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NA를 치유하는 영성 - 우리가 꼭 알아야 할 DNA의 비밀
박영호 지음 / 일송북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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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저자 소개가 잘못 연결되었네요^^ 동명이인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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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딘고객센터 2014-01-16 18: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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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제리 혁명 5년
프란츠 파농 지음, 홍지화 옮김 / 인간사랑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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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가볍다

알제리 혁명 5(프란츠 파농 씀 홍지화 옮김)

 

아무리 불합리하게 느껴질지라도 죽은 듯이 있어라. 저들은 너무 강해서 결코 뜻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들은 자녀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이 한숨 섞인 충고 속에는 미안함과 울분과 체념의 감정들이 복잡하게 섞여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가 이렇게 흘러가선 안 된다. 뭔가 잘못되었다.’라고 생각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밖으로 표현하는 것조차 서투르다. 모두들 사회에 대한 불만과 반발심을 가슴에 품은 채 불합리하다고 여기는 체제 속에 녹아들려고 노력한다. 욱하는 마음이 조금 남아있을 뿐,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무기력함과 피로감이 사회에 만연하다. 이것은 혁명 전 알제리의 모습이다.

알제리는 제국주의 프랑스의 초기 식민지 중의 하나였으며 프랑스가 마지막까지 놓지 않았던 최후의 식민지였다. 알제리인은 식민지배자에게 미개하고 어리석다는 멸시와 조롱을 받고 모국어를 잃은 채 130여 년 동안 프랑스의 식민 지배를 받았다. 그런 알제리에 혁명의 불길이 일어나기 시작할 무렵에 프란츠 파농은 정신과의사로 알제리에 입국했다. 파농은 혁명기간 동안 알제리 민중들과 깊숙이 접촉했고 알제리 혁명 5은 그러한 알제리의 평범한 인민들의 삶에 대해 써낸 책이다. 작가는 알제리 혁명이 어떻게 시작되었고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를 알려주지는 않는다. 그가 보여주는 것은 혁명이 인민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에 대한 분석이다.

알제리 인민은 프랑스인이 될 수 없었다. 그들은 주체성을 가질 수 없었고 프랑스인의 도구로 여겨졌다. 130년간 강요된 수동성에 그들은 지쳐있었다. 불씨를 피워내도 그 불을 살려낼 땔감이 없는 것처럼 소진되어 보였던 알제리 민중들은 혁명을 받아들이고 나서 삶의 의미를 되찾는다. 그러나 그들이 혁명을 접한 곳은 적과 대치하고 있는 전쟁터가 아니다. 히잡, 라디오, 프랑스어, 가족, 의료 등 지극히 사소해 보이는 부분에서 작가는 혁명의 숨소리를 포착했다. 파농은 이에 대한 서사를 통해 혁명이 얼마나 사소한 것이며 인민의 삶과 가까운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한다. 또한 살펴볼 만한 부분은 혁명전사라는 말의 쓰임이다. 평범한 이웃집 청년이든 수줍음이 많은 여동생이든 무기력해하던 남편이든 모두 혁명전사가 되어 혁명을 움직인다. 특별할 것 없는 한 명의 알제리인이 움직일 수 있을 정도로 혁명이 가벼운 것이었음을 읽어 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평범한 알제리인이 자신의 혁명에 대해 담담하게 써내려간 수기인 부록은 그 가벼움을 극적으로 형상화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책이 독자에게 친절하지 않다는 점이다. 매끄럽지 못한 번역은 이 책의 접근장벽을 높이는 요인 중에 하나이다. 무슨 뜻인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아 같은 문단을 두 번, 세 번 읽다보면 지쳐버려서 책을 깊게 이해하는 것이 어렵게 된다. 또 알제리란 국명조차 생소한 독자들을 위해 책의 앞이나 뒤에 알제리전쟁에 관한 간단한 설명이나 그 과정에 대한 연표를 덧붙여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알제리 전쟁에 관해 배경지식이 없을 경우 이따금 이야기되는 굵직굵직한 사건들에 어리둥절할 수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통계에 의하면 20대에서 40대까지의 나이 대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국민 중 절반에 가까운 사람들이 작은 공동체, 덜 풍요롭지만 여유가 있는 사회를 희망한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다가올 것 같은 미래로는 지금의 사회기조가 이어져 높은 마천루와 불야성으로 상징되는 첨단자본주의사회가 도래할 것 같다고 답했다. 많은 사람들이 사회에 불만을 품고 있지만 변화 가능성에 대해 회의를 느끼고 체제에 순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우리사회에서 혁명이란 말은 너무 거대하고 실제 삶과는 멀찍이 떨어져있는 허황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알제리도 그러했다. 그러나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았던 견고한 체제가 불만이 공론화 되는 순간부터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우리에게도 혁명이 필요하다.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사람들과 나누는 순간부터 혁명은 움직이기 시작할 것이다. 우리 삶의 사소한 부분에서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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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와 비폭력 저항 - 제3의 길
윌터 윙크 지음, 김준우 옮김 / 한국기독교연구소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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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에 들어서 “예수는 없다”, “예수는 신화다”라는 도전적인 제목의 책들이 기독교의 현주소를 돌아보게는 했지만, 예수와 그의 복음을 만나게 하는 데는 미흡했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연구소의 김준우 교수가 번역한 월터 윙크의 “예수와 비폭력저항(Jesus and Nonviolence: A Third Way)”은 이천년 전의 예수와 그의 복음을 직접 만나게 해줄 뿐만 아니라 현대에 적용가능하게 해주는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은 책이다.

