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이란 무엇인가 - 연기법, 세상의 ‘자아 없음’을 말하다
신용국 지음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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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의존성 연기법의 불교에선 책임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최근에 나온 불교 저작인데, 불교의 무아를 무자아로 해석하고 조건의존성으로 이해한다.

필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불교 내용들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내용들도 많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절반은 공감하고, 나머지 절반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선 필자가 저자의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지점들부터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기존의 마음불교, 견성불교, 유식불교, 혜능이 틀렸다고 언급한 대목들은 필자 역시 공감하는 지점에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선 오히려 기존 불교 사상가들 사이에선 논란도 있을 수 있겠다.

분명한 사실은 불교의 현주소는 그만큼 불교진영 안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서로 간에 상충되는 갈등들이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불교 철학이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왜곡되어 있는지 그러한 점도 이 책의 저자는 그 나름으로 잘 정리해서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대목도 없잖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과 불교 사상이 유사하다고 하면서도 불교를 결국 '비실재론'으로 제시한다. 아마도 저자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실재론realism이라는 점은 잘 몰랐던 걸로 보인다. 만약에 알았다면 실재론의 또 다른 범주가 가능하다는 점도 함께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실재론인 화이트헤드 철학과 비실재론인 불교가 서로 유사하다고 보는 주장은 되려 의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아마도 '실체'와 '실재'를 혼동했을 수 있다. 관계와 과정의 실재론인 화이트헤드 철학은 비실체론적 실재론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결정적으로 비판하고 싶은 지점은, 저자의 불교 이해에서도 그 역시 책임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아예 상실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이를 테면 무자아를 언급한 다음의 내용을 직접 들여다보자.

...............
(*저자의 책에서 발췌 인용, 밑줄은 나의 표시)

무자아에 대한 질문들

내 생각과 내 의지로 움직이는데 그런 나를 어찌 없다고 하는가요?

― 내 생각과 내 의지가 아니라 인연(조건)에서 생각이 생겨나고 욕망이 생겨나고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십이연기가 말하듯이, ‘나’라는 것은 그런 조건의존적 생각, 욕망, 의지의 쌓임[集]일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 생각, 욕망, 의지의 주체라는 관념은 의식이 조작한 기만에 불과합니다.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만 본다면 책임적 주체를 논할 수가 없잖은가. 여기서 보듯이 타자원인성만 얘기하고 있기에 자기원인성(자기창조성)을 실재적으로 논할 자리가 없다.)



만일 욕망과 그로부터의 생각을 ‘나’라고 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요?

― 생각, 욕망, 의지는 인연에서 형성된 것이고, ‘나’는 생각, 욕망, 의지로부터 형성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 욕망, 의지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만들어진 요리가 요리를 만드는 재료들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형성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 내 생각으로 나를 형성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미 내가 존재하는데 왜 다시 나를 형성하겠습니까?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연기한 생각이고, 연기한 생각들로 나를 형성하는 것은 무명한 욕망의 탐진치 습성입니다. 왜 무명한 욕망이냐면 자아가 없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기어코 자아의 존재로서 존재하려는 망상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탐진치 습성은 이 망상의 욕망이 삶에서 축적하는 버릇,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습관들이 갈애하는 생각들에 취착합니다. 취착은 또한 생각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지요. 이 갈애와 취착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를 의식의 기만이라고 하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 사람들은 의식이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의식의 주체인 듯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욕망의 습성이 취착하는 생각의 무더기에 불과합니다. 붓다는 오온연기에서 생각의 무더기인 의식을 ‘식온識蘊’이라고 이름하셨지요. 생각들의 무상한 무더기에 불과한 줄 모르고 의식은 ‘나는 생각의 주체로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관념은 그런 망상의 결과인 셈이지요. 그래서 ‘의식의 기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이 몸이 생각, 욕망 등의 주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몸을 ‘나’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 만일 몸이 나라면 나에게 병(나 아닌 것)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생긴다고 해도 금방 알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몸(나)을 알지 못하고 병이 생기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나도 알지 못하고 나 아닌 것도 알지 못하는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몸이 ‘조건의존적 신경계’라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나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

