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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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와 요리사들』(이하 『요리사들』)을 처음 꺼내 들었을 땐 가볍게 즐길 만 한 코지 미스터리’ 정도를 생각했습니다. 가혹한 ‘전장’에서 ‘사랑스러운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홍보 문구 덕분이었죠. 이 소설의 주인공 티모시(팀) 콜이 전쟁에 출전하기까지 이야기를 간략하게 다룬 프롤로그를 읽을 땐 이런 심증을 굳혔어요. 요리에 관심 있는 소년. 그러나 진짜 남자로 가고 싶은 청년. 결국 이 때문에 군에 입대하는 주인공. 어느 정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나요? 


그러나 이야기가 이어질수록 이 심증은 점점 희미해집니다. 『요리사들』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건 전쟁, 나아가 전쟁 속 참상에 대한 묘사예요. 그 참상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고통 또한 허투루 지나치지 않아요. 어제 얼굴을 맞댄 사람들이 오늘의 폭격으로 세상을 떠난 상황, 언제 죽을지 모르는 전쟁, 죽은 사람들의 비참한 모습들, 그 참상 속에서 겪는 고통을 담담한 듯 그러나 생생하게 그려냅니다. 어떤 부분에선 읽기가 힘들 정도로 생생하게 그려내요. 하긴, 전쟁을 소재로 하면서 이런 걸 지나친다면 기만적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새삼스레 생각났다. 불길에 휩싸인 채 낙하한 공수병, 임무를 다하지 못한 채 목숨을 잃은 유도병, 구호소에서 그저 죽음을 기다리던 부상병. 지금까지 정신없이 달려왔기 때문에 몰랐지만 내가 그렇게 될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지금 살아 있는 것은 그저 우연히 제비뽑기에서 당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번 뽑을 제비는 백지일까, 아니면 빨간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을까? 궁둥이 언저리에 소름이 돋고 몸서리가 났다. 82


이 소설이 전쟁의 참상을 묘사하는 데만 치중했다면, 『요리사들』을 읽고 느낀 울림이 이렇게 크진 않았을 것 같습니다. 아, 좀 뜬금없는 타이밍이긴 하지만 네, 맞아요.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감동의 크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한동안 책을 손에서 떼어놓질 못했어요. 그리고 그 이유는 이야기 곳곳에 적절하게 녹아든 가벼움 때문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팀이 동료들과 티격태격하는 장면들, 때로는 동료와 갈등하면서 때로는 어울리는 모습들. 인류사 최악의 비극을 관통하면서도 그들은 ‘삶’을 살고 있었어요. 일상이란 이름으로 우리가 곧잘 잊는, 그러나 기실 우리에게 가장 소중한 무언가를 말이죠.


『요리사들』 속 이 미스터리는 더욱 감동을 부추기는 요소로 다가옵니다. 사실 처음엔 어리둥절했어요. 분량으로 보나 깊이로 보나 이야기의 대세를 좌우할 만 한 무게감이 이 책의 미스터리에서는 느껴지지 않거든요. 미스터리 마니아들에겐 조금은 싱겁게 느껴질 법할 정도죠. 그러나 이내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를 트릭의 정교함이나 흥미만으로 생각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수수께끼가 눈앞에 뒹굴고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지는 게 사람 마음이잖나? 사실 난 이런 수수께끼 같은 이야기를 아주 좋아해서 말이지. 그 안경 쓴 유대인 청년은 그야말로 명탐정 같았지. 분말 달걀 외에도 이것저것 이야기를 듣고 싶었는데 워낙 입이 무거워야지” 483


『요리사들』의 미스터리는 ‘어떤 상황에서라도 풀고 싶어 하는 사람의 마음’을 드러내는 수단이었던 겁니다. 그래서였을까요? 소설 후반부에서 전쟁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채 독일 사람들을 향해 비인간적인 적개심을 드러내던 팀 콜은 그러나 끝내 인간다움을 간직하게 됩니다. 그와 함께 미스터리를 풀어가던 동료들 또한 마찬가지였고요.


