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학의 쓸모 - 불확실한 미래에서 보통 사람들도 답을 얻는 방법 쓸모 시리즈 1
닉 폴슨.제임스 스콧 지음, 노태복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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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옛날에 이런 생각을 했어요. 컴퓨터가 아무리 머리, 아니 CPU를 돌려대더라도, 결국 사람이 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있을 거라구요. 가령 번역이나 예술 같은 것들이요. 아무리 많은 숫자들을 대응시킨다 해도 사람만이 알아차릴 수 있는 어떤 영역을 재현하지는 못할 것 같았어요.

그러다 4~5년 전쯤 #빅데이터인문학 을 읽었어요. 책 800만 권에서 뽑아낸 데이터로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과 문화를 읽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였어요. 책을 읽으면서 감탄을 만 번쯤 했어요. 시대가 너무나 정확하게 보였거든요. 세계 최고의 도시 예로 들어볼게요. 사람들에게 최고의 도시를 물어보면 뉴욕, 파리, 런던 등등을 꼽을 거예요. 그런데 이 책에 따르면 1911년을 기점으로 각종 문헌에서 뉴욕의 언급량이 런던을 앞지르기 시작했어요. 데이터를 통해 사람들의 속마음이 드러난 거죠.

아하, 사람의 마음도 숫자로 알아낼 수 있는 거였구나. 지금까지 인문학의 영역인 줄만 알았는데,수학이 이런 일까지 해낸 걸 알고 난 이후부터 관심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어요. 이런저런 수학책을 섭렵한 것도 이때부터였어요.

‘수학의 쓸모’는 같은 맥락에서 반가운 책이었어요. ‘이런 것까지 하고 있었어?’ 싶은 것들을 마음껏 보여주더라구요. 이 책은 일곱 가지 분야를 다루고 있어요. 그리고 이 일들을 하기 위해 쓰인 수학적 원리도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구요. 여기에 소개된 수학 원리들을 모두 요약하긴 힘들겠고(어쩔 수 없는 수포자 본능), 어렴풋한 기억이라도 남겨두기 위해 정리해보면 이렇다고 해요.

👉 조건부 확률: 넷플릭스가 내 취향을 귀신 같이 알아내는 방법

👉 패턴 인식: AI가 오이나 피자를 알아차리는 방법

👉 베이즈 규칙: 자율주행차가 혼자 운전을 하는 방법

👉 스무고개(알고리즘): 인공지능 스피커가 내 말을 알아듣는 방법’

👉 제곱근 규칙: 공수를 정하는 동전 던지기에서 계속 이기는 방법

👉 모형 설계(가설 세우기): 지레 겁먹고 피임을 포기하지 않는 방법(?)

이 개념들은 다른 책 읽거나 옮겨 적은 메모들 보면서 복습하기로 하고, 여기에선 인상적인 대목 몇 개만 남겨볼게요. 하나는 이 모든 성취들이 ‘정답’ 보다는 ‘확률’에 기반을 두고 있다는 거예요. 가령 “신용카드 거래가 속임수라고 ‘확실하게’ 말하지 않”고, “속임수일 확률이 92퍼센트”라고 말하는 식이래요.(9) 지난번 읽었던 #거의모든것의역사 에서도 불확실성에 대해 언급하는 대목이 있는데요. 숫자가 못 알아먹게 생겨먹은 불확실한 세계를 그대로 재현할 때 큰 일을 해낸 것 아닐까 싶었어요.

다른 하나는 ‘AI시대엔 사람이 더 똑똑해져야 한다’는 대목이었어요. 흔히 AI 때문에 사람이 설 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뉴욕 타임스>에서 소개한 10년 피임간 실패율이 그래요. <뉴욕 타임스>는 콘돔의 피임 성공율 81%를 ‘독립시행’으로 오해한 나머지, 그걸 반복해서 곱해버리는 실수를 저지르고, 10년 내 콘돔 사용자가 피임에 성공할 확률을 39%라고 결론 내려요(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잖아요). 잘못된 가정 때문에 결론이 엉뚱해진 거죠. 가정이 잘못되면, AI도 똑같이 실수한대요. AI가 잘못된 가정에 발 딛고 서지 않으려면 사람이 똑똑해야 한대요. 그리고 스치듯 이야기하지만, 그 ‘똑똑함’은 민주화 과정을 통해 획득할 수 있다고 해요.