윗글에서도 보듯이 생각, 욕망, 의지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것이 어떤 욕망인지 어떤 생각인지 어떤 의지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컨대 생명살림과 평화실현를 향한 욕망들도 있을 터이고 다양한 맥락적 생각, 욕망, 의지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생각, 의지, 욕망들 자체를 부정적 관점으로 보거나 굳이 부정시 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욕망 집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욕망하고 집착할 것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자비로운 보살되기를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은 어떤 류의 욕망 집착에 속하는 것일까? 필자의 입장에선 욕망 자체를 부정시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창조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바는, 나는 이러한 불교 사상에서는 책임적 자아를 성립케 하는 자리를 찾긴 힘들다는 점이다. 왜 그토록 자아를 부정시해야 하는 것일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설령 '가상의 나'라고 하더라도 이를 꼭 굳이 부정적으로만 봐야 할 것인가?

아니나다를까 이 책의 저자는 조건의존성과 대척된다고 보는 자유의지를 관념으로 보는 입장(뇌과학의 실험 등을 근거로)을 내세우고 있어, 그야말로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적 주체를 말할 자리마저 찾기 힘들다.

자유의지마저 관념으로 보게 되는 건, 이미 저자가 연기 현상을 조건의존성으로만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 한계를 엿볼 수있다. 왜냐하면 조건의존성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보면 타자원인성에만 속하는 것이며, 자기원인성은 아니다(참고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타자원인성과 지기원인성을 함께 인정하고 있다)

저자가 이해하는 관계의존성은 타자원인성만 자리하고 있고 자기원인성은 이미 상실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책이 현재까지의 불교 사상을 그 나름으로 정리해서 일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읽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마음불교, 유식불교, 혜능, 견성불교를 대놓고 까는데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본다.

이 책에선 여래장, 불성, 참나를 주장하는 불교를 붓다가 그토록 반대했던 힌두이즘의 '범아일여'로 다시 회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이 점은 본인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기존 불교 진영 내에서도 이 점은 여전한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최근에 나온 이 책을 통해서도 결국 불교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거대한 혼동, 혼란들이 각각의 불교 입장들로서 남아 있다는 점을 여실히 확인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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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플라시보다 - 원하는 삶을 창조하는 마음 활용법
조 디스펜자 지음, 추미란 옮김 / 샨티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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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연구보고서로는 괜찮다. 그러나 이것이 무슨 일체유심조의 증명이나 마음먹기로 다 해결된다는 식은 곤란하다. 플라시보로 공중부양이 불가능하듯이 어디까지나 물리적 제약과 한계 속에서 새로운 전환과 유용한 계기로 갈 수 있음을 알려줄 뿐.플라시보를 맥락 효과로 보는 이해와 같이 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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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가 당신을 실망시켰다면
라비 재커라이어스 지음, 권기대 옮김 / 에센티아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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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제 핵심을 정말 헛짚고 있는 책이다. 자기들만이 진짜 구원이라는 그 배타적 교리 때문에 사람들이 실망한 것임을 모르나보다. 결국 소통 불가, 비판 불가의 교리 문제(지옥 교리의 허구성만이라도)를 정면으로 다뤘으면 몰라도 전혀 그렇지 않다! 기독교 변증이란 그냥 일관된 변명을 뜻한 것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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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Slump 2019-05-04 01: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하지 않고 읽어보시지도 않으시면 비판하시는게 참 안타깝습니다. 이 책은 교리적인 내용을 변증을 주로 말하는게 아닌데 말이죠.
읽어보시지도 않고 무조건적으로 별점에다 악플 다시는 님의 댓글이 바로 님이 말하는 배타적 마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Misun 2019-05-04 15:10   좋아요 0 | URL
죄송하지만 이미 교보에서 읽고 말씀드린 겁니다. 이곳에 구입표시 안떴다고 책을 안읽었다고 생각하시는 건 오산이십니다. 다행히 구입 안하길 참 잘했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물론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의 평가는 다를 수 있겠습니다. 그리고 라비 재커라이어스 책은 위의 책외에도 다른 책도 이미 읽었던 적이 있어 어느 정도 이 사람의 입장을 알고 있다고 생각되어 말씀드린 것이랍니다.

