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도시 뒤덮은 상업주의 '살풍경'

나치가 유태인과 관련된 책들을 불태운 사건을 상징한 베벨광장의 기념물. 텅 빈 하양 서가가 지성의 학살을 침묵으로 전한다.

통일 독일의 상징인 베를린 포츠담 광장에 세워진 상업주의 물씬한 소니센터플라자. 자본은 역사의 도시를 붕괴시켰다.

난 베를린에 가방을 하나 두고 왔어
그래서 곧 그리 가야 해
지난날 행복은
모두 그 가방 속에 있는 거야

파리 마들렌 거리도 눈부시게 아름답고
5월의 로마 시내를 걷는 것도 아름답지
여름 밤 빈에서 혼자 마시는 와인도 좋지만
그대들이 웃을 때
난 오늘도 베를린을 생각해
베를린에 가방을 하나 두고 왔기 때문이야
마를레네 디트리히의 노래 '베를린의 가방'.

베를린 출신이면서 나치를 피해 할리우드에 간 후 미국 병사를 위해 노래 불렀던 세기적 여배우 마를레네 디트리히, 그녀가 종전 후 그토록 그리던 고향에 돌아왔으나 상처 받은 베를린 시민들은 조국을 등졌던 그녀에게 할리우드로 돌아갈 것을 요구한다.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그녀였지만 이렇게 노래하도록 진정한 고향이었던 베를린은 1992년 그녀가 파리에서 죽자 그 주검을 옮겨와 장례를 치르고 그녀의 어머니 곁에 묻어 주었다.

이 일은 베를린 시민들이 가진 회한과 슬픈 애정의 일단을 확인하게 하는 일이었다. 그녀의 땅 베를린, 이 도시는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들이 즐비한 유럽에서는 대단히 젊은 도시다. 1237년에야 역사에 나타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젊다라는 것은 그런 연대보다는 이 도시가 내뿜고 있는 에너지 때문인데, 그 에너지는 신생도시에서 흔히 보이는 저돌적이거나 모험적인 게 아니라 깊은 성찰과 오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어서 몹시 무겁다.

*** 나치와 냉전을 기억하던 광장


 베를린에 관한 어느 책 첫머리를 보면 이 도시를 가리켜 명상과 대화, 교환의 메트로폴리스라고 했다. 명상의 도시 베를린. 그렇다. 이 도시에 가면 어디에서도 우리 인류에 대한 존엄을 성찰하게 하는 풍경을 보게 된다. 그냥 철학적이거나 관념적인 명상이 아니라 실존했던 역사를 반드시 기억하고 그를 우리의 현실 속에 다시 되살리는 것이다.

베를린을 가로 지르는 중심도로인 운터덴린덴에 '노이에바헤'라는 고전주의 형식의 석조 건축이 하나 있다. 독일 근세건축의 거장인 칼 프리드리히 싱켈이 지은 이 단아한 건축은, 죽은 병사를 안고 있는 어머니 조각이 있는 지극히 경건하고 검박한 내부 공간을 가지고 있어 모든 방문자들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애초에 왕의 경비초소로 쓰였지만 쓰린 역사를 가진 베를린은 이를 '전쟁과 폭정의 희생'을 기념하는 건축으로 만들어 이 도시가 가진 침묵의 의미를 일깨우고 있다.

건너편에 있는 베벨광장에는 나치가 유대인과 관련된 책들을 불태우게 한 사건을 기억하게 하는 기념물이 있다. 그냥 비워져 있는 넓은 광장 가운데 1m 남짓한 크기의 유리덮개가 있고, 그 속에 밝은 지하 공간이 있는데, 비워진 백색의 서가만 있어 지성의 학살을 침묵으로 전하고 있다. 바로 그 앞 바닥에는 동판 위에 쓰여진 시인 하이네의 글이 있다. ' 책을 불사르는 것은 오직 시작일 뿐이다. 그는 결국 인류도 태우게 된다'.

인근에는 유대인 교회당 폐허 그대로를 기념 공원으로 만들어 놓았고 홀로코스트 기념관들이 즐비하며, 베를린 장벽이 있던 곳에는 공산주의의 폭정에 희생된 이들을 위한 기념물 등 시내 곳곳에 과거의 상처를 기리는 건축과 장소가 부지기수지만 지금도 또 새롭게 만들고 있다. 그야말로 성찰하는 도시요, 존재의 근본을 묻는 모습을 다듬고 다듬는 도시가 베를린이다.

익명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공동체인 도시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진다. 문화를 목적으로 하면 문화도시가 되고 경제가 목적이면 상업도시며 권력에 봉사하면 봉건도시가 되고 편향된 사상을 상징하게 되면 이념도시인데, 그에 따라 우리 삶의 형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 중에서 우리를 가장 피폐화시키는 게 이념도시이다. 이런 도시에서는 인간을 도구화시키기 때문이다.

알베르트 슈페르라는 건축가가 있었다. 히틀러가 총애한 이 사람은 나치제국의 2인자적 지위를 누린 파시즘 건축가였다. 히틀러와 나치제국의 영화를 과장하기 위한 도시와 건축을 짓는 일에 몰두한 그의 건축 정신을 지배하는 것은 오로지 파쇼에 대한 광신이었으며, 그런 건축은 극도로 인간을 왜소하게 하고 마비시키며 파멸케 하는 힘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히틀러가 '세계의 수도'라는 이름으로 1938년에 이 왜곡된 건축가를 시켜 베를린에 세우기 시작한 '게르마니아'가 바로 그런 도시의 전형이었다. 오랜 역사의 문화적 흔적들을 깡그리 지우며 무려 7km에 달하는 직선도로를 내고 그 도로의 끝에 300m가 넘는 돔의 국민대회당(Grosse Halle)을 그렸던 도시, 비뚤어진 민족주의 이념에 사로잡힌 슈페르와 히틀러의 광신적 신전을 위한 이 허망한 도시는 제2차 세계대전의 종언과 함께 전대미문의 폐허가 되고 말았다.

