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가족
공선옥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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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선옥의 [유랑가족]은 농촌 마을과 서울 변두리를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준다. [유랑가족]에는 '겨울의 정취', '가리봉 연가', '그들의 웃음소리', '남쪽 바다, 푸른 나라', '먼 바다'의 다섯 편이 묶여 있다. 각 편의 이야기가 연결이 되고 등장인물들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연작소설의 형식이다. 가난한 사람들의 고단하고 끔찍스러운 삶, 거기서 벗어나려는 악다구니와 몸부림을 그리고 있기에 이 소설의 모든 인물들이 욕망하는 것은 ''이다. ''은 유랑하는 가족이 모여살 수 있게 하는 어떤 것이기도 하다.


먼저 '먼 바다'의 등장인물들을 르네 지라르의 '욕망의 삼각형' 개념에 대입하여 살펴보았다. 전라도 금진에 사는 영녀는 박종만과 결혼하기 전에 희다방 '미스 조'로 통했다. 박종만이 사는 마을이 곧 수몰될 예정이어서 보상금이 나왔고, 그 보상금은 영녀가 읍내 다방에 진 빚을 갚는 데 쓰였다. 영녀가 종만과 결혼까지 한 것은 고마움이기보다는 남은 보상금으로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가 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남은 보상금은 농협 빚을 갚느라 사라졌다. 영녀는 술만 마시는 남편, 자신을 구박하는 시어머니, 그리고 좀체 말을 듣지 않는 동생뻘의 의붓아들 기찬에게서 탈출하고 싶다. 이런 상황에서 종만은 노덕필의 하우스를 빌려 국화 모종을 심기로 한다. 시설 작물에 대한 보상금을 노리고, 일이 잘 되면 자신과 덕필이 73으로 보상금을 나누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덕필은 종만의 아내 영녀에게 관심이 있고, 돈이 나오면 영녀와 도망을 할 생각이다.


박종만이 갖고 싶어 하는 것은 영녀를 만족시킬 수 있는 돈이다. 그 돈은 덕필을 잘 구슬려야 자신의 것이 될 수가 있다. 하우스를 임대해 주겠다는 덕필의 허락이 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조영녀가 욕망하는 것은 재밌는 삶을 살게 해줄 돈이다. 그녀에게 있어서 돈 없는 세상은 재미 없는 삶을 허락할 뿐이다. 처음에 그 중개자는 종만이었지만, 보상금을 빚 갚느라 날려버린 그는 더 이상 효용이 없다. 그녀에게 욕망의 중개자는 노덕필이 된다. 덕필도 돈이 있어야 자신이 욕망하는 대상인 영녀를 데리고 올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종만과 달리, 매개나 중개자 없이 보상금을 모을 수가 있다. 종만의 국화 모종을 통해 나올지 말지 모르는 보상금은 그에게는 있으면 좋고 없어도 괜찮은 것이다.


박종만의 욕망은 조영녀의 욕망보다 비극적이다. 중개자인 노덕필과 경쟁관계에 놓인 내면적 간접화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종만은 덕필과의 경쟁관계에서 실패했다. 덕필과 영녀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고, 덕필이 자신의 여자와 보상금을 가로챌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덕필에게 따지기보다는 아들과 어머니를 단속하여 영녀의 마음을 붙잡으려는 소극적 행동을 취할 뿐이다.


이 외에도 [유랑가족]의 각 단편에는 영녀처럼 도망치는 여자들의 이야기가 많다. 이야기의 중심 무대인 '신리'에서 달곤의 처이자 미정이 엄마였던 서용자도 그렇다. 서용자에게 서울로 가자고 한 '명화'는 중국 해림의 남편 용철에게서, 한국 신리의 남편 기석에게서 두 번 도망쳤다. 부대동에 사는 인숙도 종수 아빠를 피해 아들을 두고 나왔다. 이들에게는 사랑하는 남자와의 삶, 또는 자식과 함께 사는 삶이 욕망하는 대상이다. 그러한 삶에는 반드시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을 약속하는 사람들이 중개자로 자리한다.


'겨울의 정취''가리봉 연가'에 등장하는 명화는 오빠의 간암 치료비가 필요해 결혼을 택한 이주 여성이다. 처음에는 기석과 결혼하면 식구들도 한국으로 부를 수 있고 오빠의 병도 고칠 수가 있다고 믿었다. 명화는 그것이 자신의 착각이었음을 알자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흥미를 잃는다. 가족들을 불러들이고 멋쟁이로 사는 삶에 대한 욕망은 읍내 식당에서 만난 배 사장이라는 새로운 중개자를 찾는다.