Dr.Slump 2019-05-0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시군요. 라비 재커라이어스 다른 책들은 교리적 변증 위주인데 이책은 교리변증 내용이 주가 아니라서 님의 평점 댓글과 본 책내용과 달라서 책을 안읽어보시고 댓글 다신거 아닌가 오해했습니다. 그런데 거의 님의 모든 비평을 보면 이책 뿐만 아니라 비평하신 기독교 책은 구매 ‘무‘에다 주내용과 상관없는 내용을 겉도는 ‘비난‘만 하셔서 이게 본책들에 대한 비평인가 아님 악플인가 생각이 들게 합니다. 또한 기독교비판서도 마찬가지로 ‘무‘구매지만 별점을 후하게 주시고요. 이게 타인이볼때 비평이 아닌 악플이지 않을까 합니다. 아쉽더군요. 특히나 저자가 보면 자신의 책의 주요 내용의 비평이 아닌 단순한 기독교 비난에 겉도는 정보의 비평이면 노력과 땀으로 만든 책 지은이로서 씁쓸하지 않을까 합니다.

Misun 2019-05-04 19:44   좋아요 0 | URL
혹시 알라딘 책구입표시가 안뜨면 책을 안봤다고 여기는 편견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이 책도 여전히 기독교 변증 맥락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미 라비 재커라이어스는 기독교 변증가로도 많이 알려져 있지만 제가 볼 땐 제대로 된 변증으로 보진 않기에 읽어보면 여전히 답답함만 많이 느끼게 되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앞서 말한 핵심 문제는 비켜가거나 모호하게 희석시키거나 할 뿐이죠. 이런 얘긴 어차피 또다른 논의가 될 테지만요., 괜한 비평에 상심을 드려서 죄송히지만, 차라리 브라이언 맥클라렌의 입장이 오히려 더 낫지 않나 싶습니다. 더 나아가면 이는 기독교 내에서도 보수 교리나 복음주의 또는 진보 간의 해묵은 입장 차이 갈등 괴리 문제라고 볼 수도 있겠습니다.

Dr.Slump 2019-05-04 2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매 표시 안뜨면 안봤다는 편견이 아닌 그럴 확률로 신뢰성을 보것인데 마음적으로 불편하셨다면 죄송합니다. 다만 저는 이런 비평이 독선적으로 느껴져서 댓글을 달았습니다. 님이 올리신 비평중에 유신론에 대한 입장이 있는데 저도 한때 지질공학을 전공한 자로서 진화론을 지지합니다. 그렇다고 제가 보수신학 아닌 진보신학을 지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본질적인 말을 더 가까이 하고 있는 개혁신학 입장입니다. 즉 말하고 싶은것이 무엇이냐면 진보신학이건 보수신학이건 배려와 이해가 필요한 부분이 있는데 비평이 비난이 되면 이부분은 무조건 틀리다는 독선적 비난으로 비춰질수 있다는 것입니다.
답글 남겨주셔서 ‘브라이언 맥클라렌‘등 자유주의 신학 입장를 조금 더 이해 해볼수 있는 시간이 된것 같습니다. 신의 은총이 함께하길 바라며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Misun 2019-05-05 13:02   좋아요 0 | URL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자유주의 신학 아닙니다. 여전히 뭔가 잘못 아신듯 합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소위 복음주의 진영에 속한다고 보는 신학자이기도 한데, 제 입장에서는 그나마 낫다고 보는 신학자여서 말씀드린 것이랍니다. 또한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도 서구 근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신학을 보수 기독교가 붙인 딱지일 뿐이며, 많은 이들이 이 용어도 잘못 알고 있는 분들도 많지요. 그러다보니 심지어 보수적인 칼 바르트 신학까지도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다는 이유로 자유주의 신학자로 보기도 하죠.

