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만 하소서 - 자식 잃은 참척의 고통과 슬픔, 그 절절한 내면일기
박완서 지음 / 세계사 / 2004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를 하고 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를 읽었다. 박완서 선생의 소설도 좋지만, 이 일기는 다른 누구의 소설보다 마음을 움직인다. 선생이 의사였던, 스물여섯밖에 되지 않은 아들을 잃고나서 며칠 후부터 쓴 일기다. 일기를 쓴다는 의식도 없이 토해낸 말들이다. 나는 누군가의 고통을 만날 때마다 이 책을 자주 떠올린다.
*
9월 14일

나는 아들을 잃었다. 그 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아듣는 걸 견딜 수가 없다. 그 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이제 순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밖에 없다. 만약 내 수만 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그러나 곧 아들의 기억이 지워진 내 존재의 무의미성에 진저리를 친다. 자아(自我)란 곧 기억인 것을. 나는 아들을 잃고도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내 명료한 의식에 놀란다. 고통을 살아야 할 까닭으로 삼아서라도 질기게 살아가게 될 내 앞으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런 늙은인 싫지만 어쩔 수가 없다.

9월 16일

이렇게 해서 차츰 먹고 살게 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반발이 치밀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격렬한 토악질이 치밀어 아침에 먹은 걸 깨끗이 토해냈다. 그러면 그렇지 안심이 되면서 마음이 평온해졌다. 정신과 육체의 생각이 일치할 때의 안도감 때문인지 낮잠을 좀 잘 수가 있었다.

9월 17일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9월 ○○일

만약 손가락 끝에 가시라도 박힌 경험이 있다면 그 손가락으로는 아무리 좋은 거라도, 설사 아기의 보드라운 뺨이라도 아픔을 통하지 않고는 결코 만져볼 수 없다는 걸 알 테지. 그런 손가락은 안 다치려고 할수록 더욱 걸치적거린다는 것도. 못박힌 가슴도 마찬가지란다. 오오, 제발 무관심해다오. 스스로 견딜 수 있을 때까지.

10월 ○일

특히 하느님께서는 의인을 먼저 데려가신다는, 예수쟁이들의 상투적인 위로는 딱 질색이었다. 내 아들은 물론 의인도 아니었지만, 만약 그런 소리를 조금이라도 믿어야 한다면 세상의 어느 에미가 자식에게 정의나 도덕을 가르칠 수가 있단 말인가. 하기야 그런 말 잘하는 사람일수록 돌아서선 저 여편네는 무슨 죄를 얼마나 많이 지었길래 외아들을 앞세웠을까 하고 에미의 죄를 묻기에 급급하리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남자 - 지구에서 가장 특이한 종족
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인성기 옮김 / 들녘 / 2002년 4월
평점 :
절판


사랑이 끝난 뒤 여자들은 하나같이 남자가 변했다고 비난한다. 그가 이상해졌다. 그는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한다. 여자들이 한결같이 연애 말기에 부르짖는 모토이다.
그러나 남자는 여자와 달리, 오히려 사랑하고 있는 상태에서 자신의 너무 변해버린 모습을 본다.
사랑이 끝난 남자는 단지 자신이 몸담고 있던 세계로-원/래/대/로- 돌아간 것 뿐이다.
여자의 눈에 유일무이하게 보이던 남자도, 결국 한발짝 물러서서 보면 사랑에 빠졌을 때 모든 남자가 보이는 행태를 답습하고 있는 것뿐이다. 결국 그는 사랑에 빠진 평범한 남자일뿐이다.

"오빠는 너무 다정다감해. 오빠는 다른 남자랑 달라. 오빠는 나를 배려할 줄 알아. 세상에 오빠같은 남자는 없어. 나만이 발견한 오빠의 매력이 있다니까."
오빠는 단지, 사랑에 빠진 남자일뿐이다. 사랑이 끝나면 오빠는 다시 남자가 된다.

