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딘가의 지도를 보고 있으면 시간이 가는 것을 잠시 잊었다. 세상의 모든 도시는 손가락에 새겨진 지문처럼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5쪽
하지만 무엇보다도 나는 일상에 대고 리모컨을 눌러 문득 다른 채널로 옮기듯이 갑작스럽게 어디론가 떠나는 걸 좋아했다.그 어딘가가 조금은 익숙한 곳이든, 아예 낯선 곳이든 상관없이 가끔씩은 머리 위 하늘을 바꿔 잠드는 것을 좋아했다. 그리고 그 낯선 도시가 간직하고 있는 은밀한 사연들을 엿보거나 상상하는 것이 즐거웠다.-8쪽
라스베이거스는 인간의 욕망과 건축적 결과물이 가장 노골적으로 관계를 맺는 도시다. 문득 비행기 표를 지르고 잠시 그곳에서 휴가를 보내기로 한 이유다.-20쪽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지만 사실은 절대 주인공이 될 수 없는 도시. 그곳은 낯설다. 현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곳은 천국처럼 낯설다.-96쪽
대부분의 사람들은 모른다. 지금의 천국은 딱 라스베이거스처럼 생겼을 거라는 사실을.-112쪽
적당히 괜찮아 보이는 지저분한 식당에 들어가 백반 세트와도 같은 탈리를 시켰다. 네 가지 정도의 향기로운 요리들과 함께 막 구운 로띠와 쌀밥이 나왔다. 손도 씻지 않고 과감하게 먹는 게 예의일 것 같아서, 분명 억겹의 세균이 붙어 있을 오른손으로 카레 국물을 밥에 부어 비벼 먹었다. 조금 후 같은 테이블에 합석한 인도 청년을 손을 깨끗이 씻고 와서 밥을 비벼 먹었다.-144쪽
세상은 먼저 걱정해주는 사람들에 의해 나름대로 편하게 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누가 더 느긋할 수 있는지가 인생의 피곤함을 결정한다. 가령 인도의 대혼란 속에서 나와 비슷한 처지인 것 같은 사람이 있다면 일단 한 발짝 떨어져 그를 믿고 기다려보는 것이다. 그는 바쁘게 이곳저곳으로 움직이며 내가 궁금해 하는 것들에 대하여 답을 찾아주고는 한다.-173쪽
어느 시인이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가보세요. 우와, 그곳을 좋아할 거예요." 그래서 그곳에 가기로 했다.-242쪽
벌어지는 사건의 종류만 다를 뿐 나를 비롯한 또래들의 삶은 비슷한 편이었다. 기쁜 순간이 잠시 있고 슬픈 순간은 가끔 있고 우울한 순간은 자주 있고 힘든 순간은, 순간이라고 표현하기에는 뭔가 다른 단어가 필요할 것 같은, 가령 '날'이나 '시기'라는 말이 어울릴 것 같은 그런 시간들이 삶을 지배하고 있는 삼십 대 중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290쪽
세상의 모든 도시들 역시 수많은 시행착오의 결과물이었다. 지나간 시간의 흔적과 상처들이 도시의 구석구석에 새겨져 있었다.-3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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