Dr.Slump 2019-05-05 14: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과거에 브라이언 맥클라렌이 복음주의에 소속되어 있는것은 맞지만 현재 브라이언 맥클라렌은 자유주의 신학을 받아들이고 신비주의, 동성애 지지등 자유주의 진영에 더
가까운게 아닐까 합니다~
자유주의 신학 용어를 신학의 다양성을 보면면서 분류된 생기된 용어이지 ‘딱지‘로 보시다니 좀 아쉽습니다. 자유주의가 이단도 아닌데 딱지 라는 단어 이미 적대감의 표현 들어있는것은 아닐까 합니다.^^

Misun 2019-05-05 15:45   좋아요 0 | URL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용어 발생은 이미 역사적 유례가 있는 개념입니다. 동성애 지지를 자유주의로 보시는 것도 참 분류 방식이 다르군요(이런 식이 역사적 유례 근거보다 뭔가 자유분방한 느낌이 있는 것처럼 갖다 붙이는 식이 되는거죠). 실제로 일선 대다수 교회 현장에선 딱지로도 많이 쓰입니다. 우리나라 교회 현장 대다수 신자들은 신학의 다양성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님은 안그렇다고 하더라도 워낙 보수적 개신교인들이 많은 현실인지라 아예 이단으로 보는 이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자유주의로 보는 시각도 처음 듣는 얘기지만 그조차도 자유주의라고 얘기하실 정도면 대략 짐작이 가기도 합니다. 맥클라렌 정도가 저로선 그나마 양호한 복음주의 진영의 학자라고 여겨지는군요.

Dr.Slump 2019-05-05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략 짐작이 가기도라.. 참 보는 시각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로서는 자유주의 진영에서 멕클라렌을 자유진영이 아닌 양호한 복음주의로 보는것도 새롭고요.
동성애 지지 자체를 자유주의로 보지는 않지만 자유주의 신학해석에서는 동성애를 인정하니 여러 지표중 하나로 말한것 입니다~

안타까운것은 비난이 바탕이 주라면 독선적 자유주의는 독선적 보수주의와 다를 바없는 편협한 마음이지 않을까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비난이 아닌 사랑을 강조하셨는데 말이죠..

목적없는 학문이 없듯이
님이 생각하시는 자유주의 신학의 궁긍적 목적과 목표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알 수 있겠습니까?

Misun 2019-05-06 05:13   좋아요 0 | URL
저는 앞서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용어 발생은 이미 역사적 유례가 있는 개념이라고 설명드렸습니다. 그것은 근대 계몽주의 물결을 타고 성서 연구에 역사비평학을 받아들인 사조로서 <자유주의 신학>liberal theology의 물결을 형성한 것입니다. 제가 말씀드린 자유주의 신학이란 이런 의미로서 쓴 개념입니다.

하지만 님의 어법에는 어떤 역사적 유례나 근거 없이 쓰고 있을 뿐입니다. 만일 그게 아니라면 님이 말하는 자유주의 신학의 역사적 유례와 근거는 무엇인가요?

성서의 역사비평학은 합동 총신 같은 데서는 안받아들일지 몰라도 오늘날 감신 장신에서도 받아들이고 있어 별다른 문제가 된다고 보진 않습니다. 19세까지는 이를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불리웠지만, 오늘날 현대에서는 그냥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현대 신학이라고만 할 뿐이지 따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일컫고 있진 앟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비난이 아니라 님에게 저는 정확한 근거를 여쭌 것이랍니다.

Dr.Slump 2019-05-06 05: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모든 단어의 의미가 역사적 유례 있어야 불려지는것은 아닙니다. 보통 본인 외에 타자의 입장에서 생기거든요. 예를 기독교에 신교 protestant도 시위,저항,반항의 의미에서 구교에서 붙여진 이름이기도 하고요.
그러나 프로테스탄트가 악의적 의미를 담고있다 해도 본질에 영향을 주지 못하므로 그런 용어 대해 신교에서 적대감 갖고 거부하지는 않습니다.

이것 또한 새롭게 다가오는군요. 제가 알고 있는 성서 비평과 현대 신학이 우리가 아는 자유주의 신학의 의미 다라는 말은 처음 들어봤습니다. 이것에 대해 궁금해지고 좀더 알아보고 싶네요.

서두에 말씀해드렸다시피 여기서의 댓글이 아니라
님께서기독교서적(님이 보시기엔 보수,복음주의 신학이)들에 대해 평점 댓글 다신것들이 비평아닌 비난에 지나지 않은가 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생각에 맞지 않더라도 다양한 입장을 이해하고 존중하면 좋을텐데..

