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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둥의 궤적
리베카 로언호스 지음, 황소연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9월
평점 :
절판
미드로 나와도 좋을 것 같다.
읽으면서 미드로 만들려면 화이트 워싱 논란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 책 분위기에 어울리는 아메리칸 인디언 배우들을 캐스팅해야 할텐데, 도무지 떠오르는 배우들이 없어서 결국 남자 주인공 카이는 우리나라 남자배우 김수현으로, 키 180cm의 괴물사냥꾼 여자 주인공은 - 싸우러 태어난 여자라는 뜻의 "치아바나"라고 사랑하는 불사신이자 신화 속 영웅인 스승에게 불렸던 우리의 매기 호스키는 - 결국 책을 끝날 때까지 어울리는 배우가 생각나지 않아서 조금 더 건장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를 떠올렸다. <천둥의 궤적>은 <여섯 번째 세상> 시리즈 중 첫번째 책이라고 하는데, 흥미진진한 시즌 1을 본 기분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재밌다.
영화 <윈드 리버>와 같은 배경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노노케 히메> 분위기와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모든 신들과 영웅들이, "다섯번째 홍수"로 망해버린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적절히 섞여 있다. 이렇게 말하면 뭐 이런 어지러운 짬뽕같은 설정이야, 할텐데, 아니다. 재밌어. 원래는 외출할 계획이었는데 취소하고 그냥 앉은 자리에서 화장실 3번 가고 다 읽었다.
작가의 특이하고 특별한 성장 배경과 종교학-신학-법학-변호사 그리고 작가로 돌아서게 된 인생 덕분인지, 이 책에서는 매우 리얼한 아메리칸 원주민 나바호의 신화와 전설, 그리고 그 속에 나오는 모든 신들과 영웅들이 세상에 일어난 "다섯번째 홍수"로 인해 책으로만 남아 있지 않고 실제로 인간들이 사는 현실에 등장해서 모두 함께 공존하는 세상이 된다. 그리고 신과 영웅이 등장했으면, 괴물과 망령의 등장도 당연한거라, 마법과 괴물 사냥꾼도 등장. 두둥.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상을 많이 타서 오히려 반신반의하면서 책을 읽었는데 다 읽고 나니, 오, 상 받을만 하네, 싶다. 작가의 개인적인 삶이 작품에 많이 녹아 있는데 그게 과하지 않고 오히려 독특한 정체성을 만들어 흥미진진한 환타지 소설을 만들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작가의 성장 배경이 소설 속에 적절히 녹여 있으면서도 - 작가는 미국 흑인 아버지와 아메리칸 원주민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백인 가정에 입양되어 백인들이 다수 사는 곳에서 (그것도 텍사스에서!!!) 자라났다. 대학에서 종교학과 신학을 전공했던데 나중에 로스쿨에 들어가서 변호사로 일하다가 결국 작가로 전업.
처음에는 생소한 단어들이 나와서 집중하기가 조금 힘들었다. 영어나 한자라면 어느 정도 어원 파악이라도 가능할텐데, 아메리칸 원주민들의 전설과 신화 이야기다 보니 단어가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인간을 뜻하는 "다섯 손가락"이나 세상 만물을 창조한 "변화하는 여인"이라는 신까지는 좋았는데, 그 다음에 등장하는 단어들은 따로 기억까지 해야할 정도로 - 처음에는 약간 버거웠다. 예를 들어 나바호인을 뜻하는 "디네", 이들이 부르는 백인은 "빌라가나"나, 신성한 사람들을 뜻한다는 "디인 디네"부터 "비케아예이", "예이 나알들루시", "쎄나예이", "호나가하나", "클랜 파워"라는 "카하나아니", 나바호 족의 땅 "디네타"...
다행히 이야기가 재미있고 흐름이 흐트러지지 않아서 50페이지 정도 지나니까 헷갈리지 않았지만.
인류가 멸망하는 "다섯 번째 홍수"가 일어난다.
