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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 이강훈 그림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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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봉화 청량산 ---> 경상북도 봉화 청량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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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괴물 백과
곽재식 지음, 이강훈 그림 / 워크룸프레스(Workroom)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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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물의 모습을 최대한 문헌과 일치하려고 노력했고, 그 결과물도 너무 산뜻하다.
원전에 나오는 괴물에 대한 설명도 충실하고, 지은이의 설명도 여러 문헌에 나오는 이야기를 잘 체계화한 것 같다.
여기에 반영되지 않은 신이담을 더 수집해 증보해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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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덕 성령충만기
이기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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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만큼 재미있는 책도 흔치 않을 것 같다. 그저 재미있다는 표현을 쓰기엔 좀 그렇고, 통쾌하고 유쾌하다고 해야 할까.

이 단편집을 횡재한 돈으로 구입해서

집으로 갖고 들어와 방바닥에 배를 탁 깔고

가끔씩 과자를 우물거리면서

그렇게 읽어치웠다.


이기호란 작가의 능숙한 말재간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성석제를 장난질 정말 잘하는 작가라 알고 있었으나

이기호도 그에 못지 않다.


보지도매상 사장 이야기, 본드쟁이 이야기, 우리의 최순덕씨 이야기...


그저 얘기가 재미만 있다면 뭐하러 이런 몇줄 나부랭이라도 허비하겠나.

이런 이야기 뒤끝에 남는 거리는 정말 공유했으면 좋겠다.

바구니의 언어가 역겹다면 말리고 싶지만...


일찍이 무대뽀의 기린아, 주유소 습격사건의 오성이 형님이 말씀하셨다.

"나는 한놈만 죽인다."


여러 이야기가 나오지만, 하나만 짚겠다.

보지도매상 업주 이야기.


일단 문체는 이른바 힙합체이다.

어느 가수인지 생각은 안나지만, 일종의 패러디로

얼마전까지 나의 고등학교 친구 녀석의 컬러링이었다.

"왔어 왔어 그녀가 왔어" - 이렇게 시작하는 거다.


말은 못해도 힙합은 기막히게 하는 덜떨어진 친구 순이(맞나?).

그녀는 힙합은 잘했다.

그리고 현장에선 아저씨들을 즐겁게 하는, 白&巨의 젖가슴과 필적할만한 특장이다.


일찍이 바구니로 존재지워진 우리의 사장님, 이력.

자신의 그 "이름"을 불러준 고마운 국사 선생(왜 하필 국사지??? - 이 소설에 뭔가 모자란 인물은 이렇게 국사 곧 한국사와 관련된 사람이 많다. 아마 둘이 더 있지?)을

손봐주고 학교를 나와 직업 전선에 뛰어 듦.

몇명의 아가씨와 봉고차 전화, 간소한 사무실을 밑천으로

투철한 프로 의식을 발휘, 보지도매 업계에서 입지를 마련해감


어느날 순이의 등장.

그 모자란 순이는 전도유망한 우리의 사장님껜 하나의 모욕.

그러나 싹트는 묘한 감정.

자신의 때 덕지덕지 뭏은 옷을 신명나게 빨아주는 순이.


그래, 바구니에게도 뭔가 담을 것, 역으로 담길 것은 있다.

어느 프랑스 소설 제목에 "나는 떠난다"라는 게 있다.

그와 같은 비접착성, 일회성, 냉혈성이 싫다.

처지와는 상관없이

누구에게는 의미가 되는 존재가 있고 나도 그런 존재가 된다.

잊지 말자. 이런 온통 바구니 같은 인간들만 있는 공간에서조차.


