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란꽃 등불
하츠 아키코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4월
평점 :
품절


나는 하츠 아키코의 열광적인 팬이다. 고풍스런 그림체가 참 좋고, 가볍지 않은 스토리가 좋다. 만화에 대해 부정적인 인식을 갖고 있던 사람이라도 그녀의 작품을 읽고 나면 그 인식이 180도 바뀌게 될 것이다.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 없는 하츠 아키코의 작품 가운데에서도 이 '모란꽃 등불'을 최고로 꼽는 까닭은(물론 최고란 건 '세상이 가르쳐 준 비밀'을 제외했을 때의 이야기다) 바로 '분위기'에 있다. 각기 다른 스토리의 단편들을 기묘한 끈으로 묶어주는 하츠 아키코의 독특한 '분위기' 말이다.

이 단편집에는 4개의 이야기가 나온다. 이 이야기들은 다시 서양 이야기와 동양 이야기로 나눠볼 수 있다. 근대 미국에서의 유산 상속 문제인 두 개의 서양 이야기도 독특하고 애잔하지만, 역시 작가의 역량이 백분 발휘되는 것은 일본을 배경으로 한 '모란꽃 등불'과 '화야연가', 두 이야기다. 여기서 독자는 '세상의 가르쳐 준 비밀'에서 느꼈던 것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비껴 흐르는 분위기를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중국의 '전등신화'를 근대 일본판으로 바꾸어서 괴기스러움보다 서글픔을 선사하는 '모란꽃 등불', 전국시대 말엽의 일본을 배경으로 역사와 운명에 휘말리는 세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그린 '화야연가', 이 두 작품만으로도 눈이 부실만큼 이 책은 소장 가치가 있다. 하물며 수준급의 서양 이야기 두 편까지 더 실려 있음에야.

나는 만화 그리는 것을 좋아하고, 마음에 드는 그림을 보면 그 자리에서라도 따라 그리지만, 하츠 아키코의 그림은 차마 그렇게 할 수가 없다. 내가 함부로 따라 그리기엔 죄송스러울 만큼 묘한 깊이가 있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지면에 혼을 불어넣는 힘. 그것이 이 작가의 최대의 매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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