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구시다 마고이치 지음, 심정명 옮김 / 정은문고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작고 개성있는 1인 출판사 정은문고(이정화)에서 낸 책, 사랑하는 나의 문방구'. 산 건 벌써 6개월 정도 되었는데 고이 모셔 두었다가 이제야 읽었다. 요샌 비교적 책 구입을 줄이고, 내 서재를 탐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제는 '文房具56話'. 번역해 보면 '문방구 56화' 정도 되겠다. 일본의 문필가이자 철학자인 구시다 마고이치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문방구 56개와 그것들에 묻어있는 이야기들을 소중히 꺼내어 놓았다. 읽다 보면 살짝 옛날 이야기 같기도 한데, 그도 그럴것이 구시다 선생이 '월간 사무용품' 이라는 잡지에 70년부터 73년까지 매달 1편씩의 글을 연재한 것을 엮은 책이기 때문이다.

문구류에 크게 집착이 없는 나라는 인간도 특히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들이 몇 개 있기는 하다. 그것은 바로 연필이다. '책에 자유롭게 메모를 하며 읽는' 방법으로 전향하고 난 이후로는 연필의 종류와 모양과 나무의 질이 꽤 중요해졌다. 무엇보다도 연필이 겉부분의 색이 1가지 색이어야 했다. 그것이 노랑이건 검정이건 초록이건 중요하지 않지만 한가지 색으로 칠해져 있을 것. 아이들이 초등학교에서 쓰는 것처럼 어벤져스나 유희왕 무늬가 현락하게 칠해져 있어서야, 독서가로서의 품위가 있겠는가! (에헴-)

연필은 통으로 둥근 모양이어서는 곤란하겠다. 그랬다간 테이블에 잠시 놓아서 또르르 굴러서 바닥에 떨어지기 마련이고 그랬다간 심이 부러지는 건 불보듯 뻔한 일. 육각이면 가장 좋고, 삼각이어도 좋겠다. 요즘은 연두색 연필을 항상 가지고 다닌다. 어쩌다 보니 연두색 연필과 책을 함께 찍었을 때 가장 싱그럽다는 걸 알게 됐고, 사람들은 잘 모르지만 이젠 책 사진을 올릴 때 반드시 그 연필과 함께 찍어서 올린다. 필통을 가지고 다니면 짐만 많아질 뿐이니, 연필심을 보호하기 위한 연필캡을 꼭 착용(?)시킨 연필을 들고 다닌다. 그 외의 나머지 문구들에 대한 원칙은 크게 없다. 

56개의 문방구를 이야기하며 한 챕터당 2~4쪽 정도로 굉장히 짧아서 읽기에 부담없다. 첫 챕터는 무엇일 것 같은가? 아, 당연하게도 연필이다. 그렇다면 두 번째 챕터는 무엇일까? 너무나 예상 가능하게도 지우개. 그런 당연함과 자연스러움이 맘에 쏙 든다.

몇 구절 인용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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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머니칼로 연필을 깎는 즐거움을 맛보지 않고 어른이 되는 사람들이 왠지 안됐다. 연필을 쓰는 기쁨에는 연필을 깎는 즐거움도 당연히 포함되기 때문이다."

"지우개는 잘못 쓴 부분을 지워주는 고마운 물건임에도 장난질과 괴롭힘을 당하는 숙명을 짊어지고 있구나. 적당한 부드러움과 크기, 저렴한 가격 때문에 더 괴롭히기 쉬운 걸까."

"문방구는 전부 다 물건이다. 물건이기는 하지만 깊이 사귀면 그저 물건일 뿐이라고 말하기 어렵다."

"어릴 적에 주판을 꺼내서는 뒤집어 한발을 올리고 다다미 위에서 롤러스케이트를 타는 흉내를 내곤 했다. 이 일로 꾸중을 들은 기억은 없어도 허락받은 놀이는 아니었을 터. 주판알 위에 발을 얹었을 때의 묘하게 간지러운 감촉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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