"우리의 바구니를 우습게 여기지 마라. 황차 너희들도 바구니 아니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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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지 - 위스망스 단편 (구) 문지 스펙트럼 25
조리스-칼 위스망스 지음, 손경애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0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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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프랑스 문학, 그것도 위스망스는 지금도 여전히 생경하다. 어찌어찌 해서, 낯선 단어를 발견했다. 그것은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였다. 문학사조로서 퇴폐주의 혹은 악마주의는 뭘까? 그래서 위스망스를 읽기로 했고, 이 책을 읽었다. 그런데 이 단편집 ≪궁지≫는 자연주의 계열의 작품들인 〈등짐〉,〈부그랑씨의 퇴직〉,〈궁지〉라는 세 작품을 담았다. 황당했다. 결국 이 책으로는 '퇴폐주의자 위스망스'를 읽게 해주지 못했다. 내 심정은 ≪거꾸로≫를 읽고 위스망스에게 원고를 부탁했다가, 〈부그랑씨의 퇴직〉을 받아 쥐고 실망했다는, 한 영국 잡지사 사장의 그것과 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나? 사 놓은 바에야 읽어야 할 터. 악마주의나 퇴폐주의 대신 자연주의로 목표를 수정했다. 번역자는 위스망스의 끝없는 비판 정신을 찬양한다고 했는데, 그 비판 정신을 건질 수 있지 않을까?

〈등짐〉을 읽고 재밌었던 것은 군기라고는 도무지 찾아볼 수 없는 보불전쟁 당시의 프랑스 군바리들. 하루나 이틀이 지나갔다. 우리들은 명령에 따라 말뚝들을 이용하여 보호막을 만들었고, 화주를 많이 마셨다. 무르물랑의 갈보집들이 계속 가득 찼을 때에 갑자기 캉로베르는 군기가 꽂혀 있는 군대 선두에서 우리 부대를 열병했다... 우리들은 이 원수의 말에 설득당하기는커녕 아무것도 받지 못했고, 먹을 것도 거의 없다는 불만을 합창하듯이 고래고래 토해냈다. 그러자 힘으로 우리들이 불평하는 것을 저지하겠다고 그는 말했다. "아니, 그만, 그만! 만 명 모두 엎드려뻗쳐. 파리로! 파리로 가!" 도대체 이런 나라의 군대가 어떻게 강화도를 활보하고 약탈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을까, 라는 직업적 생리에서 기인한 다소 핀트에 어긋난 물음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손자는 전쟁 승리의 기본 조건으로 道, 곧 전쟁에서의 명분을 들었다. 명분 없는 전쟁은 얼빠진 군대를 양산한다. 보불전쟁은 그만큼 명분이 실종된 권력가의 정치쇼였다. 그러나 이 작품은 적어도 제목이 〈등짐〉이 아니라 〈출발의 찬가〉였으면 더 좋았다. 〈등짐〉은 명분 없는 전쟁에 대한 비판보다는 한 부르주아 청년이 전쟁터의 활란에서 벗어나 일탈을 일삼다 가족의 품으로 되돌아간 안도감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다. 〈등짐〉으로의 개명은 전략이다. 자신을 자연주의계열로 분류하게끔 하기 위한, 그쪽 방면에서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이 아닐까.

〈부그랑씨의 퇴직〉은 ≪궁지≫의 다른 두 단편에 비해 시기적으로 가장 늦게 나왔다. 이 작품을 자연주의에 속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만큼 가장 옅은 색깔의 자연주의 작품일 것이다. 단적으로 부그랑은 전혀 있을 수 없는 사람이다. 적어도 상식적으로는 말이다. 명퇴를 당한 전직 공무원 부그랑이 자신의 집에 사무실과 유사한 공간을 만들어 놓고, 사환을 고용해 똑같은 업무를 만들어 한다는 얘기. 이런 인물은 존재하기가 힘들다. 그렇지만 그만큼 더 재밌다. 〈등짐〉에서의 외젠느는 부르조아 청년의 '앙탈'에서 오는 재미를 쪼금 주지만, 이보다 재밌지는 않다. 생각해 볼만한 점도 제공한다. 흔히 노동의 소외라는 말을 많이 한다. 헤겔은 노예조차도 자신과 노동을 동일시한다고 했고, 마르크스는 그런 노동이 더 이상 자신과 일치되지 않을 때 노동의 소외가 발생한다고 말했다던가? 여하튼 한 고귀한 공무원으로 존재의 이미지를 키워가던 부그랑이 더 이상 공무원으로 존재하지 못하게 됐을 때 느끼는 그 엄청난 소외감, 그것은 부그랑의 목숨까지도 앗아가는 무서운 압박감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부그랑의 내면적 소외감, 압박감이 키포인트이다. 비판을 논하기에는 웬지 약하다.