참상을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제일 먼저 세운 도시는 문화도시였다. 무너진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다시 세우고 베를린 미술관 신관과 국립도서관을 연이어 문화포럼이라는 이름으로 켐퍼광장에 지으면서 베를린은 다시 중요한 문화적 생산기지가 된다. 이 광장 옆에는 베를린 장벽이 지나가는 포츠담광장이 있어 동베를린에 대해 민주주의의 우위를 선전하기에도 제격이었다. 이 포츠담 광장은 제2차 세계대전 전까지 유럽의 중심으로도 불릴 만큼 베를린의 문화적 중심지였으나 폐허가 된 이곳에 장벽까지 서게 되면서 이 장소는 20세기 이념 대립의 중요한 상징이 된 것이다.

그러다 89년 11월 9일, 근 반세기의 갈등 속에서 온갖 비극적 현대사를 기록하던 이 장벽이 무너졌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으며 온 세계가 충격과 환호로 뒤엉킨 날이었다. 그러나 그날 저녁, 놀랍게도 다임러 벤츠와 소니는 연합하여 이 포츠담광장지역 15만평을 재개발하는 어마어마한 계획을 발표했다. 필시 저 거대 재벌은 이 역사적인 사건을 미리 알고 있었던 듯하다.

*** 현란한 빌딩 사이로 잊혀져

그 이후 그들의 말대로 이를 위해 국제 설계경기가 비상한 관심 속에 진행되었고, 논란 끝에 상업주의 냄새가 물씬 나는 안이 채택돼 실현된다. 막대한 자본으로 호화 빌딩들로 채워진 현란한 도시를 세운 것이다. 자본주의의 승리였으며, 화려한 네온사인이 과거의 비극을 씻는 새로운 도시라고 믿었을 게다.

그러나 베를린 장벽의 흔적을 완벽히 지우고 나타난 이 도시는 기괴할 정도로 큰 둥근 천장을 만들어 온갖 괴성과 어지러운 부호로 가득 채운 후 인근 문화로 세운 도시를 위협했다. 베를린 장벽 붕괴 10주년에 맞추어 이 도시가 완공되고 있을 때 런던에서 발간된 '빌딩 디자인'이라는 건축신문에 이 도시를 비판하는 글이 실렸다. 글 제목은 '자본이 붕괴시킨 역사의 도시' 다. 장구한 세월 동안 쌓여 온 역사의 흔적을 지운 뒤 천박하게 분칠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건축 지성의 학살이라고까지 했다.

2003년 독일영화제의 각종 상을 휩쓴 '굿바이 레닌'이라는 영화 속에 그려진 베를린의 모습이 있다. 베를린 장벽이 제거되는 동안 의식불명에 빠졌던 어머니의 건강을 위해 아들 알렉스는 현실과 반대되는 상황을 만들어 열성 공산당원이었던 어머니가 꿈꾸는 세상이 현실이 되었음을 거짓으로 알린다. 수많은 이들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 동 베를린 쪽으로 오는 조작된 방송 화면을 보이며 낭독되는 성명서는 이런 내용이었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고통 받던 이들은 새로운 꿈에 부풀었습니다. 출세와 향락만이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는 아닙니다. 물질보다 더 값진 것-선의와 노동, 그리고 새로운 삶에 대한 희망입니다…'.

이 영화의 감독 볼프강 벡커는 포츠담광장 위에 세워진 이 분별없는 도시를 경멸하였을 것이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던 베를린 시민들에게 나타난 이 허무한 향락의 도시를 그들은 기억해야 했으므로 이 영화는 그 기념비였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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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순한 유리공간이 진실을 일깨우다

▶ 땅에서 솟은 수평면과 하늘에 떠 있는 수평면, 두 수평면 사이에서 어떠한 기능도 수용할 수 있게 만들어진 투명한 공간을 건축가는 ‘보편적 공간’(유니버설 스페이스.universal space)이라고 불렀다.

▶ 베를린 필하모니 홀이 유리창에 반사돼 외부 풍경과 내부 풍경은 아름답게 겹쳐진다.

건축이 창조적 산물이라고 하지만 이 땅에 있는 대부분의 건물은 다른 것을 본받아 답습하고 있을 뿐인 아류이다. 그러나 그런 아류들을 추적하다 보면 반드시 한 시대를 결정 짓는 건축과 만나게 되는데 이를 원형적 건축이라 부른다. 이 건축 원형은 아무리 시대가 흘러도 우리에게 짙은 감동을 주게 되어 있다. 그 원형질을 만든 건축가의 싱싱한 생명이 그 건축 속에 무서운 에너지를 내뿜으며 고스란히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난 세기 건축의 원형은 무엇일까. 나는 주저함 없이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1886~1966)가 만든 20세기 최대의 혁명적 건축,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을 그 예로 든다.

나치의 광기가 남긴 상처를 딛고 일어선 베를린 시민들이 폐허 위에 먼저 세우기를 원한 것은 무너진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이었다고 한다. 그들의 자부심이었으며 그들 도시의 문화적 상징인 베를린 필의 음악이 그들의 회한을 위로할 유효한 치유제였던 것이다. 그들은 나치가 세우려 한 도시의 중심축이었던 티어가르텐 지구 남쪽에 있는 켐퍼 광장을 택해 새로운 음악당을 세우기로 결정한다. 이곳은 전후 또 다른 이념 분쟁으로 동과 서를 가른 베를린 장벽이 있는 포츠담 광장에 이웃한 곳이었다.