마지막 대목은 여성 수학자에 대한 헌정이었어요. 흔히 수학이나 과학을 다루는 책은 남자 수학자나 과학자만 다루는 경우가 많은데요. 이 책에는 우리가 몰랐던 수많은 여성 수학자들이 등장해요. 패턴 인식 시스템을 발견한 헨리에타 레빗이나 역사상 최초로 컴퓨터에 언어를 인식 시킨 그레이스 호퍼, 현대적 의료 시스템을 열어준 플로렌스 나이팅게일까지. 수학이 남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는 걸 깨닫게 해주었어요. 이 책이 다룬 수학 원리만큼 중요한 사실들이었다고 생각해요.

결론적으로 이런 책을 학창시절에 읽었더라면, 제 수학 성적이 한 뼘만큼은 좋아지지 않았을까 생각했어요. 수학이 이렇게 재밌고 쓸데가 많았다니. 그래서 좀 아쉽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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넛지 - 똑똑한 선택을 이끄는 힘
리처드 H. 탈러 외 지음, 안진환 옮김, 최정규 / 리더스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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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류 경제학에 따르면 인간은 합리적이라고 해요. 자신에게 돌아올 이득과 손해를 완벽하게 계산한 다음, 조금이라도 이득이 되는 선택지를 고르는 존재라는 거예요. 언뜻 그럴듯해 보여요. 손해는 누구나 싫어하니까요. 작은 손해도 못 견디는 저 같은 소심이를 보면 언뜻 맞는 말 같아요.


그런데 문득 궁금해져요. 이득과 손해를 완벽하게 계산하는 게 가능할까? 이런 예를 들어볼게요. 누군가가 암에 걸릴 수 있고, 아닐 수도 있다고 가정해봐요. 만약 진짜로 걸린다면, 그 사람은 열심히 저축을 해놔야 해요. 이 과정에서 많은 걸 포기해야 해요. 멋들어진 자동차, 텔레비전, 해외여행 등등. 이렇게 열심히 돈을 모아놨는데 암에 안 걸렸다면? 반대로 내일이면 인생 끝날 것처럼 탕진잼을 즐기고 있는 사이 암이 찾아왔다면? ‘메디컬 푸어가 되는 거죠. 이걸 완벽하게 예측하고 대비한다? 그럴 수 있었다면 보험회사는 다 망했겠죠?


사람이 똑똑하긴 하죠. “여러 해 동안 못 본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고 모국어의 복잡성을 이해할 수 있으며, 층 사이에 있는 일련의 계단들을 넘어지지 않고 뛰어 내려갈 수도있어요(39p).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 해도 엄청난 훈련을 거치지 않으면 저런 예측 해내기 어려워요(사실 훈련해도 완벽하진 않은 것 같아요).

 

넛지는 주류 경제학의 인간관을 반박하는 책이에요. 인간은 이성보다는 누구에게나 있는 다양한 편향에 따라 움직이고, 그래서 실수도 겁나 많이 하는 존재라고 해요. 단순히 반박만 하지 않아요. 인간이 오류를 저지르는 패턴을 관찰하고, 그걸 바탕으로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제도를 설계하자고 주장해요. 자유경제 어쩌구 저쩌구 하는 사람들이 아직도 많은 시점에서, 너무나도 시의적절한 이론적 작업이었던 것 같아요. 그걸 한번 간추려보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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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뇌과학과 심리학 연구에 따르면 사람의 사고 시스템은 두 개로 분류된다고 해요.


자동 시스템(시스템1): 신속하고 직관적이며, 혹은 직관적이라고 느껴지며, 주로 사고라는 단어가 연상시키는 것들을 수반하지 않음.