마지막 〈궁지〉는 두 놈의 추악한 부르주아가 마땅히 도움을 줘야할 선량한 숙녀들을 궁지에 몰아넣는다는 얘기다. 앞의 두 작품에 비해 비판 강도가 제일 높다. 부르주아라는 계급, 그들의 악덕이 전면에 등장하기 때문. 그러나 그만큼 재미없다.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면서 위스망스가 왜 샹파뉴 부인을 속물로 그리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가 여성에 대한 편향적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했는데, 그래서인가? 억압하는 자들을 비판하면서, 억압받는 자를 도와주려고 애쓰는 결국 억압받는 자와 다를 바 없는 자를 속물로 그리다니. 마치 양비론처럼 〈궁지〉의 비판의 칼은 무뎌지는 게 아닌가.

≪궁지≫는 위스망스의 초기작, 빛을 보지 못할 뻔 하다가 겨우 공개된 작품, 당시 별로 주목받지 작품, 이 3개를 묶어 놓은 단편집이다. 이런 작품들을 문지에서 책으로 만든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해설 부분에서 그러한 이유를 잘 납득할 수 없었다. ‘무슨 작품이 당시의 뭐를 비판하고 있으니 위스망스는 비판 정신이 충만해 있다.’ 단지 이것뿐이면 되겠는가? 내가 봤을 때 위스망스의 비판의 칼은 그리 날카롭지 않다. 차라리 ≪거꾸로≫를 읽었으면 좋았다. 소설 읽기에서 재미·처절함을 추구하는 분이라면, 이 책 ≪궁지≫는 추천하고 싶지 않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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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란 무엇인가 범우사상신서 9
E.H.CARR 지음, 김승일 옮김 / 범우사 / 199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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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1.

역사라는 두 글자는 매우 빈번하게 회자되는 용어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러한 용어의 정확한 개념 설정에 대해서 어떠한 압박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역사라는 용어는 학문의 어느 한 분과에서 사용되는 전문적인 것으로 인식되어지기보다는, 거의 남용에 가까울 정도로 일상 생활에서도 널리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속어로서의 의미를 제외하고 일상적 용례에서 역사는 과거에 일어났던 일 혹은 그것에 대한 기록을 의미한다. 또한 이러한 범주에서 흔히 ‘역사란 되풀이되지 않는다.’거나 ‘역사에 이름을 드날렸다.’라는 식의 표현을 쓰고 있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역사에 대한 개념 설정은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더 비일상적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역사라는 두 글자의 말은 이미 그처럼 만만하게 보아 넘길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재 대부분의 역사가들은 역사라는 용어를 어떻게 사용하고 있을까? 그들에게 통용되는 역사란 ‘역사가에 의해 서술되어진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事實이나 기록[史實]에 대한 역사가의 선택성을 전제로 해서 성립된 가설이다. 즉 과거에 일어났던 사실은 모두 史實로 남는 것이 아니며, 또 운 좋게 史實이 된다고 해도 그것이 모조리 역사가의 손을 거치게 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역사를 쓰는 것은 바로 선택의 문제로 인식되는 것이다.
언뜻보면, 이러한 역사관은 역사의 과학성을 주장하는 이들에게는 매우 위험천만한 것이 될 수 있다. 선택의 문제는 언제나 가치의 문제로 환원되기 마련이며, 이러한 점에서 ‘역사가에 의해 기록된 역사’는 주관주의나 그것을 더 넘어선 회의주의로 빠져 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역사에 있어서의 과학성 혹은 객관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세 번째의 의미를 성립 가능하게 함과 동시에 위와 같은 극단적 주관주의, 상대주의의 우려를 불식시키려고 했던 역사학자로서 우리는 E. H. Carr라는 거장을 지목할 수 있을 것이다.

