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섭의 식탁 - 최재천 교수가 초대하는 풍성한 지식의 만찬
최재천 지음 / 명진출판사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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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학문은 인간 본위이다. 동물을 연구하는 학문도 우주를 연구하는 학문도 결국은 인간의 시선에서 그 논점이 시작되어 인간을 위한 것이 된다. 경제학도 인간을 연구하는 인간을 위한 학문이며 물리학도 인간이 누비는 환경과 인간이 사는 삼라만상을 연구하고 결국 인간을 위해 더 나은 결과를 내놓기 위한 학문이다. 그래서 굳이 통섭이라는 명칭까지 필요할 것 같지는 않다. 애초 학자들이 자기들의 연구가 모두 인간을 위한 것임을 안다면 문제 될 것이 없을 텐데 말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저만의 틀에 갇혀 살듯이 학자들도 별다를 게 없어 그렇게 경계를 넘어갈 수도 있다고 일러줘야 하는 모양이다.

나는 통섭이라고 해서 모든 지식이 어우러지는 것인 줄 알았는데,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아마도 자연과학과 인문학의 어우러짐이라는 의미인 모양인데, 과연 인문학과의 어우러짐이 이뤄지고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인간'과의 접점은 모든 장에 걸쳐 이뤄지고 있다. 저자는 자연과학사에 일어나는 이런저런 일들을 인간사에 비추어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의 바탕에는 인간과 생명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배어 있다. 그런 저자야 말로 통섭적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다른 분야의 지식을 머릿속에 함께 담아두었기 때문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 그 안에서 인간과의 연계성을 파악해내기 때문일 것이다. 만사가 인간과 관련되어 있음을 깨닫는 사람은 타인을 비롯한 그 어떤 생명에게도 함부로 대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보다 연약한 것들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 그런 작가의 글에 나까지 마음이 포근해진다.


 

방방곡곡 많은 신하를 풀어 불로초를 찾게 했던 진시황제도 결국 한 줌 흙으로 돌아갔다. 그의 몸을 구성하고 있던 10조 개의 세포 속에 들어 있던 DNA들도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정자 속에 담겨 자식들의 몸으로 전달된 DNA의 일부는 아마 지금까지도 누군가의 몸속에 살아 숨 쉬고 있을 것이다. 이처럼 유전자의 관점에서 바라본 생명은 영속가능성을 지닌다. 태초에는 보잘것없는 한낱 화학 물질에 지나지 않았던 DNA는 단세포 생물을 거쳐 오늘날에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생명체의 몸속에 살아남아 면면히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생명의 역사는 한 마디로 DNA의 일대기 내지는 성공담에 지나지 않는다. (p. 162)


 

자연의 도살 현장에는 언제나 경제주의자 즉 인간중심주의자와 환경주의자 즉 생물중심주의자 간의 각축이 벌어진다. 조금 살만하다 싶을 때에는 환경주의자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는 듯 싶다가 경제 지표가 조금만 나빠지기 시작하면 황급히 인간중심주의의 논리로 복귀하고 만다. 급기야 우리는 열대우림 15곳을 포함하여, 대부분의 종이 절멸 위험에 처해 있는 '중요 지점hotspots' 25곳을 지정하여 마지막 안간힘을 쓰고 있다.

보전생물학자들은 생명의 미래를 위태롭게 하는 요인들을 '하마'라는 뜻의 머리글자 'HIPPO'로 요약한다. 서식처 파괴Habitat destruction, 침입종Invasive species, 오염Pollution, 인구Population, 과수확Overharvesting이 그것이다. 오염과 인구 문제는 구태여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고 과수확의 문제점은 어민들이 이미 겪고 있다. 토종 개구리는 물론 심지어 뱀까지 황소개구리의 침입에 속수무책이었던 걸 기억할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가장 심각한 것은 서식처 파괴이다. 국토균형발전이라는 때아닌 이념 아래 전 국토가 굴착기의 발톱에 유린당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이웃 나라가 토해내는 황사에 기침 잘 날 없는 판에 우리 스스로 우리의 허파를 도려내고 있다. 나는 이 책을 우선 2005년 12월 21일에 1심의 판결을 뒤엎고 또다시 새만금 개발을 허락한 서울고법 특별4부 판사님들에게 권하고 싶다. 환경 윤리가 왜 단기적인 가치관을 넘어서야 하는지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얻게 될 것이다. 윌슨은 "우리의 미래 세대는 우리의 만행을 끝없니 반추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p. 214)