또한 우리는 작년에 미국의 이라크전쟁 동맹계획을 막았던 역사상 전례가 없던 최초의 세계적 반전평화운동(2003년 2월 15일, 3월 15일)의 힘을 보았는데, 이 책은 김준우 교수의 말대로 기독교 근본주의와 군사주의가 만나 군사패권주의 라는 전쟁경제체제를 유지하는 상황에서, 폭력극복과 평화정착을 위한 구체적 방법을 제시한 책이다.

윙크는 최근의 비폭력 투쟁의 성공사례들과 통계를 들면서 비폭력저항은 성공하지 못한다는 통념을 깨뜨린다. 그리고 비폭력이라는 용어 자체가 부정적이어서 악에 대한 무력함이나 도피를 말하는 것처럼 들릴 뿐만 아니라, 복음이 왜곡된 상황에서는 비폭력이 수동성 내지 무저항을 뜻하였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일부 평화주의자들이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고난보다 자신들의 의로움에 더욱 관심을 쏟는 것은 예수의 제 3의 길인 비폭력저항을 외면하는 이기적인 행동이며, 깨끗한 손과 더러운 심장을 지닌 채 죽으라는 악마의 유혹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윙크는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불의를 참지 못하고 바로 잡으려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의 비폭력에 관한 가르침을 단순히 실천할 수 없는 이상주의라고 치부해버리는 것은 큰 오해이며, 예수는 결코 그렇게 살거나 가르치지 않으셨다고 강변한다. 오히려 예수의 가르침은 역사상 이제까지의 어떤 발언보다도 가장 혁명적인 정치적 선언 중의 하나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마5:39)는 말의 참된 의미는 ‘악한 자에게 저항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악한 자에게 맞서서 폭력으로 대응하지 말라’는 것이다. 악에 대해 반로마 투사들 못지않게  대항했던 예수는 악에 대항하기 위해 수동적 태도를 취하거나 폭력적으로 대항하지 않고 제 3의 길인 전투적인 ‘비폭력’을 택했다는 것이다.

윙크는 이를 실증하기 위하여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누가 너를 고소하여 네 겉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누가 너더러 억지로 5리를 가자고 하거든”, 세 가지 예수의 말씀을 예로 든다. 그리고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변화된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법칙화되거나 불가능하기 때문에 예수의 은혜를 구할 수밖에 없는 것처럼 변질시킨 이 말씀들의 진정한 의미를 회복하여, 예수가 하나의 생활방식으로 열어놓은 악에 대한 비폭력저항의 탁월성을 밝히 보여준다. 그리고 예수의 제 3의 길의 핵심은 “원수사랑”이며, 현대에 와서는 원수사랑이 참다운 기독교 신앙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었다고 강조한다.

