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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린드그렌 선생님 ㅣ 창비아동문고 219
유은실 지음, 권사우 그림 / 창비 / 2005년 1월
평점 :

당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릴 때 아슴푸레 생각나는 책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요?’
이 책을 읽고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든 생각. 사람들에게 이 질문을 하고 싶다는 거다. 그러고는 내 어린 시절의 단 하나의 작품은 무엇일까 생각해봤다. 답을 내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J.M.바스콘셀로스의 <라임 오렌지나무>.
어린 시절 우리 집은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엄마 말로는 나는 이미 갓난쟁이부터 책을 좋아해서 안달이었다고 한다. 엄마가 무리해서 산 계몽사 전집이 너덜너덜할 때까지, 심지어 마침표와 쉼표까지 다 읽어댔던 나. (이렇게 평생 책벌레로 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지만 ㅎㅎ)...
책을 좋아하는 것치고는 많이 읽을 수가 없었다. 어쩌다 외출을 해 엄마가 책을 사주면 너무 기뻐서 팔짝팔짝 뛰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렇게 엄마가 사다주신 책이었을 거다. 내 기억이 맞다면 4학년 때 나는 이 책을 처음으로 접했다.
라임오렌지가 뭔지도 모르는데, 어렴풋이 향긋하고 새큼한 향기가 나는 열매일거라고 상상했다. 뽀르뚜가 아저씨가 왜 죽어야 하는지, 라임오렌지 나무는 왜 잘려나가야 하는지. 너무 거대한 슬픔에 압도됐지만, 반전은 없었다. 아저씨는 죽고, 나무는 잘려나가고. 둘 중 하나도 살아나지 못했다.
아무리 떠올려도 그 책만큼 내게 강렬하게 남아있는 어린 시절의 책은 없다. 유은실 작가에게는 그게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작품들이었다. 자기 얘기를 이렇게 아름다운 작품으로 쓸 수 있다니, 아니 써도 된다니! 그게 작가로 산다는 것의 특혜 아니겠는가! (오해 마시라, 글을 쓰는 누구나 작가가 될 수 있으니.)
모든 챕터의 제목이 다 린드그렌의 작품이다. 첫 장은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산적의 딸 로냐’, ‘미오, 나의 미오’, ‘사자왕 형제의 모험’을 지나 현덕의 ‘나비를 잡는 아버지’도 등장한다. 난 여기 나오는 작품들을 다 읽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작품들을 모두 읽었으며, 깊이 사랑하는 사람들은 이 동화가 얼마나 재미있고 가슴에 품고 싶을만큼 좋을까?
린드그렌을 좋아하는 소녀 비읍이가 써내려가는 이야기. 엄마가 린드그렌을 읽었으면 좋겠고, 돈은 없지만 헌책방에 린드그렌 책을 한권 두권 모아가는 게 세상 최고의 기쁨인 비읍이. 린드그렌 선생님이 언젠간 읽어줬으면 하는 간절한 마음으로 편지를 한 통 한 통 쓴다. 그 편지들을 읽다보니 비벌리 클리어리의 <헨쇼 선생님께> (원제 :Dear Mr. Henshaw)도 떠올랐다. 얼굴을 본 적도 없는 작가를 그리워하는 어린이 독자들의 마음. 세상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순수하게 반짝이고 고마운 마음. 당신이 책을 안 읽고는 못 배긴다면, 어제도 읽었고, 오늘도 읽으며, 내일도 읽는 그런 부류의 사람이라면 이해할거다. 당신이 바로 비읍이라는 걸. 다름아닌 그 소녀라는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