2.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로서의 역사>

카는 역사라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해답을 제시하기에 앞서 역사가의 탐구의 대상이 되는 “역사적 사실”의 문제를 추구하였다. 먼저 그는 1장인 「역사가와 사실」에서 역사가와 그의 인식, 신념 체계에 얽힌 문제들은 당대 사회와 무관하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 즉 모든 사실을 수집하여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신념을 가진 1896년의 액튼의 견해와 자신의 시대에 회의주의 혹은 객관적 역사 진리를 부정하는 생각이 풍미하고 있다고 한 1957년의 조지 클라크의 견해를 대비시킴으로써 견해차의 원인을 사회관의 변화로 돌리고 있는 것이다.
카에 따르면 액튼의 19세기적 사고는 당대의 “사실을 존중했던 시대”적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당시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 “있는 그대로”를 고집했던 랑케식의 사고와 “과학으로서의 역사라는 것을 열심히 주장한 실증주의자”들이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한 시대였다. 이러한 사고는 “사실이란 감각적인 인상처럼 외부로부터 관찰자에게 부딪혀 오는 것이기 때문에 관찰자의 의식과는 다른 독립된 것”이며, 따라서 관찰자의 행위와 대상은 엄연히 분리되어 객관적, 가치중립적 연구가 가능하다는 전제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카카 보기에 그들은 사료에서 단편적인 사실들을 마치 “생선가게의 좌판 위에 놓여 있는 생선을 손에 넣듯이” 입수해서 액튼처럼 “약간의 조리만 한 채 거의 그대로” 진열하는 수준에 머물고 있는 것 밖에는 되지 않는다.
카는 이것에 대해 과거 사실이 아무리 객관적 성질을 가진다고 할지라도 “역사가에 의해 역사적 사실로 다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카는 “기초적 사실”과 “역사적 사실”을 구분 짓고 전자는 역사가에 있어서 의무 사항이며, 필요조건일 뿐이라고 설명한다. 나아가 사료와 역사가에 있어서, 역사가는 사료에 고개 숙일 필요가 없으며, 적극적으로 그것을 이용할 권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역사적 사실이란 “역사가들이 그것을 대사건”으로 간주해, 연구 대상으로 삼게 되는 역사의 “기초적 사실”들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 완전성을 더하기 위해서는 동료, 후배 역사가들의 찬동도 필수적이다.
좀더 논의를 진전시켜 카는 이러한 기초적 사실이 “비역사적 사실이라는 감옥 속”에서 어떻게 역사적 사실로 전변해 가는가의 문제를 상세하게 설명해내고 있다. 즉 어떤 사실이 역사가에 의해 주목되었다가 다시 다른 동료에 의해 注라는 형식을 통해서 수인되고 결국에는 논문의 본문을 차지하게 됨으로서 그 탈옥 과정을 훌륭하게 이루어낼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카에 있어 이제껏 역사 연구의 중심이 되었던 기초적 사실은 편향성의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고대, 중세사가들에 있어 사료에 기록된 기초적 사실들은 매우 희소해 이미 거의가 다 역사적 사실로 격상된 것들이지만, 그러한 사실들이 당대의 역사상을 완전하게 전달해 주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즉 〈사료가 말해주는 것〉이라는 소제목 아래에서 사료는 “필자가 일어났었다고 생각한 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든가,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일, 또는 자기가 그렇게 생각한다고 사람들도 생각해주기를 바랐던 일, 자기 혼자만 행각하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일 이외의 것을 우리에게 말해줄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에게 카는 슈트레제만의 외교문서를 정리해 베른하르트가 출간한 『슈트레제만의 유산』이나, 뒤에 서튼에 의해 영국에서 축소 영역된 『그의 일기와 편지, 문서들』, 또 슈트레제만 자신이 정리한 외교문서의 일방적 편형성을 통해 확인시켜 주고 있다.
결국 카에 잇어서, 기초적 사실에 대한 19세기적 맹신은 매우 못마땅하고 유해한 것이 된다. 그래서 역사가의 해석이 중요한 것이다. 카는 역사 연구에 있어서 해석이 차지하는 비중에 주목했던 딜타이와 칼 베커, 크로체, 콜링우드의 견해를 요약한 후에, 역사 연구는 “사실의 선택과 해석”으로 이루어진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것은 곧 역사적 사실의 생산 과정과 동일한 것이다.
오크셔트의 말처럼 “역사를 쓰는 것이 역사를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다음과 같은 태도가 요구된다. 첫째, 역사책을 보기에 앞서 역사가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이며, 둘째로 “역사가는 자신이 연구하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그 사람이 행한 행위의 배후에 있는 사상을 상상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마지막으로 역사가는 현재의 눈을 통해서 과거를 이해해야 한다. 역사는 역사가 개인의 해석에 의해 만들어지므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해당 역사가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알아야 하며, 이러한 태도는 두 번째의 태도와도 연결된다. 또한 개인으로서 역사가는 반드시 사회라는 무거운 중력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존재임과 동시에 현재에 대한 이해가 없이는 제대로 된 역사 연구를 진행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김기봉에 의하면, 역사적 원인을 탐구하는 역사학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사과의 낙하 운동에 관한 자연 과학적 법칙은 시공을 초월해서 관찰자의 위치에 상관없이 확인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왜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났고, 왜 볼세비키가 정권을 획득하였는가?”라는 역사학적 물음에 대한 인과적 설명은 연구자의 현재의 위치에 따라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김기봉, 2000, 「역사란 무엇인가」『‘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 푸른역사). 궁극적으로 이러한 점으로 인해 카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 내리게 되었다.