명화를 따라 상경한 용자의 욕망은 애초에는 조금 불분명하다. 용자는 가리봉동 공장 시다를 하다가 고향에 돌아왔고 마을의 달곤에게 겁탈을 당해 그와 결혼을 하고 11년을 살았다. 달곤은 술을 마시면 폭력을 저지르는 남편이었고, 용자는 돈이 있으면 폭력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막연하게 돈이 있으면 좋겠다는 그녀의 생각은 명화를 만나면서 구체화된다. 새로운 삶이라는 대상의 중개자인 명화의 욕망을 용자의 욕망이 닮아간다. 얼굴 안 타고 "보얀하게 멋쟁이로 살"아가는 서울 여자라는 명화의 욕망은 용자를 두근거리게 한다. 명화에게 배신을 당하고, 카센터 훈이와 살림을 차릴 기대가 무너진 후에도 용자는 명화가 어떻게 사는지를 궁금해 하고, 명화를 만나 자신의 삶이 조금이나마 나아지리라는 실낱 같은 기대를 품는다. 용자의 욕망은 명화를 통해 암시 받은 가짜 욕망이다. 그러나 도시에 나와 서울 멋쟁이처럼 변한 자신의 모습이 용자 자신도 싫지가 않다. 시골 노인들의 눈총과 간섭을 받으며 흙과 거름을 만지는 삶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고 스스로 결론을 내린다. 마을에 있을 때 유난히 피부에 신경을 쓰던 명화의 모습은 서울에 올라와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는 용자의 모습이 된다.


[유랑가족]은 도시 빈민, 이주 여성, 농촌 총각의 가난한 현실을 다루고 있기에 독자는 읽는 내내 불편한 느낌이 들 수밖에 없다. 특히 인물들은 가난을 탈피하게 위해 돈을 간절하게 욕망하고, 그 돈에 가까이 가기 위해 만나게 되는 중개자들은 거개가 주체를 배신한다. 주체가 매개를 통해, 또는 중개자와 협력해서 돈을 벌 수 있으면 좋으련만 각 인물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사기치고 배신하면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을 만큼 사정이 녹녹치 않은 것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이들도 많이 나온다. 미정, 영기, 명호, 공주, 영주 등이다. 부모를 잃었거나 부모와 떠도는 이 아이들도 돈을 욕망할 것이고, 또 한 번 배신을 당할 것이다. 책의 말미에 펑크 난 트럭에 탄 명호를 남겨두고 책장을 덮는 마음이 무척이나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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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과 타자
엠마누엘 레비나스 지음, 강영안 옮김 / 문예출판사 / 199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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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자는 무력한 낯선 얼굴로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도저히 일치할 수 없는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인해 자아 안에 동일성의 자아 아닌 자아가 생산된다.
*
존재자(existant) 전에 존재, 또는 존재함(exister)이 있다. 존재는 텅 비어 있고 캄캄하고 끝이 없는 우주와도 같다. 이 우주에 존재자가 나타나 존재함을 떠맡는 사건이 홀로서기(hypostase)다. 홀로서기는 항상 현재다. 시작도 끝도 없이 항상 현재에서 시작한다. 홀로서기를 통해 존재자가 존재의 주인이 되고, 존재에게 남성적 힘을 행사하게 된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일체성, 타인과의 관계를 전제할 필요 없는 이 일체성을 고독이라고 한다. 존재와 존재자 사이의 동일성은 자기로부터의 출발이자 자기에의 귀환이 된다.

고독의 경험과 사회적 경험은 이율 배반의 관계다. 일상적 삶에서 자아가 자기로 돌아갈 때, 사이(intervalle)가 나타난다. 이 사이에 주체가 맺는 대상과의 관계를 향유(jouissance)로 특징 지을 수 있다.

