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방 - 나를 기다리는 미술
이은화 지음 / 아트북스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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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보고 나면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은은한 행복으로 가득 찬다. 그동안 쌓였던 스트레스와 심리적 피로가 잠시나마 저 멀리 물러나 나를 괴롭히지 못한다. 미술은 나에게 정신적 쉼터인 셈이다. 하지만 시국도 시국인데다가 복학까지 해서 어딘가를 가기 힘들어졌다. 전시에 대한 갈증이 커지던 차에 출판사에서 이 책을 보내주셨다.


추상화의 아버지라 불리는 바실리 칸딘스키보다 먼저 추상화를 그리기 시작했지만 여성이라는 이유로 미술사에서 이름이 지워진 힐마 아프 클린트, 그녀의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리고 마치 애니메이션 스틸컷처럼 느껴지기도 할 만큼 독창적인 화풍을 구사한 앙리 루소와 고흐, 마네 등 유명한 이름들도 거쳐서, 조지 프레더릭 와츠의 희망을 주는 그림으로 끝이 난다.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을 정도로 유명한 미술가, 미술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못하지만 좋은 작품을 남긴 미술가, 현재 활동하고 있는 미술가까지. 저자는 특정 시대나 사조에 국한하지 않고 다양한 작품을 독자에게 소개한다.


알지 못했던 새로운 취향을 찾을 수도 있고, 무심코 지나쳤던 명화의 뒷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다.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의 〈회색과 검은색의 배열 제1〉은 꽤 오랜 시간 내 카톡 프로필 이미지로 사용했던 작품이라 마주쳤을 때 많이 반갑기도 했지만, 동시에 작품의 의미도 모르고 프로필에 걸어놓았던 게 조금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디트 그림은 워낙 유명해서 여기저기서 자주 봤었다. 하지만 성폭행에 대한 복수인 줄은 몰랐다. 악과 부조리에 굴하지 않고 가해자를 평생 가해자로 기억되게 만든 화가로서의 아이디어와 용기가 멋있었다. 현대 사회를 살아가고 있는 여성으로서 그런 선택을 한 젠틸레스키에게 감사하다.


* 본 리뷰는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작성되었습니다.


역사에서 ‘최초’는 중요하다. 최초로 이룬 자들만이 기록되기 때문이다. 아프 클린트가 칸딘스키보다 5년 앞서 추상화를 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상 서양미술사는 새로 쓰여야할 것 같다. 최초의 추상화가는 칸딘스키가 아닌 아프 클린트였으며, 그림을 이젤이 아닌 바닥에 놓고 그린 혁신적 시도 역시 잭슨 폴록보다 최소 40년은 앞섰다고. (「힐마 아프 클린트」) - P17

감상자를 혼란에 빠뜨리는 이 마법 같은 그림은 우리 눈의 한계뿐 아니라 인식의 한계를 재고하게 만든다. 눈에 보이는 게 진짜가 아닐 수 있다고 경고하는 것이다. 어쩌면 화가는 그림의 뒷면을 통해 진실은 언제나 현상의 이면에 감춰져 있으니 통찰의 눈을 길러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진실을 알려고 하기보다는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많으니까. (「코르넬리스 N. 헤이스브레흐츠」) - P20

이 그림 속 유디트의 얼굴은 누가 봐도 젠틸레스키의 자화상이다. 그렇다면 살해당하는 적장은 강간범 타시일 것이다. 유디트는 적장인 홀로페르네스에게 몸을 바치는 척 유혹한 후 그의 목을 베어 민족을 구한 이스라엘의 영웅이다. 젠틸레스키는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에 이 주제를 처음 그리기 시작했고, 몇 년 후에도 여러 버전으로 반복해 그렸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여전히 끔찍한 기억으로 남아 있는 자신의 상처와 타시의 범죄 사실을 그렇게 해서라도 지속적으로 세상에 알린 것은 아니었을까.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 P124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라고 한다면 전 세계 미술관에서 퇴출당할 명화들이 얼마나 많겠느냐고 반문하는 이도 있을 테다. 그러나 설령 논쟁이 되더라도 과거의 작품을 현재의 관점으로 다시 바라보고 재평가하려던 미술관의 시도는 분명히 유의미하다. 역사 속 사건이나 인물이 현재에 재평가되듯, 미술가나 작품도 사회적 변화에 따라 재조명되거나 재평가받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 - P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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