 

저자는 인간이 갖지 못한 현명함을 가진 동물들을 소개하면서 인간의 반성을 촉구한다. 인간과 다를 뿐 인간보다 부족하거나 모자란 것이 아닌 수많은 생명들이 발전이라는 이름 앞에 스러져 가는 현실이 그로서는 안타깝다. 제 몸의 몇 배나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개미의 힘이나 집단을 위한 희생을 통해 진정한 영속성을 누리는 꿀벌의 힘,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지구의 생명사를 쓰기 시작하고 지금까지도 많은 영향을 끼치는 미생물, 인간의 활동 영역이 넓어질수록 멸종되어 자취를 감춰가는 세계의 동식물들. 세상의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나 역시 저자의 이야기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간의 발 밑에 우리가 가지 못하는 드넓은 세계가 펼쳐져 있고, 머리 위로도 갈 수 없는 광대한 세계가 뻗어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그래서 우리는 한낱 미물에 지나지 않으므로 이 작은 세계에서 내가 높네 네가 높네 하는 것이 모두 부질 없음을 깨닫는다면 그 누가 얄팍한 지식의 틀에 갇힌 이기적인 개구리가 되겠는가. 그래서 저자는 독자들에게 우리 주변의 세계를 보여주고 싶은 것이 아닐까 싶다.


 

인간이 진화의 결과로 탄생한 것은 분명하지만 진화가 우리 인류를 탄생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과정은 아니다. 자연선택은 어떤 목표를 향해 합목적적으로 진행되는 미래지향적 과정도 아니며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모든 합리적인 해결 방법을 총동원할 수 있는 공학적인 과정도 아니다. 그래서 적자생존의 과정을 수없이 반복하고 난 결과는 어쩔 수 없이 완벽한 인간의 등장일 수밖에 없다는 식의 생각은 지나친 인본주의 또는 인간중심주의의 결과에 지나지 않는다. 생명은 이처럼 지극히 낭비적이고 기계적이며 미래지향적이지도 못하고 다분히 비인간적인 과정에 의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처럼 부실해 보이는 과정이 오랜 세월 동안 수많은 단계를 거듭하며 선택의 결과들을 누적시킨 끝에 오늘날 이처럼 정교하고 훌륭한 적응 현상들, 심지어는 남을 위해 목숨을 던지는 일까지 만들어낸 것이다. (p. 173)


 

인류 역사 내내 자연이 우리를 먹여 살렸고, 이제 또다시 우리는 자연의 품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다. 나는 21세기를 맞으며 우리 인간이 스스로 '현명한 인간'이라 부르는 자만을 반성하고 자연과 더불어 살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며 '공생인'으로 거듭날 것을 제안한 바 있다. 우리 인간이 자연계에서 가장 우수한 두뇌를 지녔다는 사실은 인정하지만 나는 우리가 현명하다는 점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다. 진정으로 현명하다면 우리의 삶의 터전까지 망가뜨리며 살지는 말았어야 했다. 우리는 제 꾀에 넘어가는 헛똑똑한 동물일 뿐이다. 하나뿐인 이 지구에서 자연과 더불어 공생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 생명의 보고 칼라하리를 어떻게 보전하는가는 우리의 의지를 가늠해볼 수 있는 시금석이 될 것이다. 지금도 칼라하리는 절규하고 있다. 그 절규가 우리의 절규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p. 285)


 

그러나 그는 미래가 어둡지만 그렇다고 해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고 설득한다. 아마도 어긋난 길을 나아가고 있는 인류의 미래가 우리 자신의 의지로 바뀔 수 있다고 믿는 모양이다. 비록 나는 그의 의견이 옳다고 생각지 않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긍정적이지 않지만, 밝은 내일을 바라보는 저자의 자세 만큼은 마음에 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운 미래가 오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다면 정말 아름다운 미래가 올 것 같기도 하니까.