*

찬찬히 따라 읽을 때는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가 정리하려니 어려워졌다. 레비나스의 절판된 저작이 다시 나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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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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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라는 제목과 ‘이기호‘가 쓴 소설이라는 것만으로 선택했는데 ‘차남들의 세계‘가 내가 예상한 것과 사뭇 달라 살짝 아쉬웠지만 모처럼 재미있는 한국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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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주의를 알고 싶은, 배우고 싶은 사람들에게 추천하는 책. 이 책들부터 읽고나서 관심분야를 넓혀가기를 권한다. 좋은 책이어도 한국적인 의미에서 에세이나, 지나치게 난해해서 기본서로는 부적절한 것들은 제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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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란 무엇인가 (반양장)- 성, 몸, 권력을 둘러싼 사회학적 물음
로빈 라일 지음, 조애리 외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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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즈비언 선택
클로디아 카드 지음, 강수영 옮김 / 인간사랑 / 200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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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매매의 정치학 (반양장)- 성매매특별법 제정 1년의 시점에서
서울대여성연구소 지음, 이재인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9월
15,000원 → 15,000원(0%할인) / 마일리지 150원(1%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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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거부당한 몸- 장애와 질병에 대한 여성주의 철학
수전 웬델 지음, 강진영.김은정.황지성 옮김 / 그린비 / 2013년 1월
20,000원 → 18,000원(10%할인) / 마일리지 1,00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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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전집 5
프란츠 카프카 지음, 오용록 옮김 / 솔출판사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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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년 프라하 늦은 저녁, K는 성 앞에 서 있었다. “마을은 눈 속에 깊이 묻혀 있었다. 성이 있는 언덕은 안개와 어둠에 잠겨 있어 아무것도 볼 수 없었으며, 어렴풋이나마 큰 성이 있음을 알려주는 불빛도 없었다.(9)” 프란츠 카프카의 []에 시간과 공간은 특정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작가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유대인으로서 습관적으로 살아가다가 만나는 낯섦, 삶의 부조리함을 바라보고 있다. 그의 공간이 익명이기에 우리가 사는 바로 이곳을 바로 대입하기가 오히려 어렵지 않다. 모든 것이 불확실하고, 죽는다는 것만은 확실하지만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삶은 현대사회에서 현대인이 겪고 있는 그것이다.


[]이 쓰인 시대는 양차 세계대전 사이, 실존의 부조리가 징후를 나타내던 때다. 알베르 카뮈에 의하면 부조리란 신 없이 존재하는 죄다.([시지프 신화], 64~65)” 카뮈는 신 없이 존재해야 하는, 주어진 운명에 구원을 호소하지 않는 부조리한 인간의 모험으로서 카프카의 []을 읽는다. “[()]은 어쩌면 행동으로 보여준 신학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의 은총을 추구하는 한 영혼의 모험, 지상의 사물들에게서 장엄한 비밀을, 그리고 여인들에게서 그들 안에 잠들어 있는 신의 징후를 구하는 한 인간의 개인적 모험이다.(같은 책, 196)”

 

K, 익명과 운명의 이름

 

[]의 주인공은 K. 소설의 다른 인물들은 카프카에게서 암시와 은유로 가득찬 이름을 부여 받았다. 예를 들어 클람의 마을 비서는 그리스 신화에서 밤의 아들인 모무스(Momus), K의 조수는 구약의 선지자 예레미아스(Jeremias). 그러나 KK일 뿐이고 다른 인물들에게서 측량사로 불릴 뿐, 이름으로 호명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애인 프리다의 잠꼬대에서나 K. 가장 중요한 인물인 K와 가장 중요한 장소인 마을에 아무 이름이 없기 때문에 우리는 카프카의 세계에 선입견 없이 직면할 수 있다. K에게 붙는 아무 것도 아닌 타지 사람이라는 수식이야말로 오늘날 우리 현대인이 현대 사회에서 살아가며 느끼는 그 감정이다. 올바르지 않은 시간에 태어나, 올바르지 않은 장소에서, 올바르지 않은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는 부조리, 거기서 기인하는 불안이 K와 다름없는 우리를 사로잡고 있다.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이름 있는 것조차 명확하지 않고 모호하다. “이 관리는 클람과 몹시 비슷한데, 그가 자기 자신의 사무국, 자기 책상에 앉아 있고 문에 그의 이름이 붙어 있다면난 이제 의심할 게 없겠지.(213)” 우리는 이름이 있기 때문에 이름이 가리키는 그것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름은 우리의 개념을 한정시킨다. 성이 성이고, 마을이 마을이기에 우리는 모호한 상태로, 그러나 열린 상태로 소설을 읽어나가게 된다.


약속의 땅을 밟지 못하는 디아스포라

 

카프카는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 치하의 체코 프라하에서 살았다. 유대인인 그의 아버지는 체코어 대신 독일어 교육을 시켰다. 프라하에서 독일어를 쓰며 살아가는 유대인이라는 특수한 조건이 카프카만의 독특한 문학을 형성했다고 한다유대인의 혈통이라는 사실이 작가의 작품에서 중심 주제로 등장하는 것은 아니지만, []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흩어진 유대 민족의 디아스포라를 떠오르게 한다. 고향을 잃고 방황하며, 소속된 공동체 없이 서로가 타인이기만한 현대에는 디아스포라가 유대 민족만의 고유한 현상이 아니라 현대인 모두에게 벌어지는 현상이 된다.