베를린 필 하모니 홀의 건축가 한스 샤로운은 베를린을 다시 문화의 도시로 환원시켜야 할 당위를 내세우며 '문화 포럼'을 이곳에 세울 것을 주장했는데, 이는 공산주의가 지배하는 동베를린에 대한 체제 우월성을 선전하고 싶어하는 서베를린 당국을 대단히 매료시키는 제안이었다. 


 이 건축이 완공된 후 문화적 성취에 고무된 당국은 국립미술관 신관을 계속해서 짓기로 하고 베를린을 24년 동안 떠나 있었던 세계적 거장 미스를 건축가로 초빙해 문화도시의 완성을 그리게 한다.

새로운 시대, 새로운 삶을 꿈꾸며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를 만들어 근대건축의 일대전기를 마련했던 미스 판 데어 로에, 1962년 당시 76세의 이 노장에게 베를린은 잊을 수 없는 건축의 고향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바우하우스의 교장까지 하면서 새로운 건축이념인 '기술'에 대한 이념을 세웠으나 결실을 보기 전 나치 정권의 반문화적 행태에 의해 좌절되고 떠나야 했던 곳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신념은 미국에서 만개했다. 기술이 건축의 일개 수단이 아니라 20세기 세계 자체였던 그에게, 38년 이민지로 택한 철과 유리의 도시 시카고는 약속의 땅이었으니 그는 거기서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마침내 20세기 거장의 반열에 오른 것이다. 그가 오랜 건축 세월을 정리할 즈음에, 결코 잊지 못하는 땅 베를린에 세워질 이 미술관의 설계 의뢰는 그야말로 그의 건축의 정수를 집중할 마지막 기회였으며, 어쩌면 이 순간을 위해 그의 지나간 모든 역정이 있었다고 여겼을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유작이 된 이 베를린 국립미술관 신관에서 그가 이룩한 성취는 놀라운 것이었다. 그는 이 미술관을 상설전시와 기획전시 두 부분으로 나누면서 상설전시는 포디엄이라 칭한 기단부에 두고, 그 위에 8개의 가느다란 철제 기둥으로 지지되는 64.8m 크기의 정방형 지붕을 띄운 후 그 속에 투명한 공간을 만들어 기획 전시 기능을 수행하도록 했다. 따라서 이 건축은 마치 두 개의 수평면으로 이뤄진 것처럼 보인다. 하나는 땅에서 솟은 수평면이며, 다른 하나는 하늘에 떠 있는 수평면이다. 이 두 면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비어 있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거나 불과 8개의 가느다란 외부기둥 혹은 기둥 없이 뻗은18m 길이 지붕의 기술적 성취에 대한 놀라움이 아니라 두 수평면 사이에 창조된 투명한 공간이다. 이곳은 기획전시를 위한 공간이라고는 하나, 딱히 어떤 기능이 주어져 있지 않다. 어떠한 기능도 다 수용할 수 있으며 모든 기능을 또한 만들 수 있는 그런 공간, 그는 이를 유니버설 스페이스(universal Space)라 불렀다. 보편적 공간이라고 번역함직한 이 공간 개념은 21세기 건축에서도 가장 중요한 화두다.

과거의 건축에서 벽체는 두 가지 목적으로 쓰였다. 하나는 지붕을 지지하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방을 구획하는 것이다. 지붕을 띄울 수 있는 통찰적 기술을 가진 미스에게 벽은 완전히 자유로운 장치일 뿐이었다. 따라서 이 미스의 건축은 과거 중력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건축, 그래서 둔중하고 불투명할 수밖에 없는 건축, 즉 내부와 외부가 서로 만날 수 없는 건축과 모든 면에서 다른 건축이다. 그것은 테제(These, 正)와 안티 테제(Antithese, 反)의 문제였으니 구시대와 새로운 시대를 가르는 혁명이었던 것이다.

이 미술관을 방문한 날은 겨울날 진눈깨비가 막 그친 오후였다. 인근의 베를린 필 하모니 홀과 국립도서관의 아름다운 실루엣이 이곳으로 접근하던 나를 즐거운 기분으로 만드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나 미스의 검은 지붕이 내 시야에 나타난 순간 나는 거의 호흡을 정지해야 했다.

엄청난 긴장이 엄습한 것이다. 건축의 원형을 조우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가지게 되는 긴장이었다. 특히 이 미술관의 주변 포츠담 광장은, 통독 이후 막강한 서양 자본이 물밀듯 들어와 온갖 현란한 형식의 상업주의 건물로 또 다른 장벽을 쌓아 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나 가장 단순한 형태를 가진 이 미술관은 30여 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에도 장엄한 기품으로 그 주변을 압도하고 있다. 마치 20세기의 파르테논을 보는 듯했으며 결단코 무너지지 않는 건축의 본질적 모습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포디엄에 올랐다. 지면으로부터 불과 90㎝ 정도의 높지 않은 기단이지만, 수평면에 다다른 순간 이미 주변의 도시로부터 구별된 공간 속에 있음을 느끼게 된다. 심리적으로 일상의 생활에서 탈피한 듯하고 어쩌면 폐허로 남은 아크로폴리스의 고요함에 도달한 듯했다. 도시는 이미 저 멀리 아래에 있고 나는 광활한 평원 위에 떠 있는 검은 철제 지붕 속으로 흡입되고 있었던 것이다.

검은 지붕 아래 내부를 둘러 싼 16㎜ 두께의 투명유리는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가 아니었다. 그 유리는 주변의 풍경을 투명한 유리상자 안으로 전달하는 매개적 장치였으며, 그 장치 위에는 방금 갠 하늘의 구름이 반사해 내부와 외부의 경계를 더욱 모호하게 하였고 끊임없이 내외부를 교류시키고 투영하며 반사한다. 이 신비의 건축은 도시 속에 서서히 녹아들고 있는 것이다.