요컨대 「역사가와 사실」에 기록된 카의 중심 사상은 다음과 같다. “역사가는....사실 선택과....잠정적인 해석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역사가는 현재의 일부이고 사실은 과거에도 속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 상호작용은 현재와 과거와의 상호관계를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즉 역사란 역사가와 사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이루어지고 있는 상호작용의 과정으로,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역사가와 사회>

이미 카는 「역사가와 사실」을 통해서 그의 사상의 요체를 제시해 놓고 있다. 2장 「사회와 개인」을 포함한 이하의 장절들은 모두 그러한 결론을 재확인하는 과정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카에 있어 “사회를 떠난 개인은 존재할 수 없다.” 양자는 불가분의 관계이다. 개인은 단순한 생물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의해서 그 참모습이 획득된다. 언어와 사회적 환경은 인간 정신의 성격까지도 결정지어 주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은 미분화된 원시 사회에서 뿐만이 아니라, 고도로 분업화된 현대 사회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결국 각 사회의 구성 양식에 따라 그 나라 국민의 성향이 결정되므로 각국의 사람을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사회에 대한 이해가 우선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와 개인간의 불가분성에 대한 기초적 논리가 19세기적 자유주의 성향 곧 “개인주의 숭배”로 인해 위협받고 있다. 개인은 르네상스에서 자각되기 시작하였고, 자본주의와 프로테스탄티즘의 발전과 연계되다가, 산업혁명과 자유방임의 학설과 밀착된다. 그럼에도 카는 이러한 개인화 증대는 문명 진보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일상적 현상이지, 본질적인 변화는 아니라고 단정 짓는다. 그러므로 지금 사회에 개인간의 갈등이 난무하는 듯 하지만, 그것은 실제로는 이익 집단간의 대립으로 환원된다.
개인에 대한 지나친 숭배는 사회와 세계의 이해에 장애물이 되고 말았다. 사회 밖에 추상적으로 존재하는 개인이란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인데, 19세기 자유주의 역사가들은 역사 현상을 마치 개인이 좌지우지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만 것이다.
사회적 존재로서의 개인에 대한 견해를 “현재와 과거와의 대화” 속에서 파악해보자. 역사가는 물론 하나의 개인이다. 그러나 그는 사회적 현상, 산물인 동시에 사회의 대변인이다. 이는 그로트와 몸젠, 데이미어의 역사 기술 태도에서 극명하게 입증된다. 역사가는 자신이 속한 계급적 이익과 이념, 전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이세영에 의하면, 역사에 있어서 그것은 이른바 “문제의식의 틀”을 형성하는 것으로 “서술되어진 것으로서의 역사”의 밑바탕이 된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의식의 틀은 고정불변의 것이 절대 아니다. 사회의 추이에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입장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카는 이것을, 독일의 위대한 역사가인 마이네케의 역사 서술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서 어떻게 달라지고 있는가를 보여줌으로써 입증해내고 있다. 이러한 진리를 다르게 표현한 것이, “역사 산물로서의 역사가”라는 표현이다. 시가의 흐름 속에서 파악해 볼 경우에, 문제의식의 틀은 역사성을 면치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사회적 산물로서 동시에 역사가의 연구대상으로서 개인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까. 역사의 무대에서는 언제나 주연 배우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극적 무대의 전체적 창둰에서 주연 배우조차도 그이 “자유 의지”대로만 행동할 수 없다. 카는 역사의 무대에 있어서 주연 배우의 자유 의지를 강조하는 입장에 선 아이자이어 버린 경, 웨지우드 여사, 로우즈 박사, 제임스 닐 등의 역사 이해는 편의성 추구에 다름 아닌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그렇다면, 역사 연구에 있어 개인의 행동이나 반역자, 위인을 어떤 식으로 접근해야 할까? 카에 있어 개인이 사회적 현상이자 산물이듯이 그의 행동도 절대로 사회적 행위와 구별되지는 않는다. 개인과 시회를 획일적으로 구분하려는 태도는 매우 잘못된 것이다. 개인의 독자적 판단만을 강조할 경우에, 인간의 무의식적인 동기나 스스로 인정하지 않는 동기의 측면을 배제해 버리게 된다. 또한 추상적인 역사관을 구축한다는 유보 하에서 인간은 자유 의지대로만 행동하지도 않는다.
궁극적으로 역사란 “사회 속에 있는 인간의 과거를 연구하는 과정”이라는 의미에서만 사용될 수 있다. 반역자, 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비록 그들이 개인으로서 기존의 체제에 영향을 주기는 하지만 사회라는 큰 틀 안에서 설명되어질 수 있는 존재이지 결코 사회와 역사 밖에서 추상적으로 존재해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현재와 과거와의 작용 바꿔 말하자면 역사가와 역사적 사실간의 상호 작용은 오늘의 사회와 과거 사회와의 대화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를 역사가와 과거 개인과의 사귐으로만 본다면 역사가의 임무를 방기하게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원인을 연구하는 과학으로서의 역사>