최근 세계 곳곳에 정치적, 경제적 갈등이 만연하면서 인간성을 포기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자주 들려옵니다. 누군가는 테러리스트가 되고, 누군가는 극우주의자가 되어서 주변 사람들을 해치고 있죠.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죠. 정치적 입장에 따라 편을 가른 채, 온갖 비윤리적인 폭언을 쏟아내는 사람들. 인간성이 얼마나 지키기 어려운지, 새삼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요리사들』의 사람들은 비극에 갇힌 괴물로 남기를 거부합니다. 그리고 끝내 인간성을 지켜내죠. 사람다움을 너무나 쉽게 포기하는 요즘, 마음 따뜻해지는 사람들을 만난 덕분일까요?『요리사들』의 감동이 꽤나 오래 이어질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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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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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잭 리처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혹은 잭 리처를 만날 때마다 느끼게 되는 부분이 있어요. 이 사람이 자로 잰 듯한, ‘정석’ 같은 인물이란 겁니다. 말투나 행동이 딱딱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주죠. 심지어 생각까지도 그렇고요. 리 차일드 또한 이런 인물상을 작정하고 만든 듯한 느낌이고요. 잭 리처에 대한 묘사뿐 아니라, 묘사를 위해 동원한 문장들은 이런 인상을 더욱 깊숙이 새겨넣어요.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끊어치는 단문들에 대한 이야기였어요.


잭 리처의 이 기질은 시계를 거꾸로 돌려놓은 20년 전에도 여전합니다. 1996년 어느 날 아침, 중대한 사건을 해결한 공로로 훈장까지 받은 잭 리처는 그러나 '강등'을 떠올리게 할 만한 곳으로 전출됩니다. 여느 인물이었다면 한동안 빈정을 상한 채 분을 삭이지 못하겠지만, 그는 금방 정신을 수습하고 자로 잰 듯한 추리로 여기에 자기가 왜 왔는지 금방 깨닫게 돼요. 이렇듯 소설은 잭 리처의 제일 중요한 매력 포인트와 함께 시작을 알립니다.


이후에도 잭 리처는 여느 범죄소설의 수사관이 그러하듯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추리력으로 진실에 다가가기 시작합니다. 초창기 단서들만 놓고 보면 정말 쉽지 않은 사건이었어요. 용의자만 해도 20만 명이 넘을 정도였으니까요. 아니, 이걸 어떻게 잡아.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 잭 리처는 해냅니다. 수사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용의자를 특정해내면서 수사의 국면을 완전히 뒤바꿔놓았죠. ‘믿기지 않는’ 추리력이 ‘억지’가 아닌 ‘탄성’으로 이어졌던 건, 개연성 또한 탄탄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이거야!” 이 말을 몇 번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우리가 범죄소설로부터 기대했던 그 쾌감을 『나이트 스쿨』은 초반부터 전해주죠.


그러나 『나이트 스쿨』의 진짜 매력은 칼 같은 추리가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반대로 칼 같은 추리가 자꾸만 산으로 올라가는 모습이 ‘빅 꿀잼’을 전해주었죠. 이 작품에서 유일한 전지전능한 존재인 리 차일드(!)는 마치 잭 리처를 작정하고 골탕 먹이려는 듯 뜻하지 않은 인물과 사건을 쏟아냅니다. 더군다나 잭 리처는 이런 일들을 절대 알 수 없었어요. 그렇게 잭 리처가 알지 못하는 인물이 나타나고 사건이 일어나는 동안 그의 추리는 자주 샛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검거를 자신하던 상황에서 눈 뜨고 용의자를 놓치는 대목이라든지, 도시를 탈출했을 거라고 예상했는데 실은 애먼 곳을 수색했던 순간이라든지. 물론 읽는 순간엔 안타까웠죠. 이 말을 몇 번을 외쳤는지 모르겠어요. “그거 아니야!” 


잭 리처의 헛발질을 두 가지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요. 하나는 ‘재미’의 측면입니다. 범죄소설의 전해주는 쾌감의 본령은 누가 뭐래도 진실, 그리고 그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일 겁니다. 물론 『나이트 스쿨』이 전하는 즐거움이기도 하죠. 끝내 잭 리처는 진실을 밝혀내고 범인을 잡아내니까요. 그러나 잭 리처가 진실에서 멀어질 때 순간 또한 즐거움을 전해주는 대목이라고 저는 생각했어요. 안타깝잖아요. 범인을 못 잡을 것 같아서 긴장하게 되잖아요. 이건 뭐랄까, 소설에서 눈을 못 떼게 하는 기본적인 감정들이죠.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사람이 제아무리 용을 쓴다 한들, 제 눈으로 보지 않은 일에 대해선 결국 까막눈일 수밖에 없다는 점이었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제3의 인물, 또는 다른 범인이 등장하니까 그 기똥찬 잭 리처도 고꾸라지잖아요. 어디 잭 리처뿐인가요. 가령 2년 전만 해도 2017년 11월 이 시점의 대한민국 대통령이 지금의 그 이라고 생각했던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그때 그런 얘기를 하고 다녔다면 틀림없이 나사 빠졌다는 얘기를 들어야 했을 겁니다. 꽤나 뜬금없고 지나치게 철학적인 해석이지만, 사람의 이성이 이렇게 무기력하다는 걸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어쨌든 결론은 추리와 헛발질, 미스터리, 박진감, 개연성. 어느 하나 빠지지 않는 작품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의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나 심오한 함의도 품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가 좀 별점에 후한 편이긴 한데, 네 개는 먹고 들어가야 할 작품이라고 생각했어요. 말인즉슨 이 책에 그 긴 시간을 투자할 가치가 있는지 고민하는 분들께 망설임 없이 권할 책이란 의미입니다. 여러분도 후회하지 않으실 거예요. 