개구리 왕자를 꿈꾸는 많은 여자들이 개구리와 사귀거나, 심한 경우에 결혼을 한다. 초기에 여자들은 생각한다. 다른 여자들 눈에는 개구리로 보이는 왕자를 내가 잡았어. 그는 내가 키스를 하면 왕자가 될 거야. 그리고 점차 깨닫는다. 어, 아직도 개구리잖아. 내 키스가 잘못 되었나봐. 진실은 다음과 같다.
그/는/원/래/개/구/리/다.

여자들은 신기하게도 남의 남자는 개구리인 줄 알면서 자기 남자는 왕자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남자나, 남의 남자나 그들은 개구리일 뿐이다.

나는 이 책에서 남성들의 자화상으로 제시하고 있는 11가지 인간군상이 모두 싫었다.

*

남자는... 여자는... 이런 설명들이 끼치는 해악이 어마어마하므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어차피 절판도 됐다. 그러나 꽤 재밌는 책이기는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슈거 블루스 - 설탕,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독, 개정판 마이너스 건강 3
윌리엄 더프티 지음, 이지연.최광민 옮김 / 북라인 / 200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슈거 블루스란 설탕 중독으로 인해 생기는 우울증 및 제반 질병에 붙여진 이름이다. 설탕을 한 번 끊어볼까 하는 마음에 <슈거 블루스>라는 이름의 책을 열심히 읽었다. 이 책에 의하면, 설탕은 마약과도 같은 물질이다. 영양소는 0인데 칼로리만을 발생시키고 우리 몸을 악화시키는 죽음의 마약. 일례로 담배가 폐암을 유발시키는 이유도 담배 안에 포함된 설탕 때문이라고 필자는 말한다. 놀랍다. 담배에도 설탕을 넣다니...


설탕을 끊을 생각이 없더라도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책이다. 설탕에 얽힌 세계사를 읽는 재미가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먹을 거리에 대한 생각을 재정립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설탕은 끊기가 어려운 감미료이다. 유심히 살펴보면 자신이 하루종일 먹은 음식 중에 설탕이 안 들어간 것은 하나도 없다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이스크림, 빵, 과자 등 우리 눈에 보이는 설탕제품 외에, 맥주에도 설탕이 들어가며 웬만한 반찬에는 설탕이 다 들어가 있다. 따라서 설탕을 끊지는 못할 망정 줄이기라도 하려는 시도는 실행하기가 매우 어렵다. 설탕을 줄이려고 노력하는 순간부터, 이미 설탕에 중독된 상태임을 너무나 확실하게 느끼게 된다. 피로한 느낌이 들면 달착지근한 게 먹고 싶어지는 것이, 마약과도 같이 우리의 몸이 설탕에 끌려다니고 있는 것이다. 또한 설탕뿐만 아니라 당질(탄수화물)은 도정을 하면 할수록 그 폐해가 심각해지므로 정제되지 않은 당질을 흡수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

세월이 지나 다시 생각해 보니 음식이나 약품에 관한 책은 음모론이 개입되거나 과장이 심해서 믿을 수가 없다. 이 책만 해도 그렇다. 당질이 어떻게 영양소가 0일 수가 있을까. 당질도 영양소인데... 설탕이 몸에 좋지 않다고 설탕을 가득 넣은 매실청을 넣거나 화학첨가물은 무조건 배척하거나 이름만 바꿔서 해로운 첨가물을 계속 넣거나 하는 사회에서 어떤 음식을 먹어야 좋을지 고민을 배가시킨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걸리버 여행기 - 개정판
조나단 스위프트 지음, 이동진 옮김 / 해누리기획 / 2010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걸리버 여행기는 이 소설을 굳이 다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도 매우 친숙한 소설이다. 특히 각종 광고에서 패러디해 온 소인국 릴리퍼트에서 걸리버가 해안가에 묶여있는 장면은 누구나 한번쯤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동화를 무척 좋아하고 부러 찾아서 읽어보는 편이다. 그림형제나 안델센의 동화라던가, '초콜릿 공장의 비밀', '꼬마 마녀'같은 책들도 굉장히 좋아하고 이 나이 먹도록 여러번 읽어왔다. 그렇지만 어릴 적 읽었던 '걸리버 여행기'동화판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그러나 소설 '걸리버 여행기'는 그 풍부한 풍자로 인해 쏠쏠한 재미를 던져주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친숙한 소인국 릴리퍼트보다는 뒤쪽으로 갈수록 어른에게 더 재미를 줄것으로 기대된다. 이 책의 모험은 모두 4곳에서 이뤄진다. 먼저 소인국 릴리퍼트, 거인국 브롭딩나그, 그리고 천공의 섬 라푸타와 후이님과 야후가 사는 나라 이렇게 4곳이다.

