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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덮어둘 일이지 - 미당 서정주의 아우 우하 서정태 90세 시인이 들려주는 노래 90편
서정태 지음, 권혁재 사진 / 시와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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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서정태
사진 권혁재
따뜻한 시집 한권을 만났다.
화려한 기교와 수려한 문장, 언어의 유희가 가득한 시는 아니지만
진솔하고, 마음이 담겨 있으며, 잔잔히 내 마음을 울리는 시들이다.
서정주 시인의 아우 서정태님이 쓰신 90편의 시들이다.
서정태님의 연세가 아흔이다 보니 세상을 관조하는 듯한 시들이 상당히 많다. 이미 긴 세월을 겪어 보아서 연륜 속에 쌓인 지혜들이 가득한 시라고나 할까? 그렇다고 특별한 교훈을 주는 그런 시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저 그 분의 생각과 마음들을 조용히 적어내려 간것이 그 분의 삶 자체로 보여지는 시들이다.
자족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와
무국과
김치 한 접시
김 두 장
아침상 파려 먹고 나니
천하는 다 내 것이다
고샅길에 나가면
어린아이들
저희들끼리 놀다가도
할아버지! 하고 달려오고
젊은 아낙도 머리 숙여 인사한다
하늘이여
고운 하늘이여
티 없는 하루가 되게 하라
(p96)
자족의 미를 알게 된 시인이 만면에 웃음을 띄고 살랑살랑 뒷짐 지고 골목을 걸으시는 모습이 보이는 듯한 시이다.
그날 하루 끼니를 잇고, 주위 사람들과의 정을 나누고, 그런 삶들에서 족함을 느끼는 풍광이 그려진다.
혼불
무더운 여름날 저물어
초저녁에
건너 마을 외딴 집
살막네 혼불 나간다
그 집 앞
미루나무 한 바퀴 돌고
높았다 낮았다
강변 건너 솔재로 나간다
시퍼런 사발만 한 불
평생 참아왔던 서러움과 시름
한데 뭉친 덩어리
아무도 몰래 짊어지고 나가고 있다
(p108)
연세가 있으시다 보니 죽음에 대한 시도 많다. 그렇다고 죽음을 두려워 한다기보다는 조용히 앉아 맞이한다고나 할까. 자연스럽게 다가오는 죽음에 대한 초연한 모습을 볼 수가 있다.
학이 우는 날
뜰 앞에 심은 다박솔이 커서
학이 날아 와 우는 날
그 하늘 너무나 밝기만 해
천상의 피리소리도 들리는 날
오래도록 참아왔던 나의 노래
그때에나 한 곡조 불러보리
(p14)
나 또한 이렇게 오래도록 참아 온 나의 노래를 부를 때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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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 실려있는 사진들도 참으로 마음에 든다.
잔잔한 시와 어울리게 튀지 않는 풍광들을 담아낸 사진들이 많다.
각각의 시와 이미지를 연결하려는 노력 또한 보이는 사진들이었다.
오래간만에 마음이 따뜻해지는 시집을 한 권 만났다.
<한우리 북카페 서평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