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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 - 증보판 ㅣ 리라이팅 클래식 1
고미숙 지음 / 그린비 / 2003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박지원의 ‘열하일기’는 북벌론과 북학론이 대립하고 갈등하던 조선 후기, 청 황제의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로 따라나선 연암 박지원이 연행의 과정에서 보고 겪었던 일들을 서술한 일종의 기행문이다. 이 시기는 중세가 쇠퇴하고 중세 이후의 새로운 사유와 삶의 방식이 부상하여, 중세와 병존하고 중첩되고 갈등하고 길항하던 시기였고, ‘열하일기’에 담긴 북학론의 주제의식과 이용후생의 실학사상은 이 저작을 근대적 사유를 담은 고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고미숙의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박지원과 열하일기에 대한 열렬한 흠모를 바탕으로 열하일기를 새롭게 써내려간 책이다. 이 책은 고전을 새롭게 쓴다는 ‘리라이팅클래식’이라는 기획의 첫 번째 책으로, 열하일기라는 고전을 현대어로 바꾸고 해설한 단순한 해설서가 아니라 저자인 고미숙과 고미숙이 기대고 있는 들뢰즈/가타리의 유목(노마드)의 개념틀이 한데 뒤섞여 새롭게 쓰여진 또다른 열하일기라고 할 수 있다.
책에는 박지원이라는 주자학과 소중화주의에 사로잡혀 있던 중세의 외부를 사유하고, 살았던 거인이 등장하며, 또 그가 보고 겪었던 일들을 새로운 사유와 감각과 문체로 기록한 열하일기가 등장하고, 또 탈근대의 철학과 삶을 설파하는 들뢰즈/가타리의 사유가 등장하고, 박지원과 열하일기와 들뢰즈/가타리에 매료되어 그것들을 연결하고 계열화하는 기계 고미숙이 등장한다.
박지원과 열하일기는 그 자체로도 조선사회에서 이질적이며 돌출된 텍스트이면서, 고미숙과 들뢰즈/가타리에 의해 오래전 그곳에 살았던 옛날 사람과 옛날 얘기가 아닌, 지금 여기 우리의 삶과 사유에 신선한 자극을 주는 초현대적인 텍스트로 살아난다.
고미숙은 박지원과 열하일기를 당대 조선의 지배적인 배치로부터 이탈한 특이점으로 설명한다. 박지원은 주자학공부를 하고 과거시험을 통해 입신양명의 길을 가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의 정형화된 코스를 거부하고, 빠져나가며 새로운 사유방식과 삶을 모색한다. 또 소중화주의에 매몰되어 드높은 관념의 세계속에서 허우적대던 당대의 지배적 담론에 배치되는 이용후생과 북학론을 담은 열하일기는 단순한 여행자로서 보고 겪은 일들을 서술한 것이 아니라, 낯선 문물과 사람들과의 마주침을 통해서 촉발되고 생성된 새로운 사유와 삶의 변이들이 닯겨 있다. 또 책은 유목, 배치, 리좀 등의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적 개념들이 무시로 출몰하며 박지원과 열하일기의 재해석을 통한 대중적인 철학서의 역할도 한다. 실로 열하일기는 들뢰즈/가타리의 철학을 설명하는 데 더할 나위없는 텍스트가 되어준다.
고미숙은 시종 박지원과 열하일기와 유목이라는 철학적 개념을 접합시키고, 박지원을 얘기하고 열하일기를 얘기하며 들뢰즈/가타리를 얘기한다. 또 고미숙이라는 기계는 박지원과 열하일기, 들뢰즈/가타리의 배치속에서 생생하게 살아 움직인다. 이러한 배치는 사실과 허구, 저자의 경계가 불분명했던 이 책의 주텍스트인 열하일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각각이 상호교통하고 접속을 통해 새로운 텍스트를 창출하면서도 또 독자적인 모습을 잃지 않는다.
저자는 박지원과 열하일기가 중세의 고루하고 화석화되었던 관념적 사유와 문체에 반기를 들었던 것처럼, 기존의 학술적이고 건조한 문체를 버리고 정제되지 않은 살아있는 입말로 박지원과 열하일기와 들뢰즈/가타리에 대한 열렬한 흠모와 자신의 삶에 대한 무한한 열정을 표현하고 있다.
이렇게 다시 쓰여진 ‘열하일기, 웃음과 역설의 유쾌한 시공간’은 열하일기라는 고전과 현대철학이 접합되고, 박지원이라는 조선 중세의 인물과 들뢰즈/가타리라는 현대 프랑스의 철학자들, 또 그들을 매개한 고미숙이라는 기계가 만나서 발생하였다. 즉 각각의 경계가 있는 듯 없는 듯 하며, 그 어느것 하나로 환원해서 설명하는 것이 불가능한, 그 자체가 기존의 배치에서 돌출된 새로운 구성과 문체로 시도된 특이점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