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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원고 ㅣ 두 번째 원고
함윤이 외 지음 / 사계절 / 2023년 1월
평점 :
어제도 처음이었고, 오늘도
처음이고, 내일도 처음일 것이다. 매 순간 아직 살아보지
못한 시간을 관통한다. ‘알 수 없음’의 복판에서 매일매일
헤맨다.
「규칙의 세계」(함윤이)에는 미신이라고
불리는 규칙과 법이라고 불리는 규칙들이 혼재한 세계에 사는 이방인들이 등장한다.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인물들은 자신들이 알고 있던 규칙뿐만 아니라 낯선 규칙까지 지키며 살아가야 하는 처지에 놓여 있다. 한국인
인물인 1인칭 화자 성준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너무
많은 규칙 속에서 잘 알지 못하는 규칙을 지키기 위해, 살기 위해 애쓴다.
살기 위해 규칙을 지키면서 예측할 수 없는 미래를 생각하고 소망한다. 그럼에도
미래는 어느 순간에 삶을 어김없이 배반한다. 「긴 하루」(박민경)의 병철은 가까운 사람들의 미래가 한순간에 뒤집히는 걸 목격했고, 자신도
그 선 위에 서 있음을 느낀다. 그가 그렸던 미래와는 다른 낯선 날들을 맞이하겠지만, 그래도 팔찌의 노란 스마일 참처럼 ‘무해한 웃음’을 짓는 순간을 맞이했으면 좋겠다.
비일상이 일상이 되고, 다시 새로운 비일상을 맞이한 인물은 「태엽은 12와 1/2바퀴」(김기태)에도 등장한다. 12바퀴만 돌리면 충분히 감겼던 태엽이 모르는 사이
반 바퀴를 더 감아야 톱니에 걸리게 되었듯이 주인공과 그가 운영하는 게스트하우스도 흘러가는 시간에 조금씩 늘어진다. 세월이 꽤 많이 지났다는 사실을 깨닫는 비일상적인 일도 일어나지만, 그는
새로움을 꿈꿀 시간이 남아 있다고 느낀다. 마치 “높다란
파도들이 정연한 주름을 이루”고 있을지라도 계속해서 밀려오는 것처럼 말이다.
‘알 수 없음’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모르거나 알면서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경우도 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들이 공연히
호들갑을”(「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 떤다고, 자기 생각만 옳다고 여기며 이를 기준으로 알지 못하는 타인을 재단하는 건 폭력이 되기도 한다. 「알리바이 성립에 도움이 되는 현대문학 강의」(임현석)의 주인공은 자신의 문학적 사상을 잣대로 진영을 ‘교화’하려 했다고 말하면서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고자 하는 욕망을 뒤로 숨기려고 한다. 어쩌면 각자가 지닌 고유의 세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태도가 결여된 그의 모습에서 진영은 그 욕망을 목격하고
만 것인지도 모르겠다.
「꿈과 광기의 왕국」(유주현)의 윤
여사 역시 구시대적인 사고방식으로 마을에 새로 온 사람들에게 훈계를 늘어놓는다. 그는 자기가 가부장제의
피해자임을 인식하지 못한 채 올바른 여성으로 살았다는 우월감에 빠져 있다. 윤 여사는 교장이었던 남편이
은퇴한 후에는 남편의 명함 대신 변호사 딸의 명함을 사람들에게 주고 다니는데, ‘언덕 집’에 새로 이사 온 혼자 사는 여성이 딸의 명함을 함부로 대하는 장면을 통해 가족에게서 비롯된 우월감이 더는 유효하지
않은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윤 여사는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계속해서
다음 세대에게도 자신과 같이 살아야 한다고 압박하고 그들을 비극으로 몰아가기도 한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이 살았던 ‘언덕 집’이 문제라고 숙덕임으로써 자신들이
가한 폭력을 모르는 척 외면한다.
‘알 수 없음’으로 점철된
삶을 살면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글을 쓰는 사람들이 있다. 이 앤솔러지에 참여한 작가들 역시 2022년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들의 작품을 모은 책이 기획될 것이며 스무 명이 넘는 작가 중 자기 작품이 거기에
실리게 될 미래를 몰랐을 것이다. 책의 말미에는 추천사 대신 손보미 작가님의 짧은 에세이가 실려 있다. 갓 등단한 신인 작가나 등단한 지 10년도 넘은 작가나 미래를 알
수 없다는 건 마찬가지라고, 그러니 계속 쓰라고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그냥 우리한테 와. 네가 우리를 보호할 테니까, 우리도 너를 책임질 거야.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39
아주 낯선 나라에서 온 사물이 어느 순간 타지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셈이지. 자기만을 부르는 글자까지 생긴 거잖아. 그 점이 좋아서 이 이름을 쓰고 싶었어. 어디서나 이름은 아주 큰 힘을 발휘하니까. 사실상 가장 강한 부적이지. (함윤이 「규칙의 세계」 中) - P41
결국 글쓰기란 내 안에 어떤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일. 나를 쉼 없이 들여다보려는 태도이자 그해 혹은 그 순간 내가 몸담고 있는 세계를 확장하며 돌이켜보는 일. (임현석 에세이 「내 안의 세계를 존중하는 방식」 中) - P92
무지개 너머 아름다운 어딘가란 결국 허상이야. 그걸 깨닫지 못하면 비극뿐이고. (유주현 「꿈과 광기의 왕국」 中) - P108
언제부턴가 그저 연결음이 이어진다는 것에 위안을 느끼게 되었다. 그럼 적어도 살아는 있다는 거니까. 살아만 있으면 언젠가 또 볼 수 있다는 거니까. 세상엔 그런 식으로 확인되는 안부도 생사도 있는 것이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40
병철은 다시는 자신이 알고 있던 우란을 만날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건 슬픔이라기보다는 열패감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박민경 「긴 하루」 中) - P156
돌아보면 우스운 일이 있었고 울적한 일이 있었다. 정말 있었을까 싶은 일들과 정말 없었을까 싶은 일들, 이제는 물어볼 사람이 없는 일들이 있었다. (김기태 「태엽은 12와 1/2바퀴」 中) - P198
소설은 내 삶의 일부였다. 그건 소설이, 소설을 쓰는 행위가 언제나 나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것에 실망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리고 아무리 실망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소설 쓰는 행위를, 내 삶에서 그저 떨구어낼 수 없을 것이다. (손보미 에세이 「내 삶의 일부」 中) - P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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