유리문을 밀고 내부로 들어가면 주변의 도시 풍경은 이 투명한 공간을 둘러싼 벽이 된다. 내부의 공간은 시시때때로 변하는 하늘 풍경에 의해 유쾌하게 되기도 하고 우울해지기도 하며 때로는 침묵을 가져다 준다. 폐쇄되어 고정된, 그래서 목적이 없어지면 공간마저 없어지는 그런 구시대의 건축과는 확연히 반대 입장에 있는, 항상 살아 있는 공간인 것이다.

미스의 전기작가 프리츠 노이마이어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 혹은 미디어의 관심을 끌기에 혈안이 되어 유행병처럼 부질없는 사기 행각의 건축으로 가득 채워지고 있을 때 미스가 만든 이 건축은 시적 진실함과 구조적 정직함에 대한 깊은 열망을 많은 사람에게 일깨우는 참으로 신선한 자극제다."

90세가 된 노장은 20세기 최고의 혁명적 건축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69년 영면하고 만다. 그러나 그는 이 투명한 건축 속에 진실의 언어를 가득 담아, 참을 수 없는 가벼운 삶을 사는 우리에게 혁명할 것을 외치고 있으니 경외롭고 경외롭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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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분 아닌 삶의 집…건축혁명 시작되다

▶ 하늘에서 내려다본 바이센호프 주거단지는 불필요한 공간과 장식을 과감하게 없애고 흰색으로 마감한 덕에 깔끔하고 단순하고 투명하다(그림은 전체배치도).

▶ 르 코르뷔제가 설계한 공동주택은 여성들을 위한 편리한 동선 정리로 삶의 도구가 되었다.

요즘 내가 목격하는 주거에 대한 우리의 태도는 도가 지나쳐도 한참을 지나쳐 있다. 주거라는 문제가 우리의 삶의 문제에서 떠나 부동산의 처지로 전락한 지는 오래되었지만 이제는 재산 증식의 차원을 넘어 로또 같은 투전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우리의 존재함이란 거주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즉 주거 자체가 우리 자신이라는 말인데 우리 자신을 매매나 요행의 가치로 취급하고 있으니 지속되지 못하는 우리의 삶에 문화가 생겨날 리 없고 건강한 공동체가 형성되기 어렵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점점 더 소모적이고 투쟁적이 되어가는 것일 게다.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남동쪽으로 150km 정도 떨어진 곳에 로텐부르크라는 작은 도시가 있다. 1999년 파주에 출판도시를 꿈꾸는 출판인들이 본격적인 건설을 앞두고 유럽의 도시와 건축을 기행하면서 들른 도시다. 나는 이 파주 출판도시의 건축설계를 조정하고 지휘하는 코디네이터로서 이 기행을 기획하였지만, 몇몇 장소는 출판인 스스로 정보를 얻어 가보기를 원한 곳이 있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로텐부르크였고 열흘 일정 중 첫 기착지였다.

아름다운 풍경이 전개되어 '로만틱 가도'라는 이름이 붙은 길에 면한 로텐부르크는 12세기에 황제의 도시로 지정되면서 남부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지로 발달하여 현재에도 그 옛 모습이 고스란히 간직되어 있는 천년 고도다. 앙증맞은 첨탑들과 경사진 지붕의 아기자기한 집들, 붉은 돌과 벽돌로 통일된 듯한 이 작은 도시는 그야말로 예쁜 풍경을 갖고 있었다. 아마도 그 기행에 참가한 출판인들 모두가 마음 속에 이런 풍경의 도시를 그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 도시를 보며 그들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다.

그러나 나는, 동행한 몇 건축가들과 이 마을을 거닐면서 그 다음날 방문하게 되어있는 슈투트가르트의 한 작은 주거지역을 걱정하고 있었다. 로텐부르크를 좋아하는 이들이 백색 슬라브 집들로 된 주거단지에 호감을 가질 리 만무한 것이다. 


 슈투트가르트의 북쪽 언덕에 1920년대 후반에 건설된 바이센호프 주거단지(Weissenhofsiedlung)라는 곳에서 발생한 혁명을 상기하는 일이 새로운 도시를 꿈꾸는 출판인들에게는 더없이 좋은 현장이라고 여겨서 인도하는 길이었다.

유럽의 20세기 초는 소위 건설의 시대다. 자유와 풍요를 찾아 도시로 밀려오는 인구를 수용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도시와 건축이 만들어지고 있던 때였으나, 새로운 기회를 통해 신흥부자가 된 이들 대부분은 과거 귀족들의 삶을 꿈꾸고 있었다. 여전히 경사진 지붕에 온갖 장식이 달린 집, 이미 시대는 봉건질서가 무너지고 가족 형태도 바뀌고 있었지만 그들이 추구했던 것은 과거에 대한 허영이어서 시대는 바야흐로 퇴행적 위기에 직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시대를 직감한 지식인들은 서로를 격려하고 논쟁하며 새로운 가치를 찾고 있었으니, 예술과 산업의 합치를 이루려 건축가와 예술가들이 모여 만든 독일공작연맹(Deutcher Werkbund in Berlin)도 그 시대정신을 구현하기 위한 모임이었다.

이 모임의 핵심이던 루드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1886~1969)는 슈투트가르트 시당국으로부터 바이센호프 지역에 주거단지 설계의 책임을 요청받으면서 현대건축사에 일대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3000평 남짓한 경사진 부지에 결과적으로 33동의 주거건축이 세워졌을 뿐이지만 이 건축은 세계 건축계의 논쟁의 중심에 서서 많은 아류를 곳곳에 생산해내고 국제주의 형식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만들어 세계 건축을 변하게 했을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바꾸는 데 혁혁한 공을 세우게 된 사건이었다.