저도 반대진영의 교리나 생각을 보더라도 불편함이 없지 않아 있지만 그래도 열린마음으로 존중해줘야 하지 않나 싶네요.

Misun 2019-05-06 07:55   좋아요 0 | URL
결국 근거를 대진 못하시군요. 프로테스탄트 예는 역사적 유례가 있습니다. 적절한 비유라고 생각되진 않는군요. 그리고 자유주의 신학 liberal theology 개념은 서구 근대 계몽주의 영향으로 신학 연구에 들어온, 그래서 성서의 역사비평학과 결합된 것이라는 점은 이미 잘 알려져 있는 바입니다. Liberal Christianity 로 위키백과 검색에도 나와 있으니 찾아보시면 합니다.

다양한 입장 존중이면 님께서는 왜 다양성 존중을 실천하지 않으신건가요? 님도 불편함이 있으니 결국 딴지를 거신 것일테죠. 따라서 다양성 존중 논리는 님스스로에게도 모순된 얘기일 뿐입니다. 결국은 구체적이고 정합적인 근거에 기반한 주장이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라비 재커라이어스도 그런 점에서 의견을 남긴 것인데, 다짜고짜 저한테 책도 안읽고 하냐는 식의 편견과 비난을 남기셨고, 자유주의 신학 개념도 이해하지 못하신 채로 자유주의 신학 용어를 먼저 쓰신 점도 그렇습니다. 이런 님의 태도를 님은 다양성 존중이라고 표현하시는군요.

Dr.Slump 2019-05-06 0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짜고짜가 아닌 책들마다 비난 댓글을 다시니 여쭤보것이고,
편견이 아닌 구매 확률지표로서 판단한것입니다. 님이 그렇게 생각하시면 비난이었겠네요.
그런데 님이 비난으로 받아들이듯 저또한 님이 달으신 평점 댓글또한 그런 비난으로 다가와 댓글로 여쭤보는 겁니다.

또한 맞습니다. 제가 앞서 저또한 불편함이 없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열린마음으로 대하려고 노력하는 것이죠. 예를들어 다른 진영이라고 별점테러와 비난을 주기보다 불편하지만 조금씩 알아가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님의 비평 중 동의한 부분도 있다고 말했고요.ㅎㅎㅎ

그런데 님은 시종일관 적대감이나 독선적인 말뿐이였습니다.
님께서 근거라고 보시지만
님의 주장도 근거가 아닌 입장과 의견 뿐입니다.
역사적 유례라고 계속 말씀하시만 그 입장에서 해석한 것 뿐이시고 저 또한 제 입장에서 그 단어의 유례를 제 입장에서 풀이한 것이죠.

맞습니다. 저는 자유주의 신학자가 아니고 더군다나 일반인이기 때문에 자세한 신학적 지식을 알고 있지 못합니다. 대락적인 흐름만 알뿐이죠.
그런데 모든 개념을 파악해야 그 용어를 쓰고 안쓰고의 권한은 누가 부여한것 입니까? 그또한 억지가 아신지요.
상대방의 논리는 모순이고 근거없다고 치부해버리시고,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도 못한채 용어를 쓰냐라는 말이 상대를 깔보는 지식적 우월감의 표현 같습니다.

님의 신학이 흥미롭고 대화가 재밌어 더 이야기 하고 싶었는데 잘못 판단 한것 같고, 더이상 서로의 댓글이 무의미한것 같습니다.
좋은 하루 보내십시오.

Misun 2019-05-06 08:47   좋아요 0 | URL
죄송한데 저는 근거를 말씀드렸습니다. 비난은 근거나 이유 없이 가하는 것일테지만 저는 그렇게 보는 이유나 근거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말씀드렸습니다. 님에게는 Liberal Christianity 로 위키백과도 검색해보시면 나온다고까지 말씀드렸습니다.

그냥 다른 얘기하실 것 없이 제가 역사적 유례 근거들을 여쭌 것에 대해 곧바로 정확한 근거로서 제시해주셨다면 저는 더이상 님께 반박을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님의 글은 오히려 자꾸만 제게 비난이 어쩌니 다양성이 어쩌니 하는 다른식의 논의로 자꾸만 빠지시는 것 같아서 말씀드렸던 것뿐입니다.