숙고 시스템(시스템2): 숙고 시스템은 보다 신중하고 의식적인 시스템으로, 우리는 ‘411 곱하기 37은 얼마인가?’ 등의 문제를 풀 때 활용.


--> 얼마 전에 읽다 만 (그런데 엄청 유명한) ‘생각에 관한 생각에도 등장하는 분류 체계예요. 동시에 재밌게 읽었던 #해빗 의 합리적 자아비의식적 자아’, #잠못드는뇌과학 의 생각하는 뇌’, ‘반사용 뇌와 같은 개념 같아요.


자동 시스템은 잘만 활용하면 좋은 무기가 될 수 있어요. ‘해빗에 따르면, 긍정적인 행동을 습관화하면 우리는 엄청난 일을 해낼 수 있다고 해요. 문제는 숙고를 필요로 하는 순간에 튀어나오는 자동 시스템이에요. 대개 이런 경우,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어리석은 판단을 내려요. 그런데 재밌게도 그런 오류에도 일정한 패턴들이 있다고 해요. 대략 다섯 가지 정도예요.


어림 감정: 대부분 사람들은 바쁘고 복잡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몇몇 사소한(?) 사안들, 박나래의 나이’, ‘서울에서 전주까지의 거리’, ‘강원도 평창군의 인구등을 추측할 때 어림 감정을 사용해요. ‘나보다 어릴 것 같아’, ‘목포보다는 가깝잖아’, ‘원주보다는 적겠지등등 나름의 근거를 대면서요.


비현실적 낙관주의: 인간은 자기 능력을 과신하고 있어요. 수업시간에 자기 성적을 예측하라고 하면 50%가 자신을 상위 20%에 들 것으로 예상한대요(ㅋㅋㅋ). 90%의 운전자가 운전 실력을 평균 이상이라고 생각해요(비웃기게도 제 얘기네요). 이건 우리가 안고 있는 리스크(교통사고, 암 발병 등)를 낮게 평가하는 원인이 돼요.


손실 기피: 만약 도박을 한다면 사람들은 내가 잃을 수 있는 손실의 두 배 이상을 이익으로 거둘 수 있을 때 도박에 나서요. 이건 현재 갖고 있는 걸 고수하려는 타성으로 이어지기도 해요.


현상유지 편향: 사람들은 손실 때문이 아니더라도 현재 상황을 고수하려는 경향을 보여요. 수업 시 지정좌석제가 아닌데도 같은 자리에 앉으려고 한다든지 등등이에요. 심지어 변화에 따른 이익이 클 때도 이 편향 때문에 이익을 포기할 때가 많대요(카드 하나만 바꾸면 통신료 6천원이 할인되지만 바꾸지 않는 제가 빠진 편향 맞네요).


프레이밍: 그 유명한 프레임이야기 맞아요. 수술을 앞둔 환자에게 ‘100명 중 10명이 5년 내에 죽는다고 얘기하면, 대개 수술을 거부한다고 해요. 반대로 ‘100명 중 90명이 산다고 얘기하면 반응이 다르다고 해요. 알려주는 정보가 정확히 똑같은데도요. 심지어 의사들도 앞의 이야기를 들으면 수술을 거부하고, 뒤의 이야기를 들으면 수술을 시도한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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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이 편향에 가득 찬 인간들을 어떻게 구원(?)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았어요. 책에서 제시하는 해결책은 자유주의적 개입주의예요. 이건 책 서두에 소개되는 급식 담당자의 사례를 통해 쉽게 이해하실 수 있어요. 학생들의 건강을 고려해서 가장 이로운 쪽으로 음식을 배열하되(제일 눈에 띄는 자리에 채소를 놓는 식으로), 최종 선택권은 학생들에게 주는 거예요. 배열 순서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학생들은 무의식적으로 몸에 좋은 음식을 먹게 돼요. 하지만 몸에 나쁘지만 맛있는 음식을 빼앗기지는 않아요.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다른 말로 하면 넛지’(Nudge)가 돼요. 사전에 따르면 이끌다’, ‘살짝 찌르다’, ‘자극이라는 뜻이래요.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수많은 선택을 해야 해요. 그런데 말씀드린 대로 편향에 빠져서 어리석은 선택을 할 때가 많죠. 이건 개인에게도 손실이지만, 사회적인 손실로 이어지기도 해요. 저축을 하지 않는다든지, 충분치 않은 정보만 갖고 투자했다가 큰 손실을 본다든지, 대출 서류가 너무 복잡해서 앞뒤 안 보고 사인을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추심이 들어온다든지. 이걸넛지로 방지하지는 게 이 책의 핵심 주장이에요.


