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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ㅣ 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1922년 프라하 늦은 저녁, K는 성 앞에 서 있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9쪽)” 프란츠 카프카의 [성]에 시간과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다가 만나는 낯섦, 삶의 부조리함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공간이 익명이기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을 바로 대입하기가 오히려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은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그것이다.
[성]이 쓰인 시대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실존의 부조리가 징후를 나타내던 때다.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란 신 없이 존재하는 죄다.([시지프 신화], 64~65쪽)” 카뮈는 신 없이 존재해야 하는, 주어진 운명에 구원을 호소하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험으로서 카프카의 [성]을 읽는다. “[성(城)]은 어쩌면 행동으로 보여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은총을 추구하는 한 영혼의 모험, 지상의 사물들에게서 장엄한 비밀을, 그리고 여인들에게서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신의 징후를 구하는 한 인간의 개인적 모험이다.(같은 책, 196쪽)”
K, 익명과 운명의 이름
[성]의 주인공은 K다. 소설의 다른 인물들은 카프카에게서 암시와 은유로 가득찬 이름을 부여 받았다. 예를 들어 클람의 마을 비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밤의 아들인 모무스(Momus), K의 조수는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아스(Jeremias)다. 그러나 K는 K일 뿐이고 다른 인물들에게서 ‘측량사’로 불릴 뿐, 이름으로 호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인 프리다의 잠꼬대에서나 K다. 가장 중요한 인물인 K와 가장 중요한 장소인 마을에 아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카프카의 세계에 선입견 없이 직면할 수 있다. K에게 붙는 ‘아무 것도 아닌 타지 사람’이라는 수식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현대인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그 감정이다. 올바르지 않은 시간에 태어나, 올바르지 않은 장소에서,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는 부조리, 거기서 기인하는 불안이 K와 다름없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이름 있는 것조차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이 관리는 클람과 몹시 비슷한데, 그가 자기 자신의 사무국, 자기 책상에 앉아 있고 문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면─난 이제 의심할 게 없겠지.(213쪽)” 우리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가리키는 그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은 우리의 개념을 한정시킨다. 성이 성이고, 마을이 마을이기에 우리는 모호한 상태로, 그러나 열린 상태로 소설을 읽어나가게 된다.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치하의 체코 프라하에서 살았다.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는 체코어 대신 독일어 교육을 시켰다.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며 살아가는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카프카만의 독특한 문학을 형성했다고 한다. 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작가의 작품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성]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떠오르게 한다. 고향을 잃고 방황하며, 소속된 공동체 없이 서로가 타인이기만한 현대에는 ‘디아스포라’가 유대 민족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된다.
작품의 제목은 [성]이지만 주인공 K는 성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다. 그가 머무르는 곳은 성이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다. K는 성의 영주인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고용한 측량사다. 면장을 만나 확인한 바, K의 고용은 A부서와 B부서 사이의 서류 처리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시정되지 않은 오류로 인해 K는 측량사로 불리긴 하나 측량사가 아닌 상태로 마을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게 된다.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약속된 직분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학교 소사도 하지 못하게 된 K는 마을에서 하녀들의 방에서 숨어 지낼 수도, 마부 게어슈태커의 말먹이꾼으로 살 수도 있다. [성]은 미완성인 소설이지만 완성작과 다를 바 없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폴 오스터는 카프카의 사망 15주년에 붙여 ‘카프카를 위한 페이지들’을 남겼다. “만일 그의 여행이 어떤 최종 목적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최종적으로, 그가 시작했던 그곳에서 그 자신을 발견함으로써일 것이다. (…) 약속된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한 팔만한 거리에, 한 삶만한 거리에 두고, 그리하여 도착에 가장 가까이 갈 때가 자신의 목적지로부터 가장 멀어질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한 걸음에서 다음 한 걸음까지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조차도 아니고, 그가 될 것의 그림자이다. 아니, 그 약속된 땅조차도 아니고, 그것의 그림자이다.([굶기의 예술] 30~31쪽)”
보이지 않는 신, 해체된 권력
카프카의 소설에서 ‘성’의 관리들이 가진 권력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이는 바르나바스네에게 들이닥친 불행이 명확히 보여준다. 아말리아가 조르티니의 청을 거절하고 그의 심부름꾼 앞에서 편지를 찢은 이후에 조르티니는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다. 처벌은 이웃으로부터 온다. 성의 명령을 거부한 아말리아의 가족들은 성(Family Name)으로 불리지 못하고 바르나바스네가 되었다. 일자리도 잃고 이웃의 왕래도 끊겼다. 성에 탄원을 내자 성의 답변은 명료하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 무엇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것이지? 언제 그리고 성의 누가 그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단 말인가?([성], 247쪽)” 성과 성의 권위를 대표하는 클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나 어디에나 있는 ‘빅브라더’와 같다. 그리고 성의 권력은 피감시자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파놉티콘으로 기능한다.
성처럼 견고했던 권력의 해체, 무용지물인 권력의 모습은 예고된 것이다. 면장은 K에게 관료제의 허점을 내비친다. “한 부서에서 이것을, 다른 부서는 저것을 처리하다 보니 다른 쪽에 대해선 모르며, 상부의 감독이 무척 꼼꼼하다고 하지만 본디 너무 늦게 오기 때문에 결국은 조그만 혼란이 생길 수 있어요.(75쪽)” 잘못 들어간 방에서 만난 비서 뷔르겔은 벅찬 업무 속에 가지게 되는 관리들의 약점인 불쑥 찾아온 밤의 민원인 이야기를 한다. K가 복도에 있다는 이유로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관리들은 민원인이 도달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이자 필요할 때는 사라지고 없는 무능한 권력의 대변자들이다.
[성]의 마을에 구원은 없다. 바르나바스네의 몰락에 대해 올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헤어 나올 힘이 없음을 알아채고 나자 이웃에게 멸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올가는 관리들이 드나드는 여관 ‘헤른호프’에서 하인들에게 몸을 팔면서라도 살아남고 정보를 모으려 했다. 권력은 마을 사람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이 해결을 요청할 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모든 자명한 사실들, 진리는 결실이 없다고 말한다. 카뮈에 따르면, 카프카의 작품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온갖 모순들 속에서 믿어야 할 이유를 끌어내고 자신의 풍요로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질 이유를 끌어내며 그 끔찍한 죽음의 수업을 삶이라고 부르면서 바로 그 인간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비통한 모습이 거기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K가 떠나지 못하는 마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다.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부조리와 직면해야 하는 우리는 또 다른 K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