자유주의 신학에 대해서도 지식우월주의가 아니라 제대로 된 반론을 하셨다면 저로선 그걸 원했을 따름인데 님의 지식우월주의라는 표현 역시 제게는 되려 근거 없는 부당한 비난이라고 여겨집니다. 정확한 근거와 출처를 여쭙는 작업이 그리 폄하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여튼 말씀하신대로 서로 간의 입장차이나 용어나 개념 이해부터가 서로 많이 달라서 생산적인 대화가 되긴 힘들 것으로 보입니다. 아마도 이점이 애초부터 가장 큰 불통의 이유일테죠. 라비 재커라이어스든 브라이언 맥클라렌이든 자유주의 신학이든 결국 각자의 과제로 남겨두도록 하지요.

님께서도 좋은 하루 되셨으면 합니다.


Dr.Slump 2019-05-06 09: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님이 말씀하신 그 글 찾아서 봤습니다. 지식적으로 유익했습니다.
그런데 계몽시대 이후 성경의 권위보다 이성에 더 권위를 두고 비평과 함께 발달한것은 압니다.
허나 비평은 종교개혁전에도 교리적 비평이 있었습니다.
다만 그것을 자유주의 신학 비평의 관점이 달랐을 뿐이죠.
개혁주의 관점에서도 비평과 현대 신학이 있습니다.
즉 성서 역사 비평과 현대 신학이 곧 자유주의 신학이다라는 것은 오류이지 않을까 합니다.

또한 님이 알려주신 위키 원문에는 자유주의란 용어의 유례를 정통주의의 부정적 딱지인 마냥 해석하는 글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다른 백과 찾아봤는데 마찬가지고요.

아휴.. 아닙니다. 또 댓글을 달았군요. 하이튼 알겠습니다. 입장의 차이를 느끼겠습니다. 님말대로 서로가 생산적 대화가 힘든것 같습니다.

Misun 2019-05-06 11:53   좋아요 0 | URL
˝성서 역사 비평과 현대 신학이 곧 자유주의 신학이다˝<---- 제 글 어디에도 이렇게 말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서구 근대 계몽주의 영향으로 성서의 역사비평학과 결합된 신학을 말한다고 했었지, 님처럼 그런 주장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위키백과를 찾아보라고 말씀드린 것도 우선은 부정적 딱지를 말한 게 아니라 앞서 말씀드렸듯이 자유주의 신학이 성서의 역사비평학과 결합된 것이라는 점을 알려드리고자 한 점에 있습니다.

부정적 딱지 얘긴 님의 자유주의 신학 주장에는 역사적 유래나 근거가 없이 그저 브라이언 맥클라렌을 막연히 자유주의 신학으로 규정짓는 것에 대한 비판이었을 따름입니다. 상대방의 논지를 이상한 쪽으로 해석하시는군요. 제가 쓰지도 않은 말을 오류라고 버젓이 얘기하시는 건, 오히려 ˝허수아비의 오류˝를 님이 범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군요. 결국 생산적인 대화가 되기 힘든 이유에는 이런 문제도 있지 않나 생각됩니다.

제가 쓴 글이 곡해된 채로 수용되고 있어 다시 댓글 남긴 것임을 말씀드립니다.

Dr.Slump 2019-05-06 12: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로 오해된것을 바로잡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위키백과 검색해보라는 말씀 앞에 용어의 역사적 유례를 말씀하셔서 검색해서 용어사례를 보라는 건지 발생 근거에 대해 보라는 건지 애매하여 무엇을 보라는 의미인지 헤깔렸습니다. 또한
미선님께서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현대신학이라고만 할뿐이지 따로 자유주의 신학이라고 일컫고 있진 않습니다.˝ 문장의 의미가 모호해 ‘ ‘의 의미가 아닌 ˝=˝로서의 의미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 의도가 아니셨는데 겸허한 마음으로 죄송합니다.