각 장마다 한 권의 책이 메인으로 소개되고, 거기에 도움이 될 만한 책이 두어 권 더 추천된다. 우리가 알지 못한 아름다운 세계와 그 안에 사는 안타까운 생명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들이다. 마인드맵처럼 이어지는 독서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척 훌륭한 안내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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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박은정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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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문학상 작품은 늘 읽을 만한 가치가 있지만 이처럼 '반드시' 읽어야 할 가치를 지닌 작품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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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마스다 미리 만화 시리즈
마스다 미리 지음, 권남희 옮김 / 이봄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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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의 '작가생활'이라는 데에 꽂혀서 사 버렸다. 만일 '마스다 미리의 만화 그리는 법'이라고 했어도 냉큼 구입했을 것 같다. 일단 작가에 관련된 건 작법도 그렇고 이것저것 많이도 궁금하다. 마치 작가에 대해 많은 정보를 접하면 그것만으로 작가가 될 수 있을 줄 아는 모양이다;;


표지에서도 볼 수 있듯이 마스다 미리의 그림은 너무나 간단하다. 그림체를 중시하는 사람이면 코웃음치고 손도 안 댈 듯하다. 콘티만 짜면 나도 10분만에 그릴 수 있을 것 같다. 이런 단순한 그림체가 너무 가벼워 보여서 가까이 하고 싶지 않은 면도 있지만, 그건 또 나름대로 내게는 좋은 점으로 다가온다. 그 부족해 보이는 면이 오히려 나에게는 너도 할 수 있다고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기분이다. 그리고 아무리 만화책이라 해도 정말 중요한 건 그림이 아니라 그 안의 이야기임을 느끼게 해 준다. 문화의 모든 장르는 바로 이 이야기, 스토리를 중심으로 흘러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화려한 그림체가 포장지라면 내용은 포장지 안의 내용물이겠지. 마스다 미리의 만화는 바로 그 단순한 그림이 품고 있는 자잘하고 사소한 듯 보이지만 알고 보면 깊은 생각에 포인트가 있다.


마스다 미리는 학교에서는 있는 듯 없는 듯하면서 공부 못하는 학생이었고, 직장에서는 너무 소심해서 자신의 의견조차 큰소리로 말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이렇게 적고 보면 참 한심해 보이는데, 역시 한심하지만 나랑 비슷하다. 너무 조용해서 있는듯 없는듯 했던 공부 못하던 학생. 간밤의 TV 프로 이야기와 연예인 이야기를 하면서 마구 웃고 떠드는 급우들을 보면서 그 얘기들이 왜 재미있는지 이해하지 못했던 나. 어떤 이야기로 애들을 웃게 만들어야 아이들과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던 나. 신변의 일들만으로도 벅차서 하루하루 침울했던 날들. 집안 분위기는 마스다 미리네와는 전혀 달라서 공부하라는 잔소리가 귀에 못이 되어 박힐 정도로 지겨웠고, 부모님은 칭찬에 매우 인색했다. 이래저래 다 적고 보니 마스다 미리보다 더 비루하구나. 어쨌든 그래서 마스다 미리는 근거 없는 자신감을 가진 처녀로 자라났고 나는 그런 근자감도 없는 사람으로 자라난 건가-_-;;; 어쩐지 20대에 들어서면서부터 성격이 조금 밝아지긴 했지만.


공부도 못했고 소심했던 사람이지만 그래도 자신의 길을 찾아간다. 인생의 성공과 행복이라는 목적지로 향하는 모든 길이 공부를 통해서만 있지는 않다. 그리고 성공보다도 중요한 것은 바로 행복. 마스다 미리 그녀의 행복은 날마다 발견하는 작은 것들에 있다. 가끔 만나는 이런저런 편집자들의 성격, 안쪽 의자를 비워놓느냐 자기가 앉느냐, 통하는 편집자를 만났을 때의 사소한 기쁨. 다행히 나 역시 일상의 작은 즐거움을 곧잘 발견하고 이런저런 것들에 궁금증을 품곤 하는 사람이라 마스다 미리의 자질구레한 생각들이 반가웠다. 또, 호기심에 낯선 모임을 신청했다가 그날이 다가오면 후회하고, 막상 그날이 되면 그래도 가야지 싶어서 간다. 그리고 돌아오는 길에는 '역시 가길 잘했어. 좋은 경험이었어' 하면서 즐거워한다. 뭔가 그렇게 낯선 것에 다가갔다가 돌아올 때면 무미건조한 그 하루에 어떤 특정한 색깔을 칠하는 기분이다. 낯선 사물, 낯선 냄새, 낯선 촉각, 낯선 맛. 새로운 기억.


