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인터넷 핑계를 대고 싶진 않지만 (생각의) 호흡이 점점 짧아지고 있다. 구어체와 짧은 스크롤에 익숙해지면서 긴 글을 읽는 일은 지겹거나 귀찮고, 긴 글을 읽는 일이 드무니 생각도 진중하지 못하고 산만하다. 인터넷 서점 덕에 책은 쉴 새 없이 사들이지만 몇십페이지만 읽고 던져버리는 경우가 점점 늘어난다.
그런 차원에서, 문고판은 일종의 '전략'이다. 읽기에도, 사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은 책. 한 때 국내외 문학작품들을 값싸게 공급해왔던 문고판들이 이제는 인문, 사회과학의 관문 역할을 자임하고 나섰다. 이슈 위주로 접근하되 너무 가볍지 않게, 독자들의 무지를 일깨우기보다 지적인 허영을 충족시켜주는 쪽에 무게 중심을 둔 문고판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침체기라는 출판 시장의 돌파구인지, 혹은 출판 시장의 사양(斜陽)을 짐짓 외면하려는 슈가 코팅인지 판단은 아직 유보된 채다.
살림에서 내놓은 '살림지식총서'는, 두어권 읽은 뒤 나온 섣부른 판단일지는 모르나, 후자쪽에 가깝다는 의심이 든다. 미국과 신화, 대중문화를 주제로 펴낸 문고판 20여권은 '기획의 승리'임에 틀림없지만, 크고 시원시원한 활자에 100페이지가 채 안되는 분량은 문고판이 부실한 내용의 변명일 수 없다는 생각을 굳힌다. 아니, 오로지 혐의는 김성곤 선생의 책이 (기대보다) 평이했다는 데 있다.
<영화로 보는 미국-할리우드 영화의 문화적 의미>는 그 거대한 제목에 비해 내용이 너무 빈약하다. 정치한 분석보다는 개념적 유형화에 힘쓰다 보니 각 유형별로 수많은 영화들이 언급되고 있는데, 그것이 오히려 어쩐지 아쉬운 감정을 이끈다. 김성곤 선생은 이 책의 목표를 '영화가 문화 연구의 텍스트가 될 수 있다는 첫 인식 단계에 독자들을 데려오는 것'쯤으로 잡으신 듯 한데, 선생의 역량에 비해 너무 쉬운 목표가 아니었나 싶다.
그나저나 그 '출발 단계' 언저리를 궁시렁 궁시렁 배회하면서 더 이상 나아가기는 귀찮아 하고 있는 내가, 이러구러 제일 형편없는 문고 사이즈 인간이었던 셈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