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모든 삶은, 작고 크다 (책 + 정규 8집)
루시드 폴 지음 / 예담 / 2017년 10월
평점 :

루시드폴의 8집. 모든 삶은 작고 크다. 폴이 제주도에 내려간 이후에 낸 두 번째 앨범. 다만, 이번 작품을 음반이라고 해야할 지, 책이라고 해야할 지는 모르겠다. 노래도 에세이도 한올 한올 정성들여 빚은 떡이나 마찬가지여서 참 귀하다.
-
-
굉장히 자연스러운 이야기지만, 루시드폴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는 이야기에서부터 시작해, 농사 이야기, 집을 지은 이야기까지 자연스럽게 흘러간다. 최근에 열매하나에서 낸 자연농에 관한 책 '불안과 경쟁없는 이곳에서' 를 읽고 나서 그런지, 농사 이야기가 남다르게 읽혔다.
-
-
햇살과 나무와 물고기를 노래하던 그가 제주도로 가서 귤농사를 짓는 모습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언젠가 그랬을 일- 하고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이해가 된다.
-
-
루시드폴만큼 큰 변화가 있었던 건 아니지만, 지금의 내 삶을 생각해보면 꽤나 많은 변화가 있었다.
-
-
올해 3월 정도부터 식물에 큰 관심이 생겨, 꽃과 나무 사진을 찍고, 이름을 외우기 시작했다. 낭군님과 함께 마당에 여러가지 모종을 심고, 그걸 수확해 집에서 해 먹는 요리에 넣기도 했고, 영화관이나 공연장을 점점 덜가게 되고, 수목원이나 국립공원을 더 많이 가게 됐다는 것도.
-
-
미미한 변화로 시작해서 점점 삶의 방향이 달라져가는 중인데, 5년 후, 10년 후 나의 모습은 어떨까? 어떤 방향으로 변화될지가 궁금하다면 5년 전, 10년 전 내 모습을 보면 될 터이다. 설레서 살짝 몸이 떨리네.
-
-
갑자기 리뷰를 쓰다말고 내 삶에 대한 이야기로 빠지고 말았지만, 루시드폴의 아름답고 땀 냄새 나는 변화를 보는 것이 좋았다. 앞으로 좀 더 풀냄새 나는 쪽으로 걸어나가겠지.
-
-
에세이는 쏠랑쏠랑 다 읽었지만, 노래를 음미하는 것은 좀 더 천천히, 오래해야할 일이다. 아름다웠던 구절들, 이 곳에 남겨본다.
============
-
-
"음악은 산책이다. 처음 출발한 곳으로 되돌아가게 할까? 그냥 툭, 길을 마칠까. 흐린 날씨에 떠난 산책을 햇살 쨍쨍한 피날레로 마무리할까. 오르막길을 올라서 야호 하고 만세라도 한번 부를까. 밑도 끝도 없이 단조롭고 평탄한 길만 걸을까. 얼마나 긴 게 좋을까. 장엄한 노을을 보여줄까. 잔뜩 낀 구름 사이로 섬광이 내리쬐는 장면은 너무 극적일까."
-
-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나뭇잎을 맨손으로 만지지 마세요. 나뭇잎의 기공이 상할 수 있어요. 나뭇잎에게는 사람의 손바닥 온도가 뜨겁거든요. 손등으로 살짝만 만져주세요." 지렁이도 사람이 맨손으로 만지면 화상을 입는다고 했다. 사람의 손길도 너무나 지렁이에게는 억세고 뜨거운 폭력이 되는 것 같다. 과수원에 놀러 온 손님들에게 아무렇지 않고 어린잎을 떼어 자랑하던 예전의 내 모습이 몹시 부끄럽다."
-
-
"음악을 하는 사람들은 밤을 사랑하는 법이건만, 농사의 일상을 함께 신경 써야 하는 나는 밤 시간을 고집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올해 나는 처음으로 이른 새벽에 일어나 곡을 썼다."
-
-
"2년보다 더 길어진다면 음악적으로 너무 느슨해지고, 그렇다고 매해 앨범을 내는 것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나무가 꽃을 틔우고 열매를 맺는 것이 일 년의 일이듯, 한 장의 앨범을 낸다는 것도 꼬박 한 해의 일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