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장바구니담기


양파 볶는 냄새는 세상의 모든 냄새를 담고 있다. 어둠과 그늘, 절벽의 햇살, 꽃잎이 짓이기며 빨아대는 습기, 간절한 한 사람의 안부, 그 모든 것을 담았다.
허기에 지쳐 집에 돌아오면 뭘 먹을 것인지 정하지도 않았으면서 양파를 볶던 때가 있었다. 먼 곳에서 긴 시간을 처절하게 살 때였다. 양파를 볶다가 소시지를 넣어 뒤적거리거나, 양파를 볶다가 물을 붓고 스파게티 면을 끓이기도 했다. 양파를 볶다가 부자가 되어야겠단 생각도 했고 양파를 볶다가 불을 끄고 시를 읽은 적도 있다. 그러면 채우는 느낌과 바닥을 내는 느낌이 내 몸에 동시에 베어들었다. 공간을 가득 채운 양파의 그것에는 그리운 냄새가 있었다. 절절한 곡예가 있다.-9#쪽

평범이란 말보다 큰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평범한 것처럼 남에게 폐가 되지 않고 들썩이지 않고 점잖으며 순하고 착한 무엇이 또 있을까.-21#쪽

나는 이야기에 약하다. 이야기에 무너진다. 그래서 엿보고 엿듣고, 내 여행은 어쩌면 당신의 그런 일들을 받아 적는, 기록인 것이다.-24#쪽

누군가가 네가 없는 너의 빈집에 들러 너의 모든 짐짝들을 다 들어냈다고 해도 너는 네가 가져온 새로운 것들을 채우면 될 터이니 큰일이 아닐 것이다. 흙도 비가 내린 후에 더 굳어져 인자한 땅이 되듯 너의 빈집도 네가 없는 사이 더 견고해져 너를 받아들일 것이다. 형편없는 상태의 네 빈집과 잔뜩 헝클어진 채로 돌아온 네가 서로 껴안는 것, 그게 여행이니까.-26#쪽

어떤 카페가 좋아 자주 드나들게 되었는데 알고보니 카페 기둥에 흰색 페인트를, 화장실 문에 흰색 페인트를 칠해놓은 게 마음에 들었던 거다. 사실 그 색이 좋아 카페의 분위기가 좋고 심지어 커피맛도, 주인장의 얼굴까지도 좋다고 느낄 수 있는 것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아주 사소한 부분들을 쌓아가는 것이다.
고로 당신이 좋다, 라는 말은 당신이 무슨 색인지 알고 싶다는 말이며 그 색깔을 나에게 조금이나마 나눠달라는 말이다. 그 색에 섞이겠다는 말이다.-29#쪽

낯선 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배우게 되는 말은 '물'인 것 같다. 그 다음은 '고맙다'라는 말. '물'은 나를 위한 말이고 '고맙다'라는 말은 누군가를 위한 말. 목말라서 죽을 것 같은 상태도 싫고 누군가와 눈빛도 나누지 않는 여행자가 되기는 싫다.-31#쪽

사람을 좋아하는 일은 그러네요. 내가 그 사람에게 어떻게 보이느냐의 '상태'를 자꾸자꾸 신경 쓰게 되는 것.
문득 갑자기 찾아오는 거드라구요. 가슴에 쿵 하고 돌 하나를 얹는 기분.-39#쪽

들뜬 기분들을 차분히 누를 수 있다면, 얹힌 기분들을 잠시 정리할 수 있다면 그곳이 어느 곳이든 무조건 잠시 앉아 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44#쪽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름바 2012-09-30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외로움을 채우기 위해서이거나 그 외로움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기 위해서.. 어디론가 떠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