카에 있어서 역사 연구의 본질은 역사적 사실들의 원인을 규명하는 일일 것이다. 따라서 역사가는 항상 ‘왜?’라는 문제를 추구한다. 이런 점에서 몽테스키외가 『법의 정신』을 통해서 법칙, 일반적 원인, 원리라는 것을 선구적으로 내세운 후에, 역사가와 역사철학자들은 과거 경험을 일관된 체계 아래로 조직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런데 그들은 원인을 다양한 범주로 이해하였지만, 카의 강연에 있어 이것들은 ‘원인’이라는 보통명사로 취급된다.
카는 역사가들이 원인을 다룸에 있어서 다음과 같은 태도를 취한다고 한다. 첫째로 역사가는 한 사건에 대해 여러 가지의 원인을 거론하며, 둘째로 그렇게 나열된 원인들을 체계 있게 정리하거나 그들 간의 상하관계(종속관계)를 설정하거나, 원인 가운데서 가장 적절한 그것들을 뽑아내려고 한다는 것이다. 즉 “해답의 다양성과 단순화”를 동시에 전개시키는 것이다.
역사 연구에 있어서, 원인을 인정하느냐 아니면 하지 않느냐, 바꿔 말한다면 원인에 의한 결정론을 어느 정도까지 수긍할 것이냐 아니면 인간 개인의 자유 의지, 혹은 역사에 대한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할 것이냐 하는 문제는 카에 있어서 명백하다. 카는 헤겔과 마르크스에 대해서 그들이 결정론적 견해를 취했기 때문에 도덕적 판단을 제대로 내릴 수 없었다고 비난했던 칼 포퍼와 아이자이어 버린 경에 대해 스미스 이야기를 통해서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다. 그에게 있어 “모든 사건에는 원인이 있다는 公理”는 우리 주위의 움직임과 역사를 이해하는 인간 능력의 한 표상과도 같은 것이다. 카는 불가피라는 단어의 사용을 시인이나 형이상학자의 몫으로 돌리고는 있지만, 이른바 “역사적 불가피성”이라는 학설을 내세우면서 역사학자들이 원인에 대해 접근하는 방식을 부정하려는 사람들을 “假想學派”라는 용어를 쓰며 비판하였다.
원인의 문제에 있어서 또 하나 문제가 되는 것이 잇는데, 그것은 “클레오파트라의 코”라는 말로써 대표될 수 있는 이른바 偶然史觀이다. 카는 일단 역사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100%의 완전 우연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즉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에게 반한 것은 그녀가 그만큼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며 일상적 원인 결과의 연쇄 작용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역사상의 우연은, 역사가들이 그 연구에 전념하고 있는 원인 결과의 연속을 중단하는 -말하자면 서로 부딪친다고 말할 수 있다- 것을 말한다.” 베리의 방식으로 표현하자면, “두개의 독립된 인과 사슬의 충돌”로 이해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역사가들이 정상적인 인과관계의 사슬이 비상적인 인과관계의 사슬로 인해 파괴되어 버릴 수 있는 위험한 지경을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 즉 역사가는 어떻게 우연을 걷어내고 원인을 상호 배열하여, 그 종속 관계를 완성하고 궁극적인 원인을 잡아낼 수 있을까? 카는 여기에서 무의미한 연속=우연 그리고 특수한 것 / 유의미한 연속=현실적인 것, 합리적인 것, 보편적인 것이라는 이분법적인 논리를 제시해 놓고 있다.
사람들은 로빈슨의 죽음의 원인에 대해 논할 때 로빈슨의 음주 운전 사실이나 브레이크 정비 상태 불량, 도로의 구조라는 원인들을 저울질하면서 주와 종을 나누려 할 것이다. 카에 있어서 이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인과관계를 형성시키는 원인들이다. 그러나 로빈슨이 역사하게 된 것은 담배를 피우려 했던 그의 욕망 때문이었다고 한다면, 차후 경찰 당국은 교통사로를 줄이기 위해서 금연 캠페인을 벌여야한다는 넌센스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결국에 카에 있어서 역사적 연구의 대상이 되는 합리적인 원인이라는 것은 현재와 과거에 또 세계 어느 곳에서나 똑같이 적용될 수 있는 보편성을 가지고 있으며, 가치 있는 것 혹은 유용한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면 이러한 합리적 원인 규명의 가능성 나아가 역사 연구의 과학성을 담지해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바로 이성이다. 카에 있어서 역사 연구의 요체는 가장 합리적인 원인들을 선택적으로 찾아내어 그것을 조직화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과정에서 역사학자들이 내리는 이것저것의 판단 즉 해석은 어느 것이나 타당하고 합리적인 것일 수는 없다. 우연적 원인들을 이성을 통해서 완전하게 선별해내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에 “그곳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고, 우리들의 이해력에 깊이와 폭을 더해주는 작용”을 하며, “현재의 조명에 비추어 과거의 이해를 진전시키고, 과거의 조명에 비추어 현재의 이해를 깊게”하는 역사적 사실들을 찾아내어 정리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학으로 불려질 수 있는 것이다. 곧 이성을 통해서 해석의 객관성이 확보되는 것이다.

