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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등급 영화
김선향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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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울 회초리, 바깥 바람은 맵다. 


내 좁은 방엔 책상 대신 피아노가 한 대 놓여 있다. 방구석에서 혼자 잘 놀아보려고, 최근에 중고 피아노를 들여놓았다. 피아노포르테~ 건반 위로 모처럼 시집 한 권을 펼쳐본다. P로부터 F까지, 여리고 거친 감성의 손가락들이 걸어가는 시선이 악보다. 장르는 F등급 영화음악.


시인의 집에도 피아노가 있는 걸까? 시집 속의 여자는 그랜드피아노를 치지도 않으면서 악어처럼 콱 물고 있다. '끼니를 거르더라도 내다 팔 수는 없'는 피아노는 '그녀의 마지막 허영'이라고 한다. 아찔하다. 이건 명백한 피아노 학대다. 소리를 내지 못하는 악기는 서럽다. 꿈결에 그녀의 혼곤한 불행으로 빨려들까봐 두렵다.


나 역시 무서워서, 방 바깥으로 작은 소리도 차마 내보내지 못한다. 내벽은 몹시 얇고, 바깥 바람은 맵다. 방음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다. 원룸에서 헤드폰을 꽂은 채 오롯이 나만 듣는 전자피아노의 음색은 매정하게도 저렴한 축에 든다. 그래도 나는 이 자그마한 방에서 책상을 빼고 피아노를 둔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밤의 음계를 하나 둘 누를 때, 검붉은 줄무늬가 여러 갈래로 바스라진다. 밤이 으슥해지면 시인의 목소리도 여자들의 아우성으로, 보랏빛 귀곡성으로 변한다. 쿠마리 여신이 되어 세속의 무지개를 건넌다. 거미가 새된 손톱으로 실연의 바닥을 찍고 일어난다. 이윽고 선로에 오른 굴다리 여자는 ‘한밤처럼 줄어들고, 지렁이처럼 납작해’진다. 


이토록 혹독한 겨울날, 실비아 플라스가 죽었다. 바깥 바람은 여전히 차고 맵다. 바깥으로 소리를 내지 못하는 나의 피아노에게 그녀의 시를 가만히 읊조리듯 읽어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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