이 책에선 저축을 늘리는 법을 비롯해 손해 보지 않는 연금 상품에 가입하게 하는 법 같은 경제적 제도뿐 아니라 장기기증, 환경 보호 같은 사회적 제도에 넛지를 적용하는 방법에 대해 다루고 있어요. 뭐가 좋고 나쁘다고 설명하는 캠페인보다 넛지를 이용할 때 훨씬 나은 결과를 가져온다고 해요(가령 별다른 의사표시가 없으면 저축액을 임금상승률과 연동해 자동으로 늘린다든지, 교통사고로 사망한 사람들을 장기기증자로 간주하되 기증을 원하지 않는 사람에게만 미리 신청을 받는다든지 등등). 선택할 기회를 주되(자유주의), 기본 옵션을 지정하는 거죠(개입주의).


저는 이 책의 제안이 꽤 마음에 들어요. 애초에 인간은 이래저래 불완전할 수밖에 없는데, 현대 사회는 인간에게 남은 실낱같은 합리성을 발휘하기엔 너무나 크고 복잡해요. 자유주의 아무리 해도 전 제 인생 최선의 선택 못 할 것 같아요. 반대로 누군가 선택지를 제 손에 쥐여준다면? 엄마한테 듣는 잔소리도 짜증 나는데 내 선택지들을 누가 다 골라준다면 아마도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제가 합리적이지 못한 것과는 별개로 저한테는 자유의지가 있으니까요. 내가 선택하되, 적절한 선택지를 쉽게 고를 수 있다면? 감사합니다.


그런데 마지막 문제가 하나 남아요. 그 선택지는 누가 만드나요? 아마도 정치가와 전문가 관료집단일 거예요. 그렇다면 정치가와 전문가 관료집단에 그냥 믿고 맡기면 모든 게 끝날까요? 아닐 것 같아요. 전문가 집단 또한 인간이라는 점을 잊어선 안 돼요. 그들 또한 편향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이에요. 공익적 제도를 설계해야 하는데, 꽤 자주 사익을 위해 움직여요. 책에도 등장하는 예로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있어요. 믿고 집 산 사람들, 채권 산 사람들 다 망했어요. 우리나라에도 이런 예들 너무나 많지만 그냥 넘어갈게요.


제가 내린 결론은 좋은 넛지에는 민주주의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좋은 선택을 하고 있다는 신뢰가 없다면 사회를 유지할 수 없겠죠. 신뢰가 있더라도 실제로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면 개인이든 사회든 망하겠죠. 좋은 넛지에 대해 주권자와 정치인, 전문가 관료집단이 합의해가야 이 책이 넛지를 주장한 취지도 살아날 수 있을 것 같아요.


p.s1

그러고 보니 요즘 우리나라는 그게 좀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네요. (찡긋)


p.s.2

인스타그램에도 넛지 하나를 심어놨는데, 넛지가 잘 될지 모르겠어요….


p.s3

생각의 관한 생각읽기 프로젝트로 먼저 꺼내 들었는데, ‘생각에 관한 생각을 먼저 읽는 게 더 좋았을 것 같아요. ‘넛지가 도리어 응용편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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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탐정 버티고 시리즈
로버트 크레이스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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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탐정) 캐릭터가 이러기 쉽지 않은데, 엘비스 콜은 뭐랄까, 좀 사랑스러운 것 같아요. 이쪽 동네의 다른 인물과는 다르게 장난기도 넘치고, 또 감정도 대단히 풍부하거든요. 『L.A. 레퀴엠』(이하 『레퀴엠』에서 자기 슬픔을 감추지 않고 오열하던 모습은 좋은 의미에서 충격적이었고, 심지어 그 모습이 너무나 설득력 있어서 마음으로 따라 오열했어요.


