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 47. 해탈은 이미 우리 의식의 무대에서 춤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그것을 바로 지금 체험할 수 있을까요? 특별한 방법이있을까요? 실제로 많은 방법이 있습니다. 그중 하나는 다음과 같은오랜 가르침에 담겨 있습니다. "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에서 쉬어라."
이것은 효과적이고 역동적으로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방법입니다. ‘쉬다‘라는 말에는 많은 의미가 있는데, 여기서는 단지 일상적인의미로 쉰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소파에 앉아 탁자에 발을 올려놓고 편히 쉬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쉼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쉰다는 것은 마음이 애써 노력하는 모든 걸 중단하는 것입니다. 즉 무언가를 추구하고, 명상하고, 분석하고, 움켜잡으려고 애쓰는 일을 중단하는 것입니다. 무언가를 없애려 하지도 않고 이루려하지도 않는 것입니다. 단지 마음이 노력하는 걸 모두 놓아 버리고자연스러운 마음 상태에 머물면 됩니다. 그것이 무엇인지를 일일이다 알아야 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것은 희소식입니다.
p. 46. 해탈에 이를 수 있는 비밀의 열쇠는 더 이상 외부에서 찾아다니기를 그만두고 자연스런 마음 상태에서 쉬는 것입니다.
물론 무언가를 찾지 않을 때만 얻을 수 있다‘는 말이 혼란스럽게들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한 잔의 커피라도 나서서 구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는 게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난데없이 누군가 우리에게커피를 주지는 않을 테니 우리는 커피 한 잔을 마시려 해도 커피점까지 가서 돈을 지불하고 사야 합니다. 이렇듯 이성적인 머리로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찾고 노력하고 추구해야만 그것을 얻거나 실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해탈을 발견하기 위한 비밀의 열쇠는해탈을 구하지 않는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 이성적인 머리로는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운 게 당연합니다. 하지만 해탈은 우리가 만들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해탈을 구할 수 없습니다. 다만 상서로운 동시성(서로 상관없어 보이는 일들이 같은 때와 장소에서 일어나는 것)이 있을 때, 바른 받아들임이 있을 때, 그리고 우리의 의식이 올바른 관점일 때 해탈은 저절로 일어날 것입니다.
p. 72.
무언가 찾아다니기를 중단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깊이 탐구하는 것입니다. 깊은 탐구를 하면 찾아다니기를 그만 둘 수 있고 자유를 얻는 게 얼마나 쉬운지 명확히 알게 됩니다. 우리는 스스로 이렇게 물을 수 있습니다. "내게 괴로움이 필요한가? 나는 이미 충분히 고통받지 않았나?" 거의 모든 사람은 자신이 이미 충분히 고통받았다고 대답할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지금 도움이 되는 수행법이나 기술이 있다면 우리는 당장 괴로움을 멈추기를 원합니다.
괴로움을 멈추는 건 쉬운 일일까요? 쉽지는 않겠지만 사실 꽤 간단합니다. 괴로움을 쉽게 멈출 수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오래 전에 해탈에 이르렀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간단해서, 사람들이 해탈에 이르는 길을 알려달라고 했을 때 붓다는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습니다. 붓다는 단지 "그 길은 다르마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진리를 뜻하는 ‘다르마’라는 말의 본래 의미는 ‘길’입니다. 따라서 붓다는 ‘길은 길이다’라고 말한 것이므로 사실 아무 의미 없는 말을 한 셈입니다. 다르마는 신앙 체계나 기술이 아닙니다. 그것을 믿는 순간부터 틀림없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는 확실한 신앙체계가 아닙니다. 또 의사에게 처방전을 받듯이 누군가로부터 전해 받을 수 있는 기술도 아니고 마술 같은 만병통치약도 아닙니다. 어떤 수행의 처방전에 따라 몇 번이고 그대로 반복한다고해도 언젠가 우리의 의식이 확장되고 마음이 활짝 열리고 모든 것이 괜찮아지는 일은 일어날 수 없습니다. 다르마는 신앙 체계나 기술처럼 실체가 있는 게 아닙니다. 궁극적으로 다르마란 ‘부담을 내려 놓는 행위’라고 붓다는 말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이 길이라고 말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