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 유쾌한 미학자 진중권의 7가지 상상력 프로젝트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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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한 기말고사가 끝나고 아주 짧은 방학을 맞아 간만에 도서관을 찾았다. 이번에야 말로 <청년의사>에서 권하는 책들을 읽어봐야지 하며 들어가는데 ‘진중권’이란 이름이 얼른 눈에 들어왔다. 이제 그 이름만으로도 선뜻 지갑을 열어 사게 되는 그의 책들. 인터넷의 정치논객으로 이름을 날리던 때에는 그 특유의 독설과 번뜩이는 비판정신에 통쾌해하면서도 왠지 불편한 마음이 없지 않았었는데, 이후 줄기차게 펴내기 시작한 미학 관련 책들을 보면서는 신뢰감과 함께 적이 안심이 되기도 했었다. 왜냐하면 단순한 풍자의 조롱의 세계를 넘어선 진중권의 본령은 그의 전공인 만큼 다름 아닌 ‘미학’에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의 대표작인 <미학 오딧세이>는 고대에서 현대에 이르는 예술의 역사를 에셔, 마그리트, 피라네시 등 범상치 않는 화가들의 작품세계에 기대면서 전혀 새로운 형식의 본격적인 예술 또는 미학사를 구성해 보였다. ‘美學’이란 예쁜 이름에 속아 전문적인 철학적 미학책들을 읽다가 숱하게 절망했을 수많은 독자들이 그에게 열광했다. 왜들 그랬을까? 내 생각엔 여전히 낯설고 어려운 미학이란 영역을 그만큼  독자적인 자신의 언어로 재미있게 소개해 준 재능있는 저자들이 그간 너무도 희귀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풍부한 도판과 창조적인 작품해석, 예술사와 사상사를 아우르는 해박함과 여전히 곳곳에 반짝이는 재기어린 풍자정신... 물론 진정한 삶의(혹은 정치적) 자유를 구가하려는 그의 전투적인 정신이 살아있는 <레퀴엠>, <앙겔루스 노부스>등의 아름다운 산문도 감동적이고 좋았으나, <현대미학강의>, 그리고 지금 이야기하고자 하는 <놀이와 예술 그리고 상상력> 등 이어지는 그의 작업을 보면, 역시 그의 진정한 아이덴티티는 미학자로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가 서문에서 권하듯, 나는 이 책을 정말 즐기면서(‘enjoy this book!') 보았다. 이 책은 흔하디 흔한 예술에 관한 책만은 아니다. 오히려 ‘상상력’을 키워드로 삼아 동서고금을 아우르는 예술작품들 뿐 아니라, 주사위놀이, 체스, 그림자놀이, 만화경, 마술, 불꽃놀이 종이접기, 수수께끼, 미로, 인형풍경 등 벼라별 영역을 유쾌하게 넘나드는 즐거운 카오스의 세계를 보여준다. 무지개의 일곱 빛깔로 대표되는 각각의 章은 하나하나가 그 자체로 독립적이고 완결된 하나의 ‘모나드’(monad)로서, 순서대로 읽든 골라가며 읽든 아무 상관이 없도록 꾸며져 있다. 책을 대하는 우리의 고전적인 방식에 일침을 가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다른 데서도 찾을 수 있다. 본문이 이끄는 대로 하다보면 어느 순간 책을 뒤집어보거나 옆으로 뉘어서 눈을 게슴츠레 책에 가까이 대고 뭔가를 찾아보려고 낑낑대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새로워 보이는 시도들이 오늘날의 현대에 국한된 일이 아니었다는 자각에 이르게 되면 놀라움 속에서 다시금 눈을 부비며 과거를 돌아보게 된다.  ‘놀기’를 좋아하는 호모 루덴스는 아마도 인류의 시원부터 함께 해온 우리 인간의 본질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그 ‘놀이’를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고정된 지식이나 편견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유희하는 우리의 상상력이 될 터이다. 모든 시대의 모든 인간은 이미 온갖 놀이와 환타지의 세계를 유영하던 유년시절을 누구나 겪는다. 그리고 시대마다 용인되는 범위와 한계에 정도 차는 있을 지언정, 어른이 되어서도 즐길 수 있는(아니 어른이 되었기 때문에 더 재미를 깨달을 수 있는) 각종 놀이는 언제나 세상의 언저리를 배회하고 있었다.

 

   이미 당대의 제도와 규범에 편입되어 버린 과학과 예술, 종교의 틈바구니에서 줄기차게 생명력을 유지해온 놀이와 상상력의 세계.  이것이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이 만개했다는 현대에 와서 무대의 전면에 부상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주술적이고 신화적인 환타지를 억누르고 합리적인 근대적 인간상을 지향하고자 했던 그간의 인류의 노고가 한순간에 스멀스멀 해체되어버리는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저자가 주장하는 상상력 혁명의 본질을 천착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상상력 혁명은 ‘논리적, 추론적, 선형적 사유를 배제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전제하고 그 한계를 뛰어넘을 뿐’이다. 이미 성숙한 어른이 되어 놀고자 하면 어린아이의 그것과는 질적으로 다르지 않겠는가. 합리성과 첨단과학으로 무장한 체 본격적으로 놀기 시작하는 현대의 ‘기술적 상상력’은 그래서 ‘과거의 어리석음으로의 퇴행이 아니라 과거의 천진난만함’으로의 동시적, 전략적 역행이 될 것이다.

