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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사랑 - 언젠가 너로 인해 울게 될 것을 알지만
정현주 지음 / 중앙books(중앙북스) / 2020년 9월
평점 :
베스트셀러 에세이였는데 이번에 다시 나온 걸로 알고 있다.
그때는 못 읽었는데 이번에는 다행히 기회가 닿아 읽게 됐다.
...사람이 너무 힘들면 잠도 안오고 밥도 안 먹고(혹은 너무 많이 먹거나) 안 씻고 안 움직이게 (혹은 너무 돌아다니게) 되는데, 나에게는 이런 증상들 추가가 되는 증상들 하나가 책과 영화를 아예 못 읽고 못 보게 된다는 점이다. 심지어 만화책조차도. 그래서 무언가 골치가 아플 때면 늘 재밌는 시트콤이나 예능 프로를 보고 또 보고를 골백번 반복하는데, 그렇게 하다보면 마치 하루종일 야동만 본 사람마냥 머리에 똥만 찬 느낌이 가득한 상태에서 여전히 집중도가 최하인 상태를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럴 때 읽으면 그 혼돈에서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게 도와준다.
...그러니까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기준이지만,
다시 책 읽고 영화를 볼 수 있게 도와준다.
냉정하게 얘기하자면 사실 나는 이런 타입의 에세이에 익숙하지 않아서 무조건 강력 추천!이라고 말하기에는 조금 망설여진다.
그러나 최근 이러저러한 일들로 언젠가부터 다시 넷플릭스의 <스페이스포스>를 틀어놓은채 멍하니 수천번을 반복해서 보고 있는 나자신을 보면서, 어라라라라 이거이거 큰일나겠네, 했는데 아무것도 집중이 안되던 터에 이 책을 조금씩 읽으면서 넷플릭스를 내려놓고 다시 다른 책들을,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책 표지도, 디자인도, 일러스트도 다 정성을 많이 들였다는 게 티가 난다.
'그녀의 일기장'과 '그의 일기장'의 글들이 짧막하게 교차로 나오며 그 다음에 영화나 미드, 책이나 노래에 대한 저자의 생각이 한두장씩 짧막하게 이어진다. 그 중에는 내가 아는 작품들도 있고 모르는 작품들도 있었는데, <무탄트 메시지>나 <달팽이의 별>은 한번 직접 읽고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다큐멘터리 <달팽이의 별>은 볼 수 있는 방법이 없더라. 네이버에도 없고 넷플릭스에도 없다)
책을 읽었을 때 한 번 잉?하고 갸우뚱한 적이 있었는데, 바로 p75에서 "이별을 앞둔 경우라면 보통 '더 잘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고 적었을텐데"라는 부분이었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이별 과정에서 차는 역할을 맡은 사람이지. 이미 마음 정리가 다 끝났으니까.
그런데 차인 사람 입장에서는 저얼대로 '더 잘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해 미안하다'라고 말 못한다.
음.. 그리고 늦은 퇴근길에서 편의점 앞에 앉아 캔맥주 마시고 있는데 모르는 아줌마가 와서 안아주었던 에피소드는, 책의 말미에 나오는데 나도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어서 잊고 있었던 여러가지가 떠올랐다.
누군가 나에게 살면서 따뜻했던 기억을 말해보라, 라고 하면 분명 베스트 10 안에 들어갈 만한 일이었는데, 완벽하게 잊고 있었다. 그런데 이 부분을 읽으면서 다시 한번 그 때 일이 떠올랐고, 우중충했던 무언가에서 다시 걸어나올 수가 있었다.
그때 나는 일로 외국에 나가 있었고, 러시아어는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 알겠습니다"밖에 할 줄 몰랐다. 일터의 주 외국어는 영어였기 때문에 크게 상관이 없었지만 현지어는 아니니 당연히 여기저기 고충이 많았고, 한국 사람이라 덕을 보는 경우도 있었지만 손해를 보는 일도 많았다.
꿈에 그리던 직장에 취직해 파견된지 6개월도 안된 어느 날, 나는 집 건물에 들어가자마자 울기 시작했다. 그 작은 5층짜리 건물에 10가구가 전부인 곳에서, 그리고 유일한 외국인으로서 살았는데 - 건물을 청소하시는 할머니가 계셨다. 늘 오다가다 "안녕하세요, 고맙습니다"인사만 하던 분이었는데 그 날은 내가 서럽게 울고 있었는데 그 건물을 청소하시는 할머니가 조용히 오시더니 - 울고 있는 나를 이 책에 나오는 아줌마처럼 나를 끌어안고 안아주셨다.
나는 그렇게 따뜻한 포옹은 그때 처음 받아봤다. 한 손으로 등을 쓸어주시면서, 다른 한 손으로는 머리를 쓰담어 주시면서 계속 무어라 말씀하시면서 안아주셨다. 하나도 못 알아듣겠는데 동시에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있는 희한하고도 아름다운 경험이었다.
...왜 그 기억을 잊고 있었을까.
간혹 기도도 운동도 밥도 잠도 안 오고 계속 멍하게만 있게 된다면,
한번쯤 조용히 읽어 그 어둠 속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기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