1920년 중반 사회문제의 안정을 위해 힘을 쓰던 중앙정부의 강력한 지원을 얻은 슈투트가르트 시당국은 전략적 차원에서 그 당시 공작연맹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 미스에게 이 일의 전권을 맡기지만 시대의 전환에 선 그는 새로운 가치를 구현하기 위해 험난한 과정을 겪어야 했다. 미스는 전체 마스터 플랜을 세우고 난 후 개별 건축설계를 진행하기 위해 젊은 건축가들을 유럽전역에서 불러 모으는데, 더러는 약관의 나이이고 생소하기도 하여 보수적 건축계나 공무원으로부터 끈질긴 반대와 냉소에 부닥쳤으나 그는 비난을 무릅쓰고 이를 관철시킨다. 새로운 건축을 위해서는 새로운 시대에 대한 확신을 가진 건축가가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르 코르뷔제를 비롯하여 바우하우스의 교장이 된 발터 그로피우스, 베를린 필하모니 홀을 설계한 한스 샤로운 등 초빙된 16명의 건축가들은 대부분 30대 40대였지만 이들은 이 일 이후 20세기 불멸의 건축가가 되었다. 이들은 27년 6월 23일 '주거(Wohnung)'라는 제목으로 전시회를 개최하는데 그 전시회의 포스터가 이들이 역사에 대해 취한 태도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포스터에는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옛 집이 그려져 있고 그 위를 강렬한 가위표로 뭉개었으니 이는 과거의 시대와 결별한다는 표시였다.

실제로 그들이 그린 주거는 종래의 주택과는 판이하였다. 지붕은 모두 평지붕이었고 집들은 거의 백색으로 마감되어 전통적 풍경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기성 건축계는 이 주거단지를 마치 예루살렘 교외의 한 마을 같다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이 새로운 주거형식은 미래 여성의 역할에 관심을 가지고 가사노동 시간을 줄이기 위해 기능적으로 방들을 배치하였고 짧은 동선을 만들어 효율의 가치를 극대화하였으며 주택 내부에 일광을 밝게 끌어들이고 환기와 위생에 각별한 관심을 가졌다. 건설비용과 관리비용을 줄이기 위해 불필요한 공간과 장치를 모두 없앴으며 장식을 철저히 배제하여 거주하는 사람의 움직임이 돋보이게 되었다. 집은 이제 신분의 상징이 아니라 삶의 도구였다.

코르뷔제는 다섯 가지 현대건축의 원칙을 여기서 세웠고 미스는 표준화를 통해 주택의 대량생산방식을 이룩하였으며 주거는 투명해지고 테라스주택 같은 새로운 유형이 만들어졌다. 모든 건축가들이 새로운 선언을 하고 나타났으니 이는, 로텐부르크 같은 도시를 생각할 때, 혁명이었다. 전시회의 개막식에서 미스 반 데어 로에는 단연코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리는 여기서 집을 설계한 것이 아닙니다. 새로운 삶을 설계하였습니다."

건축이란 무엇인가. 한마디로 하면 우리의 삶을 조직하는 것이 건축이다. 집의 모양에 관심을 갖는 것은 건축을 일개 조형물로 보는 잘못된 관점이다. 건축은 공간에서 그 본질적인 힘을 얻는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것은 공간이며 그 공간의 법칙은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결국 우리를 변화하게 한다. 그래서 부부가 함께 오래 살면 닮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주거는 우리의 삶 자체이다.

로텐부르크를 출발한 우리 일행은 바이센호프까지 마침 긴 시간의 버스여정이 있었다. 나는 슈투트가르트에서 일어난 이 혁명을 있는 힘을 다해 설명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게 된 아파트며 슬라브 집이며 상자곽 집을 왜 보러 오게 했는지 비난받을 게 틀림없었다.

나의 설명이 끝나고 버스가 현장에 도착하여 우리들을 내려 놓았을 때 로텐부르크의 과거에서 떠들썩하던 것과는 달리 일행 모두 진지하게 된 것을 보았다. 오늘날 우리의 삶의 모습을 갖게 한 그 역사적 현장에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있는 듯하였으니 건축의 진실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이었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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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거장이 만든 폭 440m 광장
그가 꿈꾸던 세상은 무엇이었나



▶ 의사당을 바라보고 있는 광장(上)은 폭 440m에 달하는 엄청한 크기와 방대한 규모로 시대를 뛰어넘는 인도의 정신적 자유를 상징한다. 통상적인 건축의 문법틀에서 벗어난 새도시를 그린 르 코르뷔제의 찬디가르 행정구역 배치도(下).

요즘은 업무 때문에도 다른 나라의 도시들을 자주 기웃거리고 있지만 오래 전부터 나는 건축학습을 이유로 곧잘 여행길에 올랐다. 좋은 건축을 익히는 일은 도면이나 사진을 통해 할 수 있긴 하되, 현장을 떠나 있는 한 상상 속의 재현일 뿐이다. 한 장소에 고정되어 그 속에서 삶을 만드는 것에 목적이 있는 건축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현장에 가서 진실을 마주하여 지니고 있던 환상을 깨는 일밖에 없다. 바로 이 장소성(場所性)이 건축을 이해하는 핵심적 요소라는 명분으로 나는 여행을 즐긴다.

여행을 많이 했으니 가장 인상 깊은 도시가 어딘가를 가끔 질문받는데, 기대하는 답은 아마도 역사가 오랜 유럽의 어느 아름다운 마을이거나 엄청난 건축이 있는 도시겠지만, 내 답변은 그 기대와 달리 인도에 있는 바라나시다.