* 덧. 개인적으로 이 책의 사이즈가 참 좋더군요. 손으로 잡기에도 좋을 뿐더러, 책 읽는 기분도 한껏 냈어요. 더 많은 범죄소설 작품들이 이 사이즈로 나왔으면 하는 희망을 미약하게나마 전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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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증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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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작가가 만들었나 싶을 정도로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는 모든 면에서 다릅니다. 해리 보슈가 진지하면서도 독고다이에 고독을 곱씹는 인물이라면 미키 할러는 어쨌든 유쾌하면서도 쿨한 편입니다. 그러나 이런 기질적 차이보다도 중요한 건 진실을 다루는 둘의 태도예요. 해리 보슈에게 진실은 반드시 밝혀내야 할 것이고, 진실 앞에선 그 누구와도 어떤 위협과도 타협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미키 할러는 반대로, 진실은 1도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진실이야 어떻든 자신이 원하는 결론을 관철하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갖다 붙여대죠. 그에게 진실은 그에게 철저히 ‘냉소’의 대상입니다.


네 번째 미키 할러 시리즈인 『다섯 번째 증인』은 이런 미키 할러의 냉소가 가장 뚜렷하게 드러난 작품입니다. 일단 사건의 얼개부터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서브 프라임 모기지 사태 때문에 은행에 집을 빼앗기게 된 리사 트래멀은, 이 사태와 발맞춰 불어 닥친 불경기 때문에 형사 사건을 수임하지 못해 민사사건 수임에 나선 마이클 할러에게 변호를 청탁합니다. 그러나 진짜 사건은 (당연하게도) 형사재판에서 일어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은 미키 할러가 리사 트래멀의 체포 소식을 듣게 되거든요. 바로 리사의 집을 압류하려는 은행의 부행장을 살해한 혐의로 말이죠.


극적으로 자기 분야로 돌아온 미키 할러는 작정한 듯 리사 트래멀의 혐의를 벗기기 위해 사방팔방 뛰어다닙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미키 할러의 목표입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리사 트래멀의 무죄 판결이에요. 그는 리사 트래멀의 진실에 관심이 단 하나도 없습니다. 철저히 무죄 판결 하나만을 보고 움직입니다. 진실에 대해선 철저히 냉소로 일관하죠. 진실을 중요하게 여기는 신참 변호사 제니퍼 애런슨을 아이 취급하고, 그가 내내 리사 트래멀에게 “나는 진실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하면서요.


소설의 재미 대부분은 미키 할러의 이 냉소에서 비롯됩니다. 법정에서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끊임없이 원고를 향해 잽을 날리고, 또 상대방의 잽을 받아내고 있어요. 이 과정을 지켜보는 재미가, 단언컨대 이전의 시리즈 이상이라고 장담하는 바입니다. 유능한 검사를 바꾸기 위한 공방, 증거 채택을 위한 검사와 변호사의 머리싸움, 같은 증거를 배심원에 다르게 설득하기 위한 논리싸움까지. 개인적으로 법정 소설이 보여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걸 보여줬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이 모든 긴장과 카타르시스는 미키 할러의 냉소가 아니었다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게다가 『다섯 번째 증인』이 더 흥미로운 건 건, 미키 할러의 냉소에 대한 독자들의 은근한 동조하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어요. 소설 속에서나마 미국의 법정 제도를 경험한 사람이라면 적어도 미키 할러의 냉소를 이해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피고인, 변호사, 검사의 손짓 하나가 유무죄를 가르는 시스템이다 보니 ‘보이는 것’에 더욱 신경을 쓸 수밖에 없죠. ‘보이는 것’들이 오가는 법정에서의 전쟁이 더욱 치열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었던 것 아닐까요?


(아래부터는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미키 할러의 냉소는 법정의 사소한 다툼에 활력을 불어넣는 것을 넘어, (무언가 이상하긴 해도) 작품 전체의 완성도를 높이는 역할을 수행합니다. 미키 할러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모든 걸 동원해 리사 트래멀의 무죄 평결을 받아냈고, 독자 또한 배심원과 같은 곳으로 인도하지만, 이내 어떤 일을 계기로 리사 트래멀이 진범이었다는 사실을 깨달아요. 미키 할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완벽한 반전을 만들어냈던 거죠. 진실에 대한 냉소를 과신한 나머지 뒤통수를 세게 맞은 형국인데, 어디 미키 할러만 그랬겠습니까. 저도 뒤통수가 꽤나 얼얼하던 걸요. 


