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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미
구병모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평점 :
품절

구병모 작가의 장편소설 <아가미>를 읽었다. 책에서 종이와 잉크 냄새가 나는 대신 비릿한 물미역 냄새가 난다. 활자는 눈으로 읽는 것이지만 이 작품만은 피부로 흡수하는 느낌이 들었다. 온 몸으로 이 책을 읽었다.
얼마 전 꿈을 꿨다. 내가 길거리를 뛰어가고 있었다. 왜였을까, 나는 그게 꿈이란 걸 알고 있었다. 웅덩이가 있길래 발로 힘껏 밟았더니 정말 내 정강이에 물이 팍! 튀었다. 내달리면서 꽃집에서 내 놓은 선인장을 움켜쥐었더니 악 소리가 나게 아팠다. 길에 세워진 옷걸이 걸린 옷을 만졌더니 보들보들했다. 꿈인 줄 뻔히 알고서 꿈을 꾸는데도 내 감각은 생생했다. 이 책이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는 맑은 정신으로 헛것을 볼 만큼 심신미약자도 아니고 오컬트 신봉자도 아니며 술에 취하지도 않았어요.”
독자는 이 화자가 누군지도 모른 채 무려 16쪽에 걸쳐 이 독백을 읽게 된다. 그러고는 궁금해서 안달이 나서 뒷 챕터로 허겁지겁 넘어가게 될 것이고. 화자가 장황하게 장광설을 늘어놓는 동안에 독자는 어렴풋이 비릿한 물냄새와 함께 누군가의 존재를 깨닫게 된다.
누군가, 있다. 미끄럽게 빠져나가지만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있구나, 그 누군가가.
최근에 읽은 <정유정, 이야기를 이야기하다>에서 정유정 작가는 단문으로 날카롭게 후려치는 방식으로 작업한다고 했다. 구병모 작가는 그 반대 지점에 있다고 느꼈다. 길고 아름답다. 묘한 매력을 지니고 나 같은 독자를 홀리는 문장을 함께 살펴보자.
“습기를 머금은 공기가 한숨 같은 밤 자락 사이로 섞여들어 만용을 불러일으키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어요.”
“분명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소린데, 마치 맑은 공기가 그 사람의 몸속에 순간적으로 응결되었다가 굴절과 파열을 반복한 끝에 가장 고운 성분만 걸러져 수많은 입자로 흩어지는 소리, 온몸이 떨림판이 되어 밤을 둘러싸거나 밤에 은닉한 모든 것들과 부딪혀 공명하는 소리였어요.”
“햇빛을 얻어 반사해야만 하는 구차한 물리적 존재들과 달리, 아이의 등에 돋아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의 절대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토록 청완하고 눈부신 것만 같았다.”
서사와 감각이 한 뭉치가 되어 촉감으로 다가온다. 젖은 발자국 하나에서 책 한 권이 나왔다. 지금도 어디선가 탄력적으로 헤엄치고 있을 곤을 떠올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