그러니까 10년 전이었다. 당시 나는 '4.3그룹'이라는 건축조직의 일원이었다. 이 그룹은 한국 건축의 담론 형성을 목표로 의기투합한 젊은 건축가들이 모여 만든 조직으로, 치열한 논쟁과 전시 등을 통해 우리 건축계에 작지 않은 자극을 준 바 있다.

매년 테마를 정하여 해외 건축답사를 가곤 했는데 1994년에는 인도를 택하였다. 인도라는 나라 자체가 가진 매력 때문이었지만 건축하는 우리에게는 20세기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가 설계한 찬디가르 신도시에 대한 관심이 인도행을 부채질한 것이다. 기행을 떠나기 전 수 차례의 세미나와 많은 자료들을 섭렵한 후 모두들 많은 지식을 공유하게 되었으나 나의 관심은 유독 바라나시에 가 있었다.

 
바라나시는 인도에서도 가장 성스러운 도시라고 적혀 있었다. 그 도시에는 인도인들이 평생 걸려 죄를 씻으러 오는 갠지스 강이 흐르는데 그 강가에는 우리의 일상과는 전혀 다른 풍경이 전개된다. 가트라는 이름의 축대 위에 쌓인 나무더미와 함께 불타는 시신들, 킁킁거리는 개들과 그 옆에 한가로운 소들, 강물 위에는 타다 남은 재가 쓸려 가고 그 아래는 수많은 이들이 계단을 타고 강으로 들어가 몸을 씻거나 그 강의 물을 마신다. 더러는 이 강에서 빨래도 하고 장사도 하며 구걸도 하고, 남의 운명을 전하기도 한다. 어떤 이는 계단에서 강을 바라보고 정좌하여 끝없는 명상에 빠지기도 하고, 혹은 그러한 모습으로 죽음을 기다린다.

모래언덕 너머로 붉은 태양이 떠오르면 이 도시를 다스리는 파괴의 여신 시바가 자애를 베풀듯, 강가의 풍경은 붉게 물들고 계단에는 또다시 연기가 피어 오른다.

쇼크였다. 이미 책에서 보았음에도 그랬다. 책 속의 사진은 정지된 풍경이어서 그랬을까. 내 뇌리에 박제된 사진 속의 물체 하나 하나가 죄다 현실이라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삶과 죽음이 동시에 있었으며 부유와 빈곤이 다른 단어가 아니었다. 건강과 질병, 환희와 고통, 성과 속의 구분이 불가능하였으며 공간도 없고 그것을 꿰는 시간도 없는 그런 곳이었다.

우리 모두는 허무주의자가 되어 그들의 불가해한 행복을 망연자실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몇몇 동료 건축가는 바로 전날 답사한 코르뷔지에의 찬디가르 신도시를 몹시 비판하였다. 도무지 인도의 정신을 담아내지 못한 현대 도시일 뿐이라는 것이며, 코르뷔지에 자신의 건축언어만을 인도의 땅에 덧대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과연 그럴까.

'전쟁 여신의 성(城)'이라는 뜻의 찬디가르는 펀자브주의 수도이며 뉴델리에서 북쪽으로 약 260km 떨어진 곳에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했을 때, 펀자브 지방의 서쪽 지역을 파키스탄에 내주면서 그곳 주민들이 이주해옴에 따라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필요가 있었으며, 그 당시 새로운 가치를 구현할 필요가 있던 네루 총리에게 찬디가르 신도시 건설은 국가적 명제였다. 네루의 미국인 친구인 앨버트 마이어가 도시의 최초 윤곽을 그리고 코르뷔지에에게 최종적으로 위임되었다. 기록에 의하면 설계비가 하도 낮은 금액이어서 코르뷔지에는 망설였다고 한다. 그러나 새로운 도시에 대한 수많은 제안을 해왔지만 실현되지 않아 절치부심하던 그는 이 기회를 뿌리칠 수 없었다.

자신의 건축이념을 부각해 마이어의 설계를 보강한 최종 도면을 보면, 이 도시에는 강렬한 축이 있어 도시의 모든 조직이 이 축에 의해 시작된다. 도로는 7개의 등급으로 나뉘어 위계 질서를 가지고 있으며 모든 지역은 주거.상업.업무.행정.공원 등 용도별로 구분되어 있다. 이뿐 아니라 그는 인도가 속한 농경사회의 상징인 곡선은 배제하고 직교체계에 의거해 견고한 직각의 도시를 만들어 냈다. 사실 이는 근대산업도시에 대한 네루의 희망과 기계미학에 대한 코르뷔지에의 믿음의 결과였다.

이 도시의 머리에는 행정관서가 배치되어 있다. 중앙 광장의 양편에 의사당과 법원청사가 마주하고 있고 북쪽에는 주지사 관저가 계획되었다. 의사당 뒤편에는 주정부청사가 있는데 이 건축들에는 코르뷔지에 건축의 모든 것이 다 실현되어 있다. 빛은 그의 손을 빌려 황홀한 음악이 되어 건축의 내부에 침윤되고 공간은 마치 장대한 서사시처럼 전개된다. 콘크리트의 면은 때로는 거친 바위처럼, 때로는 부드러운 물결처럼 우리의 감성을 건드리며, 디테일과 색채는 공예요, 회화의 경지에 이르러 있다.

그러나 이 모든 성취가 코르뷔지에 건축의 완성일 뿐 인도의 특성이 없다는 이유로 그는 비판받았다. 나 자신도 책으로 이 도시를 공부했을 때 그런 의견에 동의하였다. 말년에 코르뷔지에가 보인 일에 대한 집착과 과욕을 상기하면 더욱 그랬다. 그러나 그 도시의 그 장소에 섰을 때, 그것은 단연코 오해며 잘못된 견해임을 나는 알게 된 것이다.