하지만 그녀는 그러면서도 자신의 일을 찾았다. 자기 자신을 투영해낼 수 있는 그림과 글. 단순한 그림과 짤막한 말 몇 마디로 많은 것들을 표현해낼 수 있는 그녀를 본받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살까 말까 고민했던 만화책 한 권에 격려받는 기분이었다. 음~~ 계속 앞에 두고 틈날 때마다 들춰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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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삭임의 바다
팀 보울러 지음, 서민아 옮김 / 놀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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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따로이 떨어진 섬에 사는 열다섯 소녀 헤티는 바다유리(유리조각 등이 20~30년간 바다를 떠돌며 매끈한 보석 형태로 된 것)를 통해 낯선 그림자를 본다. 그 무렵 섬에는 무서운 폭풍우가 몰아치고 그들을 다른 섬이나 육지와 이어주는 배가 부서진다. 폭풍 속에서 나타난 작은 배에는 은빛 머리칼의 노파가 타고 있었다. 헤티는 노파가 바다유리 속에 등장한 인물인 것을 알아보고 한편으로는 자기를 찾기 위해 노파가 섬에 오게 됐음을 알아차린다. 그러나 섬마을 노인들은 노파가 섬에 악을 끌고 왔다며 노파를 내치려 한다. 이에 헤티가 반발하다가 섬노인 하나가 죽게 되고, 머잖아 또 다른 노인이 목숨을 잃는다. 헤티의 할머니와 헤티의 친구 탐, 그리고 몇몇 어른들은 노파와 헤티를 보호하고, 그들의 보호 속에서 헤티는 죽어가는 노파를 살리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간신히 목숨을 건진 노파에 대한 단서는 배의 부서진 명판으로서 노파가 육지에 있는 큰 도시에서 왔음을 알려준다. 헤티는 노파를 데리고 돛단배에 올라 거친 바다를 헤쳐나가며 목적지를 향해 노를 젓는다.


바다유리라는 신비로운 영적 매개체와 그 안에서 어떤 형상을 보는 신비로운 소녀. 그리고 속삭임을 들려주는 기묘한 바다, 모라 섬이라는 낯선 장소, 거기에 나타난 신비로운 노파. 이야기 전체에 몽환적이고 신비로운 느낌이 감돌아 사건이 전개되기 시작했을 무렵에는 상당히 기대했다. 그러나 노파가 탄 배가 섬에 도착하는 데만 전체 페이지의 1/3이, 또 헤티가 노파를 간호하는 데만 1/3이 소요되면서 이야기가 너무 늘어져 어떤 결말이 날지 도무지 예상이 되지 않았다. 결말이 너무 빤히 들여다 보이는 이야기는 맥이 빠지는 법이다. 그러나 저자가 이야기의 결말을 생각하고 글을 썼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때도 맥이 빠지긴 마찬가지이다. 오로지 신비로운 배경과 신비로운 인물들을 갖다 배치하는 데만 바빠 그들이 겪는 사건 자체에는 신경을 안 쓴 모양새다.