그렇다고 넘치는 감정 때문에 일 처리가 프로답지 못하냐면 그건 아니에요. 모든 수사 과정 내내 냉철하고 철두철미하진 않지만, 프로답다는 수식어가 어색할 정도는 아니죠. 어려운 사건들이 그의 추리로 풀리니까요(예외가 있다면, 조 파이크가 주인공이었던 『워치맨』 정도?)그런데 또 그게 전부인 것 같지는 않고요. 보통 이런 위악은 사연이 있게 마련이거든요. 감정적이면서도 일은 잘 하는데, 사연까지 있을 것 같은 캐릭터. 좋아하지 않기가 힘들지 않나요? 


『마지막 탐정』(이하 탐정)은 이런 엘비스 콜의 캐릭터를 마음껏 활용한 이야기입니다. 『레퀴엠』 때부터 엘비스에게는 루시 셰니에라는 애인이 있었어요. 『레퀴엠』에서의 어떤어떤 일 때문에 헤어진 줄 알았는데, 그때까지 잘 만나고 있더군요. 그리고 엘비스도 무척 사랑하는 루의 아들 벤 셰니에도 있어요. 루시가 출장을 간 사이, 엘비스는 벤을 돌보고 있습니다. 이 동네 아이들이 그렇듯, 벤도 엘비스를 잘 따르는 편입니다. 그런데 그런 벤이 말 그대로 눈 한 번 깜빡한 사이에 사라지고 맙니다. 벤이 사라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옵니다. 이 납치는 엘비스가 베트남전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한 복수라고 말이죠.


여기에서 눈여겨본 대목은 이렇습니다. 엘비스 콜은 과연 어떻게 처신할 것인가. 냉정함의 끝판왕이라 해도 냉정해질 수가 없는 상황인데, 게다가 엘비스는 그런 쪽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거든요. 달리 말해, 그가 활극을 펼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이 만들어졌단 뜻이죠. 더불어 엘비스의 위악 뒤에 숨은 사연을 알아낼 기회이기도 했어요.


그렇게 ‘영혼의 파트너’ 조 파이크와 함께 엘비스는 벤을 찾으러 나섭니다. 그리고 기대했던 대로 활극이 펼쳐지기 시작하죠. 가뜩이나 제멋대로이고, 또 제멋대로 굴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엘비스를 작가는 더욱 옥죕니다. 벤의 친아버지인 리처드 셰니에의 등장이 그렇죠.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엘비스를 싫어할 수밖에 없는데, 나름 권력도 없지 않아서, 그걸 이용해 경찰을 움직여요. 엘비스를 수사에서 제외시키려고요. 협박 전화를 먹잇감 삼아 엘비스와 루시와의 사이도 이간질하고요. 그러나 엘비스는 절대로 이런 일을 그만둘 사람이 아닙니다. 자연스럽게 이야기는 긴장을 향해 치닫기 시작합니다. 엘비스의 추리가 벤의 주변에 얼씬조차 하지 못했을 때의 상황이에요. 자, 함께 손잡고 긴장의 지옥으로 출발합시다.