바로 의사당과 법원청사를 양편에 둔 폭 440m 광장의 한 복판에서였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였으니, 그가 곧잘 인용했던 아크로폴리스의 광장이나 근대 도시계획의 중심광장과는 비교할 수 없는 막대한 스케일이었다. 부재(不在)의 공간이며 왜곡된 소외의 광장이다. 도대체 말도 안 되는 이런 광장을 왜 이 도시의 가장 중심적 위치에 두었을까.

시대의 거장 코르뷔지에는 이미 그 시대의 중심사조이던 모더니즘을 뛰어 넘고 있었다. 어떤 규칙이나 범례도 따르지 않던 그는 생애 마지막에 어떤 이념에서도 자유로운 도시를 건설할 것을 꿈꾸고 있었을 것이다. 자유의 도시. 그는 그 근거를 인도의 풍경에서 찾게 된다. 그가 그린 수많은 인도의 태양과 토템의 스케치들이 이를 증명하며 아마도 바라나시의 수수께끼 같은 풍경이 그가 그린 이상 도시의 바탕이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는 통상적인 건축의 문법으로 이해할 수 없는 그 광대한 광장을 그렸을 것이다.

그렇다. 바라나시를 보고 난 후, 나는 코르뷔지에가 만든 그 부재의 광장을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다. 저 멀리 히말라야 산맥의 실루엣이 보이고 태양이 마구 내리쪼이는 이 황량한 들판에 그는 새로운 아크로폴리스를 세운 것이다. 찬디가르의 중심 광장 뒤편에는 그가 만든 '열린 손(Open Hand)'이라는 상징물이 있다. 이 조형물을 두고 그가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찬디가르에서 솟은 이 손은 평화와 화해의 표시다. 창조적 풍요함을 받으며 또한 이를 세계인에 건네는 이 손은 새로운 시대의 상징이다."

그런 그가 만든 이 찬디가르는 근대의 한갓 신도시가 아니라 역사를 초월한 의식에 바쳐진 태양의 도시며 인도의 땅에 새긴 신화였다.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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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식이 극도로 절제돼 있는 르 토로네 수도원의 회랑(큰 사진)과 중정(中庭). 노동과 독서·기도를 일상으로 삼는 수도사들의 정신이 녹아있다. 르 코르뷔제가 라 투레트 수도원을 지으며 바로 이 르 토로네에서 영감을 얻었다.


▶20세기의 대표적 건축가인 르 코르뷔제가 남긴 라 투레트 수도원.

지난 20세기 건축사에서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르 코르뷔제(Le Corbusier 1887-1965)를 내세우는 것에 대해 이의를 다는 이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20세기 초 세기말의 위기를 극복한 모더니즘의 정 중심에 섰던 그는 건축가라기 보다는 시대를 견인하던 예언적 지식인이요 전인적 예술가였다. 그가 떠난 지 40년이 지난 지금에도 도시와 건축에 대한 그의 이론은 현대의 신도시들이 만들어지는 기반이고 그의 이름은 건축학에서 여전히 중요한 화두이다.

그가 남긴 주옥 같은 건축 중에서 라 투레트(La Tourette) 수도원은 단연코 걸작 중의 걸작이다.

구릉의 땅에 세워진 콘크리트의 볼륨이 갖는 시적 언어와 본당의 텅 빈 공간에 충만한 침묵과 빛의 아름다움, 경사진 길과 리드미컬한 빛의 행렬, 검박하기 이를 데 없는 수도사의 방, 옥상의 경이로운 세계 등 이 건축은 코르뷔제의 지적 완성과 영적 충만 그 자체이며 모든 건축가들에게 현대건축의 성서적 존재다.

대학시절 그의 신자였던 나는 온갖 건축 치수를 다 외울 정도로 라 투레트 수도원을 학습하였으며 마음속에 그 공간을 자신있게 재현하곤 하였다. 나는 이 건축을 지금껏 다섯 번 순례하였는데 1999년의 두번째 방문에서 대단히 중요한 것을 알게 된다.

 그때는 1년 예정으로 런던에서 체류하고 있었다. 혼자 여행하다가 리옹에서 기차를 타고 이 수도원이 있는 아르브렐에 도착하였지만 그 역에서 산 위에 있는 수도원까지 갈 방법이 여의치 않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어떤 노신사가 내게 다가와서 수도원에 가느냐를 묻고는 자기 차에 동승할 것을 권하였다. 작은 행운이라 여기고 얼씨구나 하고 차에 올라타 보니 그는 라 투레트 수도원의 원장 앙투안 리옹(Antoine Lion)신부였다. 리옹 역에서부터 내 행동거지를 보고 수도원을 방문하는 건축가로 짐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그날 행운이 터지고 있었다. 예약하지 않은 숙소까지 마련해 주는 것은 물론 나와 코르뷔제에 대한 말문이 트인 직후 그는 일반에게 공개하지 않는 수도원 지하의 납골당과 옥상 정원까지 몸소 자물쇠를 열어가며 안내해 주는 것 아닌가. 그토록 오랫동안 직접 보기를 원했던 진기한 보물들을 만진 느낌-황홀함이었다.


그러나 더 큰 일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나와 식사를 마친 뒤 그의 서재에서 그가 권하는 칼바도스를 마시며 이 걸작과 거장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다가, 코르뷔제에게 설계를 맡겼던 그 당시 도미니크파 수도원장이던 쿠튀리에(Couturier)신부에 이야기가 미쳤다. 그 신부가 코르뷔제에게 가보기를 권한 르 토로네(Le Thoronet)수도원으로 우리 이야기는 이어졌고 리옹 원장은 57년에 출간된 책 한권을 꺼내 보여 주었다.

