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정수일 지음 / 창비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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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동과 정수일은 한국의 인문학계가 자랑하는 두 석학이다. 모두 중앙아시아학을 필생의 업으로 삼고 공부에 전념하는 학인들이고. 두 사람은 여러 면에게 인문학을 전공하는 사람들에게 모범을 보여준다.


우선 이들은 모두 언어학의 천재들이다. 천재라고 쉽게 말하지만, 기실 그 엄청난 공력을 쌓기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피맺힌 수련을 했으리란 것은 너무나 자명하다. 교류의 역사일 수밖에 없는 중앙아시아학의 속성상 이들은 적어도 7, 8개의 언어에 달통하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게다 그 언어들이란 게, 언어사용자 수가 많지 않은 소수의 언어, 지구상에서 사라져가는 유목민족의 언어라니. 두번째로 이 도구(언어해독능력)들을 이용해 제1차 사료들을 번역해낸다. 학문적인 성과의 제일은 바로 원전의 이해(번역)임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견문록'이나 '이븐 바투타의 여행기'를 갖게 된 것은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세번째 그 원전 이해를 바탕으로 자기들만의 이론적 세계의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한다.


이렇게 차분하고 오랜 시간 준비해야 비로소 하나의 학문적 세계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직접 보여준 것에서 공부에 뜻을 둔 사람들이 큰 계몽을 받을 것이다.


서로 다른 문화적 토양에서 자란 두 사람의 글을 읽을 때마다 묘한 차이점과 유사점을 발견하게 된다. 김호동 교수의 정갈한 글과 정수일 교수의 유장한 글은 각각 그 맛이 다르다. 하지만 문명교류사를 연구하는 학자라는 접점이 보여주듯 타자의 시선에 대한 개방된 정신자세, 중화중심주의로 상징되는 대초원의 거짓 이데올로기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비판적 칼날의 예리함은 사뭇 닮아 있다. 김호동의 역사에세이 '황하에서 천산까지'를 보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던 때가 있었다.


김호동은 오로지 자신의 학술계획(몽골의 제국사)에 따라 치밀하게 움직이고 다른 일은 하지 않는다. 그에 비해 어떤 면에서 보면 정수일은 돈 키호테적인 인물로, 학문세계와 현실세계의 교섭을 시도했던 모험가다. 만주(연변)에서 流民의 아들로 태어나  중국의 최고 학부에서 최고 대우를 받으며 그곳에서 정착해 편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사람이지만 민족적 자긍심, 민족 지식인의 소임이 무엇인지를 고민하며, 일부러 가시밭길을 걸어왔던 사람이다. 하지만 송두율 교수의 예에서 보듯 그의 행위는 어디까지나 학문적 작업을 중심에 놓고 이루어진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그 좋은 자료가 바로 '우보천리'인 것이다.


김호동의 역사에세이보다 사적이고 내밀한 기록이다. 감옥의 글들이 그렇듯 절절함과 인생을 바라보는 겸손한 시선이 시종 읽는 사람에게 은은한 울림을 안겨준다. 옥중에서 영어의 몸임에도 치밀하게 학술계획을 세워 불굴의 투지로 이를 실천하는 모습은 감동적이다. 그의 옥중편지에서 밝힌 내용이 거짓된 것이 아니었음을, 그가 요 몇 년 사이에 쏟아놓은 연구성과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이 책 속에서 가장 인상깊은 것은 아내를 생각하는 마음이다. 한 사람의 사랑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얼마나 아름다운 것이고 절망에 빠진 사람에게 어떤 힘을 발휘하는지 잘 보여주는 편지글들! 소리꾼에게 그늘이 없으면 그가 뽑아내는 소리는 긴 여운과 감동을 주지 못한다. 아름다운 그늘이 깃들인 한 뛰어난 인문학자의 섬세한 내면, 내밀한 자기성찰을 같이할 수 있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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