이 과정이 긴장으로 가득 차 있다면, 엘비스가 베트남전 참전 경력을 살려 벤에게 다가가는 대목들은 (다른 범죄물에서 그렇듯) 쾌감으로 차 있습니다. 그런데 그 추리 과정이 좀 색다릅니다. 추리 과정의 많은 부분이 엘비스의 과거와 맞물린다는 점에서요. 엘비스의 과거는 사건을 풀기 위한 단서로의 역할 이상을 수행합니다. 엘비스라는 인물을 입체적으로 보여주죠. 엘비스가 왜 엘비스가 되었는지, 엘비스가 지금 해나가고 있는 추리는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엘비스가 이렇게 왜 유쾌해졌는지(이 부분은 조금 더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지만, 이 설명은 작품에 맡겨두겠습니다. 궁금하신 분들은 직접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이걸 달리 말하면 감정을 이입하기에 좋은 범죄물이란 이야기가 되겠습니다. 이 시리즈가 안 그랬던 적은 없지만, 이번에도 멋지게 성공해냈어요. 개인적으로는 사건 추리만큼이나,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대목이었습니다. 이 시리즈를, 엘비스를 사랑하는 이유이기도 하고요. 죄책감, 사명감, 절박함 같은 감정들을 엘비스와 함께 충만하게 느끼실 수 있을 거예요. 다행스럽게도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엔 이 모든 감정은 즐거움으로 변하죠. 어디까지나 대리체험이니까요.


여하튼 즐거운 경험이었어요. 『레퀴엠』에 비해 아쉬운 부분이 없지 않았지만, 결코 실망스럽진 않았습니다. 이 시리즈를 사랑하는 분들에겐 추천. 단, 이 시리즈를 처음 읽는 분이시라면 전작 『레퀴엠』을 먼저 읽으실 것을 권합니다. 반드시 읽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거든요.


덧붙임. 반가운 인물 하나가 등장합니다. 우리가 아는 딱 그 사람처럼 나타나요. 아는 사람은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직접 목격하고 나니 이 반가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이것도 비밀로 남겨두겠습니다. 직접 만나는 순간의 쾌감을 여러분도 느껴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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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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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와 요리사들』(이하 『요리사들』)을 처음 꺼내 들었을 땐 가볍게 즐길 만 한 코지 미스터리’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가혹한 ‘전장’에서 ‘사랑스러운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덕분이었죠. 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팀) 콜이 전쟁에 출전하기까지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 프롤로그를 읽을 땐 이런 심증을 굳혔어요. 요리에 관심 있는 소년. 그러나 진짜 남자로 가고 싶은 청년. 결국 이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주인공.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 심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요리사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전쟁, 나아가 전쟁 속 참상에 대한 묘사예요. 그 참상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또한 허투루 지나치지 않아요. 어제 얼굴을 맞댄 사람들이 오늘의 폭격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죽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들, 그 참상 속에서 겪는 고통을 담담한 듯 그러나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어떤 부분에선 읽기가 힘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요. 하긴,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 이런 걸 지나친다면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새삼스레 생각났다. 불길에 휩싸인 채 낙하한 공수병,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유도병, 구호소에서 그저 죽음을 기다리던 부상병.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몰랐지만 내가 그렇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그저 우연히 제비뽑기에서 당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번 뽑을 제비는 백지일까, 아니면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까? 궁둥이 언저리에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났다. 82


이 소설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만 치중했다면, 『요리사들』을 읽고 느낀 울림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 좀 뜬금없는 타이밍이긴 하지만 네, 맞아요.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감동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책을 손에서 떼어놓질 못했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야기 곳곳에 적절하게 녹아든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팀이 동료들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들, 때로는 동료와 갈등하면서 때로는 어울리는 모습들.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관통하면서도 그들은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일상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곧잘 잊는, 그러나 기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말이죠.