천공의 섬 라푸타는 아무래도 일본 애니메이션 '천공의 섬 라퓨타'의 모티프가 된 듯하다. 확인한 바에 의하면 이 애니메이션은 걸리버 여행기와는 큰 유사성이 없는 것같다.


소인국 릴리퍼트는 저자 조나단 스위프트가 살던 당시의 영국 의회와 행정부를 풍자한 것이라는데 지금에도 시사하는 바가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뛰어나진 않다. 거인국에서의 모험도 그럭저럭인데 이 넓은 세상에서 인간의 왜소함을 일깨워준다.


개인적으로 천공의 섬 라푸타 부분이 가장 탁월하다고 느낀 이야기이다. 뉴턴을 풍자한 것이라는 말도 있는데 오늘날의 지식인(운동권도 포함해서)에 대입해 보면 박장대소할만한 대목이다. 주변의 지식인들(자기자신도 포함해서)을 떠올려본다면 충분히 즐거움을 줄 것이다.


마지막 후이님의 나라에 나오는 야만적인 종족 야후의 이야기는 인터넷 사이트 야후때문에 더더욱 유명해졌다. 인간사회 모든 악덕을 지닌 야후, 그렇지만 지금 이 세계에 살고 있는 우리 야후가 더더욱 천박한 것으로 결론 내려지고 있다.


국내최초 완역판으로 오리지널 삽화가 곁들어져 있는 해누리판 걸리버여행기로 읽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면역에 관하여
율라 비스 지음, 김명남 옮김 / 열린책들 / 2016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6년의 책으로 꼽고 싶다. 의사인 아버지와 시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그 자신 아들을 키우고 있는 어머니이자 작가인 율라 비스는 문학으로도 과학으로도 훌륭한 글을 써냈다. 인종이나 젠더 문제에 있어서 섬세한 어휘를 골라준 김명남의 번역도 좋았다.

정치적 몸과 자연적 몸. 백신 접종, 과학, 윤리, 은유, 글쓰기. 올해 나를 괴롭힌 거의 모든 것들을 돌아볼 수 있는 책이었다.

*상식 1. 나는 수두 백신을 맞았는데 대상포진을 앓았다. 수두 백신을 맞는다고 대상포진에 절대 걸리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치명적이지 않게 넘어간다고 한다. 일반적인 대상포진보다 통증이 적었던 것은 백신의 힘이었다.

**상식 2. '양심적 거부'는 군대가 아니라 백신 접종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을 위해 몇 장 사진을 찍었다. 이보다 좋은 다른 구절도 많았는데, 부분만 발췌하기에 아까웠다.

"의사 마이클 피츠채트릭이 말했듯이, <위험에 처한 면역계란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느끼는 압도적인 취약함에 대한 은유다>." - 200쪽

적대감 속에서, 취약함을 느끼며 읽어나갔다. 나는 감염될 수도, 감염시킬 수도 있는 존재다. 치유와 조언을 얻었다.


의사 마이클 피츠채트릭이 말했듯이, <위험에 처한 면역계란 적대적인 세상에서 살아가는 개인이 느끼는 압도적인 취약함에 대한 은유다>.(200쪽)

우리는 제 살갗으로부터보다 그 너머에 있는 것들로부터 더 많이 보호받는다. 이 대목에서, 몸들의 경계는 허물어지기 시작한다. 혈액과 장기 기증은 한 몸에서 나와 다른 몸으로 들어가며 몸들을 넘나든다. 면역도 마찬가지다. 면역은 사적인 계좌인 동시에 공동의 신탁이다. 집단의 면역에 의지하는 사람은 누구든 이웃들에게 건강을 빚지고 있다.(36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