노파는 그 큰 도시에서 치매 따위에 걸려 죽은 자기 딸을 찾아 혼자 배를 타고 헤티가 사는 섬까지 왔다. 헤티는 노파를 자기의 돛단배로 그 노파의 집으로 데려다 준다. 도시에 간 헤티는 다시 섬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한다. 이러한 공간의 이동은 청소년 성장 소설의 전형이다. 익숙하던 탄생의 공간에서 낯선 곳으로의 이동은 엄마 품을 떠나 둥지 밖을 나서는 것으로서 하나의 성장을 가리킨다고 간주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간의 이동이 이뤄지는 가운데에서 헤티의 내면이 성장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저 파도에 부서질 것 같은 작은 배를 붙들고 돛을 챙기는 외면의 모습만이 전부이다. 아니면 할머니들에게 걱정을 끼치면서 지극 정성으로 낯선 노파를 돌보는 것이 성장인가? 할머니가 갖다줘도 안 먹던 밥을 알아서 챙겨먹고 노파에게도 챙겨주는 게 성장인가? 도시에서 만나게 되는 헤티가 싫어했던 노인과 이름이 같은 소년 퍼와 친밀한 관계를 맺는 것이 성장인가? 단순히 공간이 바뀌었다고 성장 소설이 되는 건 아니다. 저자가 노렸던 것은 <리버 보이>에 이은 또 다른 성장 소설이었을 것 같지만 실패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노파가 나타나기 전부터 헤티는 섬노인들과 사이가 무척 좋지 않다. 사건 이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떤 힌트도 없고 그저 무턱대고 서로를 싫어하는 모습만 보여준다. 헤티를 가장 싫어하는 퍼 노인은 얼토당토 없이 섬에 악이 몰려오고 있다는 소리를 지껄인다. 그리고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마을의 권력을 틀어쥐고자 한다. 바다유리를 통해 본 형상을 이야기하는 헤티에게 미신을 믿는다며 욕을 하지만 그가 악이 몰려온다고 하는 소리도 미신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른바 기성세대의 꼰대 같은 인물로 헤티가 싫어하는 이유도 충분히 수긍이 간다. 퍼 노인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를 앞에 두고 바위 위에 서 있던 노파에게 온갖 욕설을 퍼부어 노파가 스스로 바다에 뛰어들게 만든다. 분명 천벌을 받을 인간이지만 헤티가 밀어 넘어뜨리는 바람에 그만 목숨을 잃는다. 그런데 헤티는 그의 장례식에도 가지 않고, 그의 오른팔 격이었던 노인이 죽은 뒤에 치러진 또 다른 장례식에도 가지 않는다. 죽은 사람이 아무리 나쁜 사람이라도 그가 나 때문에 죽었다면 일반인은 뉘우치게 마련이다. 그러나 헤티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노파에 대한 걱정뿐이다. 아무래도 비현실적이다.


바다유리를 통해 미리 알게 된 인물에 대한 애착은 있을 수 있지만, 노파의 간호에 비상식적으로 집착하는 것 역시 열다섯 살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 만일 결말에서 헤티가 노파에게 집착하게 된 합당한 이유가 있었으면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치매 노인의 죽은 딸에 대한 집착, 그 딸과 닮은 외모의 소녀, 그들 사이의 알 수 없는 인연(?)이라는 이야기의 시작점이자 결말은 초반부에 그렇게도 공들여 쌓아놓은 모든 것들을 한순간에 무너뜨리고 만다. 책을 끝까지 다 읽었는데도 도대체 저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 알 수가 없다.


293페이지 셋째 줄에 오타. '침치묵' -> '침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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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w Write 장르 글쓰기 1 : SF 판타지 공포 Now Write 장르 글쓰기 1
낸시 크레스 외 지음, 로리 램슨 엮음, 지여울 옮김 / 다른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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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작가와 편집자들(작가가 아닌 듯한 인물의 글이 몇 있었다)이 네댓 페이지, 짧게는 두세 페이지에 걸쳐 초보 작가와 작가 지망생들에게 도움이 될 이야기를 들려준다. 다른 글쓰기 책들은 대부분 한두 명의 저자가 챕터 주제에 맞춰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곤 한다. 이야기가 늘어지다 보니 저자 자신의 경험 이야기가 잘 녹아든 글쓰기 책은 책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재미있는 반면 오로지 글쓰기 기술만 늘어놓은 책은 재미가 없다. (아무리 글쓰기 기술에 대한 책이라지만 내용에서는 재밌는 책을 쓰라고 야단이면서 정작 자기는 재미없게 쓰다니! 글쓰기 책도 재미가 필요하다. 재밌는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과목에 대한 호기심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이 책은 저자마다 할당된 페이지가 얼마 되지 않아 저자가 경험을 늘어놓을 여유가 거의 없다. 따라서 글쓰기 기술에 대한 이야기만 가득한데 이게 또, 쓴 사람이 무려 예순세 명이나 되다 보니 읽는 재미가 있다. 이 많은 저자들이 한 꼭지씩 집필하여 비슷한 주제 별로 모아 챕터에 따라 나뉘어 있다. 사람이 많으면 이야기도 많이 겹칠 만 하건만 정리가 잘 되어 있다. 그리고 작가들이 글을 보다 잘 쓰기 위해 자신이 자주 애용하는 연습 과제를 내주어 잘 알지도 못하는 작가들에게 친근감이 들고 글쓰기 연습에 있어서는 무척 도움이 되고 있다.

 

다음 2권은 '로맨스' 장르인데, 내가 싫어하는 장르이다. 그런데 1권을 무척 재밌게 읽을 터라 2권에서는 도대체 어떤 가르침을 줄는지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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