허나
미선님께서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도 서구 근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신학을 보수 기독교가 붙인 딱지일 뿐이며, 많은 이들이 이 용어도 잘못 알고 있는 분들도 많지요.˝ ˝실제 일선 대다수 교회 현장에선 딱지로도 많이 쓰입니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것도 제가 문맥을 아잘 못 이해한건지 아님 미선님께서 잘 못 쓰신건지 모르겠군요..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역사적 유례라고 하시며 말씀하신것인데 ‘붙인 딱지‘는 ‘붙인 딱지‘ 부정적 의미가 내포되어있을 뿐 아니라 주어가 있으므로 가해자와 피해자의 입장이 나눠진것 인데 미선님께서 주장하시는 자유주의 신학의 발생이 아닌 역사적 용어 사례를 알 수 있는데가 있는지요?

Misun 2019-05-06 13:56   좋아요 0 | URL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가 서구 근대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신학을 말한 것인데 이를 현재까지도 보수 기독교 진영에선 자신들과 다른 진보 기독교 신학 진영에 대해선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이름붙이기를 계속적으로 한다는 의미로서 말씀드린 것입니다.

이런 점은 마치 종교 간의 대화를 얘기라도 하면 세부적으로 살펴보지 않은채로 무조건 종교다원주의자로 일괄 묶어서 몰아가는 것과 유사하게 쓰이는데 거의 대부분은 부정적 의미의 취지입니다. 특히 교회 현장의 경우 대부분은 ‘자유주의 신학‘, 신신학, 종교다원주의 등 이런 용어들은 부정적 맥락으로 쓰이면서 신자들에게 경계시키거나 조심할 것을 당부하기도 하죠. 바로 그런 점에서 붙인 딱지라는 얘길 말씀드린 거였습니다. 즉, 세부적인 맥락적 역사적 고찰 없이 자신과 견해가 다른 신학 진영을 경계시하려는 의미에서 쓰인다는 얘기였습니다.

물론 님의 진의는 이러한 의도는 아닌 것으로 알겠습니다. 다만 자유주의 신학이라는 용어를 님께서 먼저 꺼내셨고 또한 그 용어를 브라이언 맥클라렌에 적용한 점에 대해선 그 용어가 그렇게 쓰이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제 의견을 말씀드린 것입니다. 자유주의 신학 개념은 그냥 신학사상사에서는 서구 근대 계몽주의 영향을 받은 신학 사조를 일컫는 말로 쓰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경우 신학사상사에서도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는 걸 두려워했던 시절에는 자유주의 신학 어쩌구 하면서 비판을 하기도 했지만, 현재 감신, 장신, 한신, 성공회 같은 신학에서는 성서비평학을 지금은 받아들이고 있는지라 학술적으로 자유주의 신학이란 말은 안쓰이고 있는 걸로 압니다. 하지만 성서비평학을 여전히 부정적으로 보는 합동 총신 같은 보수 기독교 진영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란 용어를 부정적으로 많이 쓰곤 합니다.

또한 신학현장과 달리 우리나라 교회 현장은 거의 대부분이 보수적이어서 이런 사정을 자세히는 잘 모르기도 해서 대체로 부정적 의미로 통용되는 점도 있습니다. 진보적인 기독교 진영이라고 하더라도 신학 현장과 교회 현장은 꽤나 괴리되어 있습니다. 몇몇 진보적인 교회를 제외하면 교회에서 성서비평학을 공부하도록 하는 곳은 거의 없기도 합니다. 몇 백 년의 학문 역사를 가진 성서비평학에 대한 공부는 제가 볼 땐 필요한 일임에도 교회 현장에선 이를 마치 위험스럽게만 보거나 터부시하는 점이 강하지요.

또한 성서비평학에 대한 공부는 성서를 폄하하는 작업이 아니라 성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과정에 포함됨에도 이를 부정적으로 보는 현실은 아무래도 유감이 아닐 수 없습니다.물론 이 점은 님을 말한 것이 아니고 한국교회 현장의 전반의 풍조를 말한 것입니다.

