성지로 삼아 순례하는 곳이 있었다. 테오티우아칸(Teotihuacan)이라는 곳. '신들의 도시'라는 뜻을 가진 이 곳은 지금, 멕시코시티에서 북동쪽으로 50km를 떨어져 광활한 멕시코 고원 속에 있는 폐허다.

이 테오티우아칸은 문자도 남겨진 것이 없고 언어도 알 수 없어 그 도시를 건설한 이들이 누구였는지, 또 왜 이 도시가 멸망했는지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그러나 이 폐허의 도시에 그들이 남긴 놀라운 삶의 흔적은 그들이 얼마나 정교하고 찬란한 문명을 이루고 있었는가를 충분히 증언하고 있다. 고고학자들이 추측하기로는 AD 1세기부터 이 도시의 건설이 시작됐으며 7세기께 멸망했을 것이라고 한다. 멸망되기 전 이미 12만5천명 정도의 인구를 가진 도시였다고 하니 그 당시 다른 나라의 도시 인구와 견주면 세계에서 여섯째로 큰 도시였다.

놀라운 것은 이 도시가 가진 정교하고 치밀한 구조다. 건설 초기부터 이 도시의 완성에 대한 완벽한 구상이 있었음이 틀림없으며 그 계획은 수백년에 걸치면서도 빈틈 없이 실행돼 6백년의 세월을 버틴 것이다.

남북으로 길게 누운 이 도시의 중앙부에는 전체 도시를 관통하는 직선의 공간이 있는데 이름하여 '사자의 길(the causeway of the dead)'이다. 40m에서 1백m에 이르는 폭과 무려 2.5km가 넘는 길이의 이 엄청난 길. 더구나 남쪽으로 3km의 길이가 더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니 도대체 이들은 왜 이런 거대 공간을 만들었던가.

이 길의 양쪽 끝에는 크고 작은 피라미드가 수도 없이 전개돼 있는데, 북쪽 끝'달의 피라미드'라는 이름의 석조 구조물이 그 정점이다. 이 피라미드는 밑바닥 평면의 크기가 2백m를 훨씬 넘고 높이는 63m에 이른다. 그 앞의 넓은 광장 주변에 15개의 피라미드가 집중적으로 배열된 것으로 보아 이곳이 이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이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시작하는'죽은 자의 길'은 남쪽으로 강렬하게 달린다. 왼편에 불끈 솟은 '태양의 피라미드'를 지나고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석조 구조물과 크고 작은 광장, 사원.피라미드.집들의 폐허들을 지나면 산 후안(San Juan) 강을 만난다. 이 도시의 중요한 물줄기인 이 강을 건너면 왼편에 '지식과 문명의 신전'이라는 뜻을 가진 케찰코아틀(Quetzalcoatl)이 또다시 주변을 압도하며 군락을 형성하고 있다.

이 폐허에 남은 불과 몇 건축물의 잔해를 들어가 보면 이들이 누렸던 문화의 크기와 깊이가 소위 끝도 없고 한도 없음을 느끼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구조물의 구축방법뿐 아니라 공간의 구조, 도처에 부지기수로 만개한 조각의 솜씨, 화려한 벽화…. 보이는 게 이 정도이니 정작 그들 문화의 실제는 얼마나 화려했을 것인가. 그뿐이 아니다. 그 거대한 길의 바닥을 관통하며 구축한 배수 통로와 하부구조물 등, 그야말로 완벽한 도시와 완벽한 삶의 조건을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 젊은 여자의 심장 꺼내 바쳐

그러나 이 도시는 찬란한 문명에도 불구하고 단 하나의 가치에 의해 존속되고 있었을 따름이었다. '사자의 길'이었다.

나는 건축이 사람을 바꾼다고 주장해 왔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도시와 사회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어 도시가 만들어진 이념대로 그 사회가 이루어진다. 전제적 도시에서는 전제적 사회가 만들어지고 민주적 구조를 가진 도시에서는 민주사회가, 문화적 도시에서는 문화의 사회가 만들어질 것이다.

테오티우아칸의 도시는 강력한 제정일체의 도시였다. 강렬한 축선 위에 놓인 '사자의 길'은 도시의 공간이 아니라 이들이 가진 가치 자체였다. 그 가치는 직선으로 뻗은 경직된 가치며 모든 구성원은 그 가치를 구현하는 도구로서 존재할 뿐이다. 단일 가치를 가지는 도시, 그러한 도시는 광기의 도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들이 섬긴 신들 중에 시페토텍이라는 신에게는 젊은 여자를 제물로 바친다. 각지에서 온 순례자들과 그들의 부족이 참석한 가운데 길 양편에 쌓인 제단 위에는 횃불들이 오른다. 요란한 북소리가 긴장을 고조시키며 화려한 장식을 한 신관이 출현하고, 그 길을 따라 제물로 선택된 젊은 여자가 죽음에의 길을 떠난다.

결국 신관은 그 여자의 심장을 꺼내 신에게 바치고, 여자의 살갗을 벗겨 스스로 의복처럼 걸치며 제단을 맴돌면서 그들의 의식은 엑스터시에 다다른다.

나는 1995년 이 도시를 처음 방문했다. 그 때, 불같이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던 날 일행과 함께 이 '사자의 길'에 들어 선 순간 진공 상태를 경험하고 말았다. 생각했던 것 보다 더욱 처절하게 보이는 이 '사자의 길'을 걸으며 나는 외경스러운 나머지 그 더운 기후에도 몸이 떨림을 느꼈던 것이다.

*** 기독교에 의해 무참한 종말

이 도시의 문화는 그 후 중앙 아메리카 전역에 영향을 주면서 아즈텍과 마야, 그리고 잉카의 문명을 꽃피우게 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이들을 제물로 보내면서까지 그 피의 대가로 누리던 그들의 평화는 다른 종교에 의해 처참하게 부서지고 만다.

16세기 초, 멕시코 고원 속의 찬란한 문명국 아즈텍은 코르테스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에 의해 무참히 살육.유린되고 말았다. 아즈텍인들이 가졌던 신앙은 기독교도들에게는 야만이었고 사탄의 작용이었을 뿐이며 공유할 수 없는 가치였던 까닭이다. 사실은 아즈텍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황금의 탈취가 더 큰 이유였으나, 명분은 인류의 구원이었고 이교도의 교화였다. 결국 그들이 믿는 다른 종교의 도시를 세우기 위해 다시 엄청난 피를 요구한 것이다.

피의 대가로 세운 도시의 결말이었으니 그것은 또 다른 광기였다.

건축사사무소 '이로재' 대표

<사진 설명 전문>
‘달의 피라미드’에서 바라본 ‘사자의 길’. 직선으로 도시 전체를 꿰뚫는 이 길은 단일 가치만을 허용했던 이 도시의 경직된 분위기를 상징한다. 신에게 제물로 바쳐질 젊은 여자는 이 길을 걸어 갔으며 그 죽음의 의식을 지켜보던 시민들은 광기와 광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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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01.15 17:44 입력 / 2004.01.16 10:27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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霽月堂

"비 개인 하늘의 상쾌한 달" 라는 감각적인 이름을 가진 제월당은 소쇄원의 내당이다.

광풍각이란 누각과 쌍으로 조선시대 집의 철학을 잘 내포하고 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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