  <진보와 역사 혹은 역사가>

카에 의하면 서구의 사상적 전통 속에서 이른바 목적론적 역사관을 시도한 것은 유태인들과 기독교도들이었다. 그들은 역사에 어떤 종교적인 목표를 설정해두었는데 그 목표가 실현되고 나면 인간의 역사는 깨끗이 소멸되어버린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다가 르네상스에 접어들면서 인간 중심적 세계관이 목적론적 역사관과 결합되는 양상을 보여 주었다. 또 이를 계승한 근대인들은 “역사는 지상에서 인간 모습의 완성이라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진보적인 것”이라고 인식되었다. 결국 근대인들은 신을 구축하고 그 자리에 절대적 이성이라는 존재를 앉혀놓았던 것이다.
이러한 식의 역사관은 19세기에 절정을 맞이했다. 완전한 역사를 쓸 수 있다고 믿었던 액튼에게서 카의 학감이었던 댐피어 교수에게서 버틀란트 러셀에게서 『진보의 개념』을 서술한 베리에게서 낙관주의적 발전관의 모습은 어렵지 않게 발견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카의 시대에 있어서 그러한 진보라는 가설은 크게 위협받게 되었다. 카의 진보라는 가설에 대한 신념을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생물학적 진화와 구별되는 획득에 의한 진보는 “인간의 각 세대를 단위로 해서 측정될 수 있는 것”으로서 “여러 세대의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을 발전시켜 나가고” 있으며 “사고적 효율성”이 전 세대에 비해 배가되는 것을 의미한다. 카는 이렇게 문화의 전승 과정을 진보라는 개념 속에 넣어 이해하고 있는데, 결국 진보라는 가설은 그에게 진리로 간주된다.
또한 그러한 진보 과정은 분명한 시작도 없고 종말도 없는 계속적인 과정이다. 따라서 카는 종말론자들을 “역사의 범주 밖에 목표를 설정하는 잘못 투성아의 견해”라고 일축한다. 카에 있어 역사의 진보를 추동하는 목적은 각 사회적, 역사적 조건에 따라 당양하게 나타날 수 있지만, 역사의 가능성은 확고 부동한 것이다. 카에 의하면 당대의 역사가들은 일종의 방향성을 상실하고 있는데, 진보라는 가설은 하나의 나침반이어서 “그야말로 없어서는 안 될 길잡이”인 것이다.
진보는 어느 정도의 비연속성을 가지고 있어서 퇴보의 시대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한다. 하지만 역사의 진보 그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 된다. 서양의 몰락을 예견하는 사람들, 역사의 모든 의미를 부정하고, 진보의 소멸을 단정 짓는 회의론자들이 과거에는 문명의 진전을 위해서 지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카는 의미심장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결국 연속의 휴지라는 것은 있어도 소멸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째서 이러한 진보가 역사 연구의 과학적 가설이 될 수 있는 것인가? 카는 역사 연구의 객관성은 “사실의 객관성이 아니라, 단지 관계의 객관성, 즉 사실과 해석 사이, 과거와 현재와 미래 사이의 관계의 객관성”이라고 주장한다. 여기서 해석, 그리고 그것의 객관성이라는 부분은 앞에서 언급되었듯이 매우 중요한 문제라고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객관성은 카의 역사관에 있어서 과학으로서의 역사학을 주관주의의 경계로부터 구분지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무한한 진보라는 개념은 바로 이러한 해석에 있어서 기준으로 채택될 수 있다. 