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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으로부터의 사색 - 피지스 인문학
이원희 지음 / 지식과감성# / 2020년 6월
평점 :
이 책을 읽고 싶다고 한 이유는 얼마 전 귀농귀촌의 일환으로 농촌 일을 체험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만 살았던 나는 귀농과 귀촌의 차이도 모를 정도로 “도시 촌년”이라 여행으로 산과 바다를 가는 것과 일로써 자연을 체험하는 건 분명 다르다는 걸 - 머리로는 알아도 마음으로는 알 수 없었다. 그냥 막연히 이러이러하겠지, 하는 얄팍한 추측이 전부였다. 그러나 농촌 일을 하게 되면서 칼 자르듯 나눠질 듯 한 두 개의 자연 체험은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교집합이 되는 부분이 있었다.
나는 그 교집합이 되는 감성을 이 책을 통해서 공감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쉽게도 내 기대와는 다른 책이었다. 책 소개와 목차를 보고 “자연으로부터의 사색”을 담은 체험 에세이인 줄 알았으나 이 책은 저자가 선택한 30개의 자연 대상에 대한 논술집에 가까웠다.

서문과 1부, 2부와 끝맺음 글 이렇게 총 4가지 부분을 약 380여 페이지에 다루고 있다.
1부는 약 25페이지로, 저자가 밝히듯이 “자연 사색에 대한 총론이다. 왜 이런 작업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필연성을 강조했다”.
2부는 저자가 선택한 자연 대상 30개 - 꽃, 나무, 산, 물, 새, 불 등 - 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이다. 신화, 우화, 문학, 철학 등에 나타난 자연 담론과 해석을 밑감 삼아 대상물질에서 발굴한 정신과 의미를 집결해 논술의 보폭을 맞췄다”라고 설명한다. 30개의 자연 대상을 각각 약 20페이지 정도의 글을 써서 묶어 냈다.

1부에서 저자는 자신이 이 책을 쓰려는 이유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는데, 그 중 일부를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관성적인 생각을 단절하고 새로운 자세로 삶의 방식을 전환하려면 자연의 언어에 귀 기울여야 한다. 자연은 본성이고 인간의 모태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말로 하면 규범이나 관습인 노모스(nomos)는 있는 그대로의 참된 것 즉 자연이라는 뜻인 피지스(physis)에서 끌어왔다. 오늘날 삶이 피로하게 된 데는 근원인 피지스를 무시해서 그렇다. 한마디로 인간이 자연을 저버리고 제 욕망추구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그럴수록 참된 삶의 즐거움을 맛보기는 어렵다. 자연으로부터 멀리 벗어났다는 말은 그 만큼 ‘내 안에 있는 진실’로부터 달아났음을 의미한다.”
조금 더 앞선 부분에서는 “자연은 인간이 자행한 흑역사라고 했듯이, 인류의 역사는 자연의 학대와 무차별적인 살해의 역사다. 그 결과는 재난과 인간성 파괴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깨달아야 한다. 지구에서 인간 홀로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간만이 독존적 종이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자연이 있기에 인간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안다. 그러나 자연이 인간 바깥에 존재하는 객관적 타자가 결코 아님을 잘 모른다”라며 인간의 무지를 지적하며 자연에 대해 제대로 알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저자가 나열한 30개의 자연 대상 중 개인적으로 관심이 갔던 분야는 “불”이었다. 빨간색을 좋아하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불에 대한 신화나 종교 등에서 나타나는 상징성에 관심이 많아 혼자 여기저기 알아보기도 했던 터라 저자가 불에 대해 무얼 알려주는지 궁금했다.

저자가 불에 대해 이야기하는 20여 페이지를 간략하게 줄이면 다음과 같다.

불은 “생명과 문명의 씨앗, 정화와 재생”을 상징한다는 것.
자연의 불은 제1의 불,
전기로 발생하는 제2의 불,
원자력 시대는 제3의 불이라는 것.
문명의 역사는 불의 역사라는 것.

“어둠의 철학자로 불리는 헤라클레이토스는(이 철학자가 누구인지, 왜 “어둠의 철학자”로 불리는지 설명이 있었으면 더 좋았을텐데,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불이 만물의 근원이라고 했다. 그가 불을 만물의 근원이라고 본 이유는 불은 물처럼 창조와 파괴의 두 힘을 동시에 지녔기 때문이다”, 라며 불을 물과 같은 성질의 자연임을 강조한다.
이와 비슷한 시기의 또다른 철학자 엠페도클레스에 따르면 (또 이 사람이 누구인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우주는 필리아philia와 네이코스neikos라는 두 힘으로 운행”되는데, 이러한 원리가 “우주 패권을 장악한다고” 보았다. 여기서 필리아는 사랑이고 네이코스는 파괴인데, 이런 모순적인 대립이 모든 신화나 종교에서 우주의 운행 법칙으로 나오며 그 필연적인 힘의 대결이 불을 생성한다고 설명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물질이다”라고 말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시골 체험 에세이로 기대했었던 나에게는 너무 다른 내용들이라 당황스러웠다. 저자가 독자층을 어디로 겨냥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방대한 자연에 대한 이야기들을 조금 더 쉽고 편안하게 썼어도 더 좋았을 거라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글을 쓰는 어려움을 모르지 않는 사람 입장에서 단 하나의 정보도 생각도 의미도 책에서 배제시키고 싶지 않았던 저자의 마음 또한 이해한다.
추신:
너무하다 싶을 정도로 단란한 책 겉표지는 그래도 어떻게 수긍은 하겠는데, 그 단란한 겉표지가 유일한 칼라 프린트라는 건... 책 내부는 모두 빡빡한 흑백이다. 심지어 목차에도 제목에도 칼라는 없다. “자연으로부터의 사색”이라면서 사진 한 장도 없는 부분 역시 아쉽다.

추신2:
이 책이 전라북도문화관광재단 2020 지역문화예술육성지원사업의 지원을 받아 발간했다는 설명을 읽었다. 요즘 지자체에서 책과 관련된 분야로 이런 지원 사업을 많이 하는 것 같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