홍수가 일어나기 전에 이미 20억명의 사람들이 버티지 못해 사라졌고, 홍수가 일어난 후에는 수 억명이 더 없어졌다. 그리고 그로 인한 기후 이변으로 육지 상당수가 물, 기름 등과 같은 자원 각축전을 벌이고 있고, 이로 인해 전세계가 멸망 직전. 하지만 홍수는 단순한 기후 이변이 아니라, 아메리칸 원주민 나바호 족의 전설 속의 신, 영웅, 괴물이 현재에 등장하기 위한 일어난 "다섯번째 홍수"로 이제 이 세상에는 실제로 신들과 영웅과 괴물이 공존하는 세상이 되고 만다.
여기서 이 책의 주인공 매기 호스키는 180cm의 여자인간으로서 괴물사냥꾼이라고 불린다. 괴물들을 물리칠 수 있는 특별한 능력인 "클랜 파워"라는 것이 있고, 스승인 불사신 "네이즈가니"에게 어린 아이였을 때 구해져서 함께 괴물을 사냥하고 있다. 네이즈가니는 세상을 창조한 여신 "변화하는 여인"과 태양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로, 불사신이다. 그리고 전설 속에 등장하는 영웅이다.
그런데 어느 날 이 스승이 아무 말 없이 그냥 사라진다.
문자 그대로 그냥 버림받은 것.
그리고 갑자기 이해할 수 없는, 나쁜 마법으로 만든 새로운 괴물들이 등장하기 시작해 사람을 학살하기 시작하고,
안그래도 아메리칸 원주민들에게 적대적인 사람들은 더 적대적이 되고 (경찰인 "법개"는 영화 <윈드리버>를 떠올리게 한다) 사람들은 괴물 사냥꾼인 매기의 힘을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두려워한다. 이 와중에도 물과 기름을 움켜준 자들은 부자가 되고 권력을 쥐고 있고, 에너지 전쟁을 계속되고 있다. 커피와 설탕이 어마무시하게 소중한 세상이 되었다.
이런 세상에서 "클랜 파워"라는 마법/초능력 비슷한 능력이 있다면 자기 자신을 보호할 수 있으니 나라면 자신감이 넘칠 것 같은데, 이 책에 나오는 주인공은 오히려 능력을 쓸 때마다 살해 충동과 희열을 동시에 느끼는 감정도가 거세지기 시작해 점점 자신이 괴물과 같다며 괴로워하고 능력을 쓰기 주저한다. 게다가 유일하게 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스승이자 불사신이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떠나자 - 그리고 버림받았다는 확신이 들자 - 그런 자기 학대와 혐오감이 점점 더 심해진다.
그런 주인공이 타흐라는 할아버지와 그 손자인 카이를 만나면서 변화하고 갈등하는 모습도 잘 묘사되어 있어 재미있었다. (개인적으로 조금 더 로맨스가 부각되었으면 좋았을텐데 - 아마 두번째 책에는 조금 더 로맨스가 많이 나오겠지?)
아메리칸 원주민의 신화와 전설도 있지만, 미국이 원주민들에게 행한 잔혹한 역사도 책을 읽으면서 조금씩 함께 알게 되어 좋은 역사 공부도 된다.
가령 "악한"이라는 단어에 대해서도 그냥 소설 속에 나오는 신들이나 영웅, 괴물사냥꾼이나 치유사들의 단어가 아니라, 실제 19세기 중반에 미국 정부가 아메리칸 원주민 부족들 사이에 이루어진 조약에 나온 단어라는 것도. 그 "조약에는 정부가 "백인 중에 악한(Bad Men)"이 저지른 손해에 대해 배상한다는 항복이 있(는데), 2009년에야 첫 사례가 법정에서 인정되었다"는 사실같은.
로키와 같은 신인 마이- 코요테도 등장하고, 나름 여러 반전이 존재해서 꼭 환타지 소설을 즐기는 독자가 아니더라도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책에 나왔던 "튀김빵"이 먹고 싶어졌다.
책에서 보니까 "밀가루 반죽을 돼지비계 기름에 튀긴 뒤 꿀이나 잼을 발라 먹는 빵"이라고 하는데 - 어쩐지, 맛있을 것 같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