 

   환상과 과학이 그 경계를 넘나들고 예술과 철학이 다르지 않으며 꿈과 현실이 혼재되는 포스트모던한 세계가 이미 우리 삶을 규정한 지 꽤 지났다. 500년 전에 이미 구속없는 상상력을 누구보다도 정밀하게 펼쳤던 예술가+과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오늘날의 세계가 추구하는 새로운(그러나 이미 오래된) 인간상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이와 같은 ‘영원한 소년’의 이미지를 자기 삶 속에서 구현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이는 저자는 그래서인지 불혹을 넘은 나이에 비해 꽤 젊어 보인다. 여전히 익살스러운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날리며 새로운 세상을 끌어안으면서 동시에 넘어서고자 하는 듯...

 

   아마도 진중권이 자기네 편인 줄 알고 열렬히 환호를 보내던 진보진영이 그에게서 낯설음이랄까 일종의 배신감을 느끼는 것은 무리가 아닐 것이다. 보수냐 진보냐의 경직된 이분법적 세계관은 한곳에 머무르지 않으려는 저자가 이미 버린 지 오래이기 때문이다. 내가 느끼기엔 진중권은 포스트모더니즘이 마치 유행처럼 번지던 시기에는 시류를 타는 대신 균형감각을 잃지 않은 가운데 공부를 열심히 한 듯 하다. 그래서인지 요즈음 그가 분석해내는 포스트모던 사상들은 단순한 번역이나 베끼기에 급급했던 과거와는 달리 한층 곰삭은 자기언어로 정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시류에 영합하는 것이라고 무조건 배척하지 않고 새로운 흐름에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읽어내려 열심히 공부하고 그래서 그로부터 자유로워 질 수 있는 태도. 자신이 알고 있는 딱딱한 사고틀에서 결코 벗어날 줄 모르는 사람들이라면 진보이든 보수이든 이를 이해할 수 없을 수 밖에. 

 

   이런 점에서도 자유롭게 유희하는 상상력과 놀이의 정신은 그 자체가 새로운 시각과 세계관을 열어가는 자기혁신의 매개가 될 수 있음이 명확해진다.  ‘미래의 윤리학은 상상력’이라는 명제가 이제사 이해가 된다. 미래의 윤리학은 미학으로 대체된다는 말도. 진위와 선악을 넘어선 피안으로 가로질러 넘어가는 자유로운 몸과 그 모든 느낌들의 동적 아름다움이 아마도 미래 미학의 주제가 되지 않을까. 상상력은 아마 여기서도 춤을 추며 자신을 나래를 펼쳐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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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의 예술을 찾아서
버나드 라운 지음, 서정돈.이회원 옮김 / 몸과마음 / 200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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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배경이 된 미국의 의료는 본래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자본가들의 이윤을 최고의 목적으로 하는 거대한 기업화 현상에 매몰되고 있다(이는 우리의 경우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현대의학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물학적 공통성은 질병을 하나의 상품으로, 신체 장기나 부속물은 교환가능한 어떤 것으로 표준화시킨다는 점에서 경제논리의 개입을 손쉽게 하고 있다.

이와 같은 체계 속에서는 당연히 개개인의 개별성과 차이는 무시되기 마련이다. 상업화된 의료제도 속에서 치유는 처치로 대체되고, 치료 대신 관리가 중요해졌으며 환자의 말에 귀기울이던 의사는 사라지고 그 자리를 값비싼 의료장비가 대신한다. 이러한 관계에서는 고통받는 인간으로서의 환자라는 존재가 잊혀지고 만다. 생화학적 요소가 복잡하게 얽혀있는 개체로 환원된 인간존재...

저자는 이와 같은 현대의학의 모순 속에서 의학 본래의 신념을 회복해보고자 한다. 수천년동안 관습적으로 전해져오던 의사와 환자사이의 단절된 신뢰관계를 회복하려면, 의사들은 잃어버린 '치유의 예술'(art of healing)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존엄성이 있는 의술, 인간중심의 의학으로 다시 자리매김하려면, 환자의 치유를 위해 과학 뿐 아니라, 보편성과 특수성, 정신과 육체를 함께 아울러 판단할 수 있는 예술적인 측면도 마찬가지로 필요하다.

저자가 보는 좋은 의사란? 환자입장에서 편하고 존경심이 생기며 때에 따라 삶과 죽음의 문제를 믿고 이야기할 수 있는 의사. 첫만남에서 악수를 청하며 치유과정에 동반자되기의 마음자세를 보여주는 의사. 따뜻한 마음과 인간적 관심을 가지고 진실된 확신과 낙관적 생각으로 환자를 대하는 의사. 언제나 환자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는 의사. 중요한 말은 반복하고 요약해주는 의사. 실수를 했을 때 얼버무리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자세.

전문의한테 너무 자주 의뢰하지 않는 1차 진료담당의사. 환자의 호소를 편안하게 들어주면서도 복잡한 여러시술을 권하지 않는 의사. 환자를 통계숫자 속에서만 생각하지 않는 의사. 단지 생명을 연장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삶의 질을 저하시킬 수도 있는 방법을 권하지 않는 의사. 사소한 증상을 위험한 병으로 과장하거나 중한 증상에 당황하지 않는 의사. 무엇보다도 환자를 위하는 일을 자신이 부여받은 특권으로 생각하며 기쁨으로 봉사하는 인간애를 가진 의사... 이런 의사를 잘 알아보는 안목은 '환자의 예술'에 해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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