사족을 하나 덧붙이자면, 이건 순전히 (망상일지도 모르는) 혼자만의 추측인데요. 이런 재미난(?) 반전을 이끌어낸 것은 플롯에 더해 미국 사법제도에 대한 작가의 불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미키 할러가 무죄 평결을 받아낸 과정을 살펴보건대, 미국 법정은 선전 선동이 단서를, 나아가 진실을 이기는 공간입니다. 자신의 페르소나인 해리 보슈가 그토록 갈구하는 진실이 이기는 곳이 아니에요. 그 누구보다도 ‘미국 변호사’다운 미키 할러가 미국 법정에서 요구하는 행동을 따르다, 고꾸라진 거죠. 이게 정말이라면, 음, 뭐랄까, ‘반전 하나에도 이렇게 뜻깊은 의미가 있었구나’ 싶으실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해석이 과했을 가능성이 높은 사족일 뿐입니다. 애당초 창착자들이 이런 식으로 창작을 이렇게 하지도 않는 것 같으니 재미로나 읽어주세요.


어쨌든 결론적으로 『파기환송』 이후 1년 넘게 기다린 보람을 충만하게 채워주었습니다. 주워듣기로는 다음 소설인 『낙하』도 올해 안에 출간된다고 하는데, 그게 사실이라면 코넬리 마니아, 코넬리 사랑꾼인 저로서는 나름 괜찮은 한 해가 될 것 같습니다. 아, 『다섯 번째 증인』이 그 괜찮은 한 해의 귀퉁이를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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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하인드 도어
B. A. 패리스 지음, 이수영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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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소를 모르는 완벽한 변호사이자, 출중한 외모와 매력으로 무중한 남편 잭 앤젤. 이 완벽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그레이스. 누가 어떻게 보아도 완벽한 부부의 삶의 이면은, 비틀린 욕망과 공포로 가득 차 있다. 잭은 사실 아내와 자폐증을 앓는 처제 밀리를 학대하며 삶의 자양분을 얻는 사이코패스였고, 그레이스는 완벽을 고통스럽게 연기해야 하는 처지다.


『비하인드 도어』는 이렇듯 공포를 조장하는 잭과 공포로부터 탈출하려는 그레이스, 두 캐릭터를 기둥 삼아 이야기를 세워간다. 당연하게도 두 개의 축이 조화를 이룰 때 재미와 완성도 모두를 보장한다. 


이런 차원에서 잭이라는 인물은 조금 아쉽다. 작가는 끝없이 잭의 완벽함을 강조하지만, 읽는 입장에서 그 완벽함에 공감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에피소드 하나 없이, "완벽한 외모", "승소율 100%" 같은 수식어로만 설명하는 완벽함은 얼마나 공허한가. 그레이스에 대한 잭의 감시나 처벌 또한 완벽과는 거리가 멀어 보였다. 설득력과 완성도가 아쉽다 보니, 이야기도 그의 앞에서 유난히 힘이 없어 보였다.


그러나 반대편의 그레이스는 잭보다 내 눈길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당연히 그녀가 '착한 편'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동생 밀리를 보호하려는, 나아가 삶에 대한 의지가 강력했고 그 힘이 읽는 나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의지를 바탕으로 도무지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무언가를 시도한다. 그리고 이 소설의 모든 인상적인 순간들은 어김없이 그녀의 시도가 만들어낸 것들이었다. 동시에 『비하인드 도어』를 더 좋은 소설로 만들었던 대목이었다.


『비하인드 도어』는 이렇듯 강렬함과 아쉬움이 뒤섞인 소설이었다. 그러나 왠지 모르게 이 작가의 다음 소설을 기대하게 하기도 했다. 더 나은 악역만 있다면, 더 큰 에너지를 전할 수 있을 테니까.



* 서평 이벤트로 제공받은 책을 읽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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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증인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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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넬리 소설이 늘 그렇듯 <다섯 번째 증인>의 또한 결론만큼이나 과정이 재밌는 소설. 법정에서 미키 할러가 날려대는 잽에 낄낄댔고, 그리고 미키 할러를 향해 날아오는 주먹에 긴장했다. 그렇게 잔주먹들이 쌓아올린 결론은 뒤통수에 작지 않은 충격을 남긴다. 내가 이러려고 이걸 기다리지 싶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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