*** 20세기 건축 거장 코르뷔제

그 책은 '진실의 건축'이라는 이름이 붙은 르 토로네 수도원의 사진집이었다. 새롭게 짓는 수도원에 옛 수도원의 정신을 나타내 줄 것을 원한 쿠튀리에 신부의 요청을 따라 그 곳을 가 본 코르뷔제가 엄청난 감동을 받고 파리의 사진가에게 그 공간을 기록하게 한 책이었는데, 그 책에 실린 흑백의 사진을 조심스럽게 넘겨보면서 밀려오는 감동으로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책 속에 짙은 빛과 깊은 그림자가 재현한 그 수도원의 공간은 그야말로 침묵의 신비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책의 서문을 코르뷔제가 썼는데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 책의 사진들은 진실에 대한 증언이다.'……진실, 무엇에 대한 진실인가?

그 책을 만지작거리는 내 모습을 본 원장은 이미 절판된 그 책을 내게 줄 수 없어 미안하다고 했으나, 나는 그날 밤 그 수도원에 대한 상상으로 전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귀국한 이후 몇몇 건축가들에게 이 르 토로네 수도원을 같이 가 볼 것을 강권하여 2001년 비로소 처음 방문하게 된다.

수도원의 종류와 숫자는 신도 모른다는 유머가 있을 정도로 오늘날 그 분파는 수없이 많다. 서기 3세기 이집트의 수도원이 효시라고는 하나 수도회가 본격적 체제를 갖추게 된 것은 이탈리아의 수도사 베네딕트의 금욕적 가르침에 따라 규칙을 만들면서부터다. 그러나 수도원의 세력이 커지자 운영이 방만하게 되면서 일부 수도원은 사치에 빠진다. 이에 영성활동의 진정성을 찾는 수도사들을 중심으로 11세기 초 교회개혁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일어나 철저한 금욕적 생활을 기반으로 하는 시토(Citaux)회가 결성되게 된다.

베네딕트 규칙을 철저히 지킨 시토회의 수도사들은 재물과 육체와 정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육체노동과 경건한 독서, 기도와 찬송만을 그들의 일상으로 삼는다. 그러한 수도사들에게 수도원을 짓는 일은 그 속에서 행하는 명상과 관조와 같은 영성활동 그 자체였으며, 그들이 추구하는 신의 형상을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일이다. 따라서 수도원 건축은 수도사들의 신념이 그대로 구현된 작은 도시일 수밖에 없다.

르 토로네 수도원은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에 상수리나무가 울창한 계곡 속 물가를 부지로 삼아 1176년에 지어졌다. 전체가 동일한 수준의 건축기술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꺼번에 지어졌다고 추정되며 증축의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완벽하다.

본당의 출입은 정면 한가운데가 아니라 한 쪽에 있는 아주 소박한 문을 통해 이뤄진다. 가만히 몸을 숙이고 들어가 갑작스러운 어두움에 적응하기 위해 다소곳이 서 있으면, 아 지극히 아름다운 빛의 다발이 고요하게 공간을 밝히고 있다. 바닥.벽.기둥.천장 모두가 석재로 되어 있는데 그 감동적인 빛은 석재의 거친 표면을 긁기도 하고 모서리의 각을 선명히 드러내기도 하며 둥근 천장을 부드럽게 감싸기도 한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고요함이 그 위를 덮는다.

*** 르 토로네 보고 라 투레트 지어

석재의 쓰임은 지극히 검박하다. 장식도 극도로 절제되어 있으며 석재끼리의 맞춤도 대단히 정교하면서 단순하다. 어디 하나 모자람도 없고 더함도 없다.

본당 옆 벽의 작은 문을 통해 내다 보면 중정을 감싸고 도는 회랑이 있다. 아치형의 창틀을 통해 바닥의 돌판에 새겨진 빛과 그림자의 행렬이 우리를 극도로 긴장하게 한다. 수도사들은 여기를 돌며 거추장스러운 삶의 찌꺼기를 씻고 또 씻었을 게다. 그들은 여기서 세족례(洗足禮)를 거행하기도 하여 자기를 낮추며 돌들이 이야기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으리라.

이 회랑에 붙은 작은 방으로 들어가면 돌의 한 부분을 정교히 도려내어 흘러 들어오게 한 빛이 이 속세인의 가슴으로까지 들어오는 듯하다. 애잔하기 그지없는데, 어찌 감사하지 않으랴. 성서에 기록된 바처럼 마치 돌들이 일어나 찬양하는 듯한 것이다.

놀라운 것은 나에게 오랫동안 교과서가 된 라 투레트 수도원의 모든 근원이 여기에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경사진 통로, 음악처럼 흐르는 열주와 황홀한 빛, 그리고 긴장과 그 고요함까지 그 눈부신 창조가 이 르 토로네 수도원의 건축에서 비롯되었음을 알았을 때, 나는 르 코르뷔제를 오히려 더 좋아하게 되었다. 그 천재적 건축가가 취한 고전에 대한 경외와 진실에 대한 겸손이, 르 토로네를 그의 건축언어로 다시 기술하여 라 투레트를 만들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이 건축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하며 그 책의 서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빛과 그림자는 진실함과 고요함과 강인함의 이 건축을 크게 외치고 있다. 어떤 것도 더해질 수 없다. 이 미숙한 콘크리트의 시대에 처한 우리의 삶 속에서, 이 엄청난 조우를 기뻐하고 축복하며 반기자.'

승효상 <건축사무소 '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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