『요리사들』 속 이 미스터리는 더욱 감동을 부추기는 요소로 다가옵니다. 사실 처음엔 어리둥절했어요. 분량으로 보나 깊이로 보나 이야기의 대세를 좌우할 만 한 무게감이 이 책의 미스터리에서는 느껴지지 않거든요. 미스터리 마니아들에겐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법할 정도죠. 그러나 이내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를 트릭의 정교함이나 흥미만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수수께끼가 눈앞에 뒹굴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나? 사실 난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해서 말이지. 그 안경 쓴 유대인 청년은 그야말로 명탐정 같았지. 분말 달걀 외에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워낙 입이 무거워야지” 483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소설 후반부에서 전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독일 사람들을 향해 비인간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던 팀 콜은 그러나 끝내 인간다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최근 세계 곳곳에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만연하면서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옵니다. 누군가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누군가는 극우주의자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을 해치고 있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른 채, 온갖 비윤리적인 폭언을 쏟아내는 사람들. 인간성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요리사들』의 사람들은 비극에 갇힌 괴물로 남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끝내 인간성을 지켜내죠. 사람다움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요즘, 마음 따뜻해지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일까요?『요리사들』의 감동이 꽤나 오래 이어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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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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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혹은 잭 리처를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사람이 자로 잰 듯한, ‘정석’ 같은 인물이란 겁니다. 말투나 행동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죠. 심지어 생각까지도 그렇고요. 리 차일드 또한 이런 인물상을 작정하고 만든 듯한 느낌이고요. 잭 리처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묘사를 위해 동원한 문장들은 이런 인상을 더욱 깊숙이 새겨넣어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끊어치는 단문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잭 리처의 이 기질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20년 전에도 여전합니다. 1996년 어느 날 아침,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잭 리처는 그러나 '강등'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곳으로 전출됩니다. 여느 인물이었다면 한동안 빈정을 상한 채 분을 삭이지 못하겠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수습하고 자로 잰 듯한 추리로 여기에 자기가 왜 왔는지 금방 깨닫게 돼요. 이렇듯 소설은 잭 리처의 제일 중요한 매력 포인트와 함께 시작을 알립니다.


이후에도 잭 리처는 여느 범죄소설의 수사관이 그러하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리력으로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초창기 단서들만 놓고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용의자만 해도 20만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니, 이걸 어떻게 잡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잭 리처는 해냅니다. 수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자를 특정해내면서 수사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죠. ‘믿기지 않는’ 추리력이 ‘억지’가 아닌 ‘탄성’으로 이어졌던 건, 개연성 또한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이거야!” 이 말을 몇 번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범죄소설로부터 기대했던 그 쾌감을 『나이트 스쿨』은 초반부터 전해주죠.


그러나 『나이트 스쿨』의 진짜 매력은 칼 같은 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로 칼 같은 추리가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빅 꿀잼’을 전해주었죠. 이 작품에서 유일한 전지전능한 존재인 리 차일드(!)는 마치 잭 리처를 작정하고 골탕 먹이려는 듯 뜻하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쏟아냅니다. 더군다나 잭 리처는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었어요. 그렇게 잭 리처가 알지 못하는 인물이 나타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추리는 자주 샛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검거를 자신하던 상황에서 눈 뜨고 용의자를 놓치는 대목이라든지, 도시를 탈출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은 애먼 곳을 수색했던 순간이라든지. 물론 읽는 순간엔 안타까웠죠. 이 말을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아니야!” 


잭 리처의 헛발질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재미’의 측면입니다. 범죄소설의 전해주는 쾌감의 본령은 누가 뭐래도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일 겁니다. 물론 『나이트 스쿨』이 전하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끝내 잭 리처는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그러나 잭 리처가 진실에서 멀어질 때 순간 또한 즐거움을 전해주는 대목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안타깝잖아요. 범인을 못 잡을 것 같아서 긴장하게 되잖아요. 이건 뭐랄까, 소설에서 눈을 못 떼게 하는 기본적인 감정들이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사람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제 눈으로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선 결국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인물, 또는 다른 범인이 등장하니까 그 기똥찬 잭 리처도 고꾸라지잖아요. 어디 잭 리처뿐인가요. 가령 2년 전만 해도 2017년 11월 이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지금의 그 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때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면 틀림없이 나사 빠졌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을 겁니다. 꽤나 뜬금없고 지나치게 철학적인 해석이지만, 사람의 이성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어쨌든 결론은 추리와 헛발질, 미스터리, 박진감, 개연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심오한 함의도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좀 별점에 후한 편이긴 한데, 네 개는 먹고 들어가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말인즉슨 이 책에 그 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는 분들께 망설임 없이 권할 책이란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덧. 개인적으로 이 책의 사이즈가 참 좋더군요. 손으로 잡기에도 좋을 뿐더러, 책 읽는 기분도 한껏 냈어요. 더 많은 범죄소설 작품들이 이 사이즈로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미약하게나마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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