작품의 제목은 []이지만 주인공 K는 성에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다. 그가 머무르는 곳은 성이 바라다 보이는 마을이다. K는 성의 영주인 베스트베스트 백작이 고용한 측량사다. 면장을 만나 확인한 바, K의 고용은 A부서와 B부서 사이의 서류 처리 실수에서 비롯되었다. 시정되지 않은 오류로 인해 K는 측량사로 불리긴 하나 측량사가 아닌 상태로 마을의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게 된다. 자신이 온 곳으로 돌아가지도 못하고, 약속된 직분도 수행할 수 없는 것이다. 소설의 말미에서는 더 이상 아무 것도 중요하지 않다. 학교 소사도 하지 못하게 된 K는 마을에서 하녀들의 방에서 숨어 지낼 수도, 마부 게어슈태커의 말먹이꾼으로 살 수도 있다[]은 미완성인 소설이지만 완성작과 다를 바 없고, 이야기는 끝나지 않는다.


폴 오스터는 카프카의 사망 15주년에 붙여 카프카를 위한 페이지들을 남겼다만일 그의 여행이 어떤 최종 목적이라도 갖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최종적으로, 그가 시작했던 그곳에서 그 자신을 발견함으로써일 것이다. () 약속된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그것에 가까워진다는 것에 절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자기로부터 떨어진, 한 팔만한 거리에, 한 삶만한 거리에 두고, 그리하여 도착에 가장 가까이 갈 때가 자신의 목적지로부터 가장 멀어질 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나아간다. 그리고 한 걸음에서 다음 한 걸음까지 자기 자신 이외의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한다. 아니, 그 자신조차도 아니고, 그가 될 것의 그림자이다. 아니, 그 약속된 땅조차도 아니고, 그것의 그림자이다.([굶기의 예술] 30~31)”

 

보이지 않는 신, 해체된 권력

 

카프카의 소설에서 의 관리들이 가진 권력은 가시화되지 않는다. 이는 바르나바스네에게 들이닥친 불행이 명확히 보여준다. 아말리아가 조르티니의 청을 거절하고 그의 심부름꾼 앞에서 편지를 찢은 이후에 조르티니는 아무런 처벌을 하지 않는다. 처벌은 이웃으로부터 온다. 성의 명령을 거부한 아말리아의 가족들은 성(Family Name)으로 불리지 못하고 바르나바스네가 되었다. 일자리도 잃고 이웃의 왕래도 끊겼다. 성에 탄원을 내자 성의 답변은 명료하다. “대체 뭘 원하는 거야? 그에게 무슨 일이 생겼지? 무엇에 대해 용서를 청하는 것이지? 언제 그리고 성의 누가 그에게 손가락 하나라도 건드렸단 말인가?([], 247)” 성과 성의 권위를 대표하는 클람은 아무도 보지 못하고 누구도 알지 못하나 어디에나 있는 빅브라더와 같다. 그리고 성의 권력은 피감시자들 스스로를 감시하고 처벌하는 파놉티콘으로 기능한다.


성처럼 견고했던 권력의 해체, 무용지물인 권력의 모습은 예고된 것이다. 면장은 K에게 관료제의 허점을 내비친다. “한 부서에서 이것을, 다른 부서는 저것을 처리하다 보니 다른 쪽에 대해선 모르며, 상부의 감독이 무척 꼼꼼하다고 하지만 본디 너무 늦게 오기 때문에 결국은 조그만 혼란이 생길 수 있어요.(75)” 잘못 들어간 방에서 만난 비서 뷔르겔은 벅찬 업무 속에 가지게 되는 관리들의 약점인 불쑥 찾아온 밤의 민원인 이야기를 한다. K가 복도에 있다는 이유로 얼굴을 내보이지 않는 관리들은 민원인이 도달할 수 없는 강력한 권력이자 필요할 때는 사라지고 없는 무능한 권력의 대변자들이다.


[]의 마을에 구원은 없다. 바르나바스네의 몰락에 대해 올가는 자신의 가족들에게 헤어 나올 힘이 없음을 알아채고 나자 이웃에게 멸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올가는 관리들이 드나드는 여관 헤른호프에서 하인들에게 몸을 팔면서라도 살아남고 정보를 모으려 했다. 권력은 마을 사람들을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들지만, 정작 사람들의 삶이 해결을 요청할 때 그 자리는 텅 비어 있다.

 

[시지프 신화]에서 알베르 카뮈는 모든 자명한 사실들, 진리는 결실이 없다고 말한다. 카뮈에 따르면, 카프카의 작품이 보편성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자신의 온갖 모순들 속에서 믿어야 할 이유를 끌어내고 자신의 풍요로운 절망 속에서 희망을 가질 이유를 끌어내며 그 끔찍한 죽음의 수업을 삶이라고 부르면서 바로 그 인간성을 회피하고자 하는 인간의 비통한 모습이 거기에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K가 떠나지 못하는 마을은 우리가 살고 있는 현대 사회다. 그 속에서 불안을 느끼며 부조리와 직면해야 하는 우리는 또 다른 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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