윙크는 우리 시대는 원수를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에게 다가갈 수 있는 다른 길이 없는 테러리즘의 시대이기 때문에, 우리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 모두에게 햇빛을 비춰주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거나 더 이상 새날을 보지 못하거나 선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억압적인 법에 대항하면서도 법의 지배를 존중해야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 속의 폭력을 뿌리뽑아야 한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러한 제 3의 길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십자가의 길이며, 훈련과 연합된 투쟁을 요구한다고 독자들에게 주문한다.

이 책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꼭 읽어야 할 책이며, 예수의 복음의 진수를 맛보게 하는 책으로서 강력히 추천하며, 이 책의 원판으로 곧 출판될 <사탄의 체제와 예수의 비폭력>도 적극 추천한다. (한성수 역, 한국기독교연구소, 200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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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신약 - 복음신학 총서 제3권
손병호 지음 / 유앙게리온 / 200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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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제목이 오기되었네요. 고쳐주세요.

복음신학전집 제1권인 기독교와 복음도 있던데, 함께 등재되었으면 좋겠네요.

복음과 신약은 손병호 박사의 복음신학전집 제 3권이다. 복음과 구약이 나온지 거의 1년만에 나온 이 책은 2권에서 문제제기한 것을 실제적으로 대차대조하여 보여준 것인데, 가히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서구신학을 답습하기에 급급한 한국적 신학풍토에서 새로운 패러다임과 새로운 장르로서의 복음신학을 주창하는 손박사는 제 3권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온전하게 담아내기 위한 밑바탕 작업을 철저하게 하였다. 지금까지 기독교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of)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about) 복음"의 차이를  제대로 구별하지 못한 것을 확실하게 구별하여 비교분석하여 준 것이 참으로 놀랍고 귀한 것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바울은 예수로부터 직접 사사를 받은 사도가 아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직접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선교사에 지나지 않았다. 바울서신에는 예수가 말씀한 복음은 불과 한 두어 절 밖에 없으며, 나머지 전부는 바울이 17년간 아라비아에서 정립한 유대주의와 영지주의와 신비주의에 지나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이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자리잡기 이전에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복음, 즉 바울의 복음이 먼저 자리잡은 관계로 오늘까지 이것이 기독교와 교회의 정통주의와 근본주의와 보수주의의 근간이 되고 만 것이다. 참으로 가슴아픈 일이 아닐 수 없다.

기독교 이천년 역사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발견하고 이를 주장한 소수의 사람들이 있었지만, 여지없이 묵살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제는 역사의 흐름 속에서 다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빛이 어두움을 뚫고 나왔다. 예수의 밭에 감추인 보화의 비유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임자를 만난 것이다. 테러와 전쟁이 그치지 않는 지구촌의 신음소리를 들으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천년 전에 이땅에 오셔서 전해주셨던 "서로 사랑"(하나님 사랑, 이웃사랑, 원수사랑의 삼위일체)의 복음이 아니고서는 인류공동체가 살 길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용서와 화해와 공존과 상생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땅에서 인류가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살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겸손히 귀기울이고 그것을 실천하는 길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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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과 구약 - 복음신학 총서 제2권
손병호 지음 / 유앙게리온 / 200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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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된 기독교와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보다 구약대로 쓴 바울의 복음으로 기초를 놓았다. 2,000년이 지난 지금 기독교와 교회는 예수의 복음과는 상반된 모습이며, 다시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 종말적 현상에 있다. 

새 천년대를 전후하여 여기 저기서 "근본으로 돌아가자(back to basic)"는 목소리가 들리자 저마다 자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변화를 시도하는데, 기독교와 교회는 여전히 큰 변화의 흐름에서 예외가 되고 있다. 기독교인으로서 안타까와하며 가슴을 치고 있는데, 손병호 박사의 책을 만났다. 손병호 박사의 복음신학전집은 정말 제5복음서와도 같은 책들이다.

구약과 복음은 그중 2번째 책인데. 기독교와 교회가 얼마나 구약적이며 유대교적인지를 돌아보게하며, 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역사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세기는 말할 것도 없고 새 천년대를 맞으면서도 테러와 전쟁이 그치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게한다.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까지 사랑하므로 인류가 땅에서도 세상과 더불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기를 원하셨던 예수를 만나게 된다.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살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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