역사에 있어서 변화하지 않는 것은 없으며, 따라서 절대적 가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아무리 현재의 가치가 존재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현재라는 시간적 개념 또한 고정불변의 것이 아닌, 매우 관념적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가에 있어 진보라는 것은 과거의 사실들을 해석하는 유일한 가치 기준이 되며, 과거와 현재의 대화 방향을 그것에 맞출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카가 역사라는 것이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 내렸을 때에, 그러한 대화는 결코 역사가가 심심해서 나누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유의미한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역사가와 “역사학의 과제는 이런 역사의 진보 과정에 복무하는 것”이라고 한 김기봉의 지적은 이러한 카의 역사관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3.

그는 과거 사실의 단순한 나열이 역사가 될 수는 없고, 역사가의 적극적인 해석이 개입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의 과정은 역사가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수반하게 된다. 따라서 역사 연구의 객관성이 확립되기 위해서는 인과 관계에 대한 해석에 있어서 이성을 통한 우연적 원인의 관계를 일체 배제하는 작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또한 역사 연구의 주목적, 바꿔 말하면 과거와 현재의 대화의 목적은 미래의 진보라는 기준에 입각해서 그 방향이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모든 해석은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현재 서구 포스트모더니즘의 무차별적인 해체 작업이 카와 그의 추종자들을 무장 해제시키려하고 있지만 “역사학의 종말”이니 하면서 마치 격문과 유사한 용어를 만들어 냈을 뿐 정작 그들 진영에서는 카의 군대를 대신할 만한 별다른 집단을 산출해내지는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김기봉이 현재 한국사학계에서 눈에 띠는 연구자라고 할 수 있는데, 『‘역사란 무엇인가’를 넘어서』라는 저서를 통해 카의 역사 철학에 대한 비판을 시도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 스스로도 “하나의 시론”으로서 그의 작업을 이름붙이고 있으며 또 내용면에서도 “카의 역사관을 이제는 낡은 무가치한 것으로 폐기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카가 내린 역사의 정의를 재음미해보자는” 수위에 도달한 상태이다.
결론적으로 카의 이론을 수용한다고 하면, 앞서 보았던 세 번째의 역사에 관한 정의가 그대로 수인될 수가 있다.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사관이니, 아니면 문제의식의 틀이니 하는 개념을 역사 연구에서 부정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역사학부 1학년 과정에서 거의 모든 대학이 『역사란 무엇인가』를 교재로 채택하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다만 현재의 논의 수위에서 그에 대신할 만한 사관이 없다는 이유만으로 새로운 움직임에 대해 무조건 공격적인 태세를 취하는 것은 곤란하다. 특히 역사가의 해석 그리고 그것이 가진 목적론적인 성향이 과학성과 어떻게 조화를 이루어나갈 수 있겠는가에 대한 부분은 끊임없는 성찰이 요구되는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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