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엄마 아빠는 서로를 제일 싫어해." 그날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투이는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나를 쳐다봤다.
꼭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의외의 반응이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 투이는 그 말을 하고는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여느 때처럼 다시 내 쪽으로 돌아오리라고 생각했지만 그애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조금 당황했을 뿐 그 일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 야자를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갈 때면 ‘넌 왜 그런 얘길 하면서 웃어?‘라고 말하던 투이의 어린 얼굴이 생각나곤 했다. 나는 그애를 조금도 알지 못했었어. 유년을 다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애를 다르게 기억하기 시작했다.

p.73
씬짜오, 씬짜오

응웬 아줌마는 나에 대해 많은 것을 물어봤다. 한국에서 다니던 학교는 어땠는지, 베를린에서의 생활은 만족스러웠는지, 바다를 가보았는지, 한국의 바다는 어떤 색인지, 가장 좋아하는 독일 음식은 무엇인지. 아줌마의 질문은 공부는 잘하냐, 왜 이렇게 키가 작냐, 커서 뭐할거냐 물어대는 다른 어른들의 것과는 달랐다. 진심 어린 관심을 받고 있다는 기쁨에 나는 두 볼이 빨갛게 달아오를 때까지 아줌마 앞에서 떠들어댔다.

p.75
씬짜오, 씬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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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코는 잠시 침묵하더니 입을 아주 작게 열고 한숨을 쉬듯 말했다.
"네가 그리웠어."
나는 쇼코가 조금 미워져서 나도 네가 보고 싶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내가 그리웠었다는 그 말에 눈물이 났다.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 쇼코를 생각하면 그애가 나를 더이상 좋아하지 않을까봐 두려웠었다.

p.24
쇼코의 미소

순결한 꿈은 오로지 이 일을 즐기며 할 수 있는 재능 있는 이들의 것이었다. 그리고 영광도 그들의 것이 되어야 마땅했다. 영화는, 예술은 범인의 노력이 아니라 타고난 자들의 노력 속에서만 그 진짜 얼굴을 드러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다. 그 사실을 인정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재능이 없는 이들이 꿈이라는 허 울을 잡기 시작하는 순간, 그 허울은 천천히 삶을 좀먹어간다.

p.34
쇼코의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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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누나들은 그날의 내 행동을 오래도록 비난했고 내 철없던 시절의 우스개 이야기로 삼았다. 나는 변명하지 않았는데 그녀들이 내 속마음을 모른다는 게 통쾌할 정도였다. 그리고 합격 발표하던 날 아버지의 기쁜 얼굴 위로 흐르던 눈물이며 그의 눈빛과 표정에 지친 가장의 기색이 떠오르던 일도 절대로 가족 누구에게 말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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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부모는 누구였을까. 지금은 그들과 함께했던 일상들이 모래 속의 금빛 은빛 싸라기 조각들처럼 기억 속에 흩어져서 반짝이고 있다. 모습은 어느 장면 하나 또렷하지 않고 희미하다. 회색 시멘트 담과 언제나 언덕처럼 곳곳에 쌓여 있던 석탄더미들.
기관차의 화물차량 뒤를 쥐새끼처럼 쫓아가며 땔감 코크스를 줍던 아이들, 국방색 작업복에 똑같이 하얀 칼라를 내놓은 차림의방직공장 처녀들, 검은 무명팬티만 입고 벌거벗은 채 뛰어다니며 쌍소리를 하던 영단주택 노동자의 아이들, 공장 폐수가 끊임 없이 흘러가던 학교 가는 길, 죽은 쥐, 버려진 제웅, 그리고 실직한 노동자들이 몰려 살던 부서진 화물차들, 그 양지 쪽에서 해바라기하던 아이들, 미군부대의 철조망이 가로막은 여의도 일대의쓰레기 더미, 틈틈이 잡초가 보이고 녹슨 깡통 사이로 피어나던오랑캐꽃과 민들레 자운영 냉이꽃 같은 작은 풀꽃들, 이런 것들 이 영등포에서의 내 어린 날의 기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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