Dr.Slump 2019-05-0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하나님의 진리를 추구하는 것은 같군요.
자유주의 신학을 폄할 생각은 예초에 없었습니다.
저에게는 미선님께서 평점 다신 댓글의 책들이 저와 겹치는게 몇 권있는데 그런 평점과 댓글 내용이 폄하는걸로 느껴져서 좀더 성숙하다면 그것 조차 존중하고 넘어가야 했지만 죄에 오염되어 성화되지 못한 저여서 넘어가지 못한것 같습니다. 죄인인 저를 다시 한번 더 바라본 계기가 되었고
더불어 자유주의 신학을 이해하는 유익한 시간이였습니다.
정성스럽게 답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자유주의 신학자이신것 같아서
이 기회에 질문을 드려도 될련지요?

1. 그럼 자유주의 신학을 성서비평학이라 말해야 하나요? 아님 진보신학이라 불러야 하나요? 아님 다른 명칭이 있는지요?

2. 저는 지질공학을 전공했던 자로 창세기 해석과 이성적 판단으로 유신진화론과 오래된 지구론 사이의 입장입니다.
그러나 개혁파이고요. 그런데 개혁파 전체가 근본주의나 제7일창조론을 긍정적으로 보지는 않습니다. 복음주의 진영에서도 아예 유신진화론을 지지하는 톰 라이트, 존폴킹혼, 알리스터 맥그래스 등등 복음주의 대표되는 신학자 또한 있고요. 이런 맥락에서 이성에 더 무게를 두는 자유주의 신학과 비슷한 부분(?)이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개혁신학에서는 타종교의 철학은 높이 평가하고 인정하지만 구원의 진리라고 보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께 갈 수 있는 길은 예수 그리스도만 통해서만 갈 수 있다는 성경에 근거해
오직 구원의 길은 예수 그리스도 한분 뿐이라고 봅니다.
제가 알기론 자유주의 신학에서 타종교도 구원이 있다고 보는데
모든 자유주의 신학자분들이 그런입장인지 아님 각자의 의견이 다른지도 궁금하고 만약 타종교도 구원이 있다하면 더불어 어떤 이유로 주장하는지 알고 싶습니다.

Misun 2019-05-06 17:25   좋아요 0 | URL
1. 지금은 그냥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인 기독교 신학 진영을 일컫는 말로 보시면 되겠습니다. 또한 성서비평학이 성서를 난도질한다고 여기는 것도 편향된 얘기입니다. 성서비평학을 받아들이더라도 칼 바르트 신학의 경우에서도 보듯이 상당히 보수적인 신학 입장을 띠기도 합니다.

2. 유신진화론이 저는 오히려 더 신앙적으로 보며 이성에 무게를 둔다는 것이 신을 거스르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솔직한 의문과 합리적 의심은 신앞에서의 정직성이며 신앙이 그런 걸로 해체되거나 하는 것도 아니라고 봅니다. 만일 그 정도로 해체되거나 할 신앙이었다면 애초 값어치가 그 정도밖에 되진 않은 거겠죠. 예수를 1차적인 삶의 주인으로 삼는다면 오히려 우리에겐 솔직한 모험의 신앙 성장 과정들이 더 필요해보입니다.

3. 구원독점의 배타주의는 보수 근본주의 입장이며, 소위 말하는 복음주의자들도 이런 점에선 자유롭지 않지요. 그렇다고 모든 종교가 똑같다고 보는 것도 종교에 대한 소박한 이해입니다. 종교는 저마다 차이점이 있고 다만 실천적 열매에서는 유사점도 있을 뿐입니다. 저의 입장은 열린중심주의 입장인데, 1차적 중심은 예수 중심이되 서로 차이를 배워나갈 수도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보수 개신교인들 중에는 혼합주의라는 비난도 있던데 그 역시 세부적인 고찰은 부재한체로 종교를 마구 뒤섞는다는 식의 소박한 이해를 할 따름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이미 기독교 안에 들어와 있는 성탄절이나 여러 예전 예식들 중에는 이교적인 게 많고 혼합주의는 이미 들어와 있기도 합니다. 이미 기독교 전통 안에도 혼합주의가 많기에 제대로 된 비판이라 할 수도 없습니다. 문화의 역사는 어차피 서로 합류하고 교차하면서 전개되는 게 다반사이며 여기엔 기독교 역사도 예외이지 않습니다.

또한 아마도 구원 개념도 분명 차이가 있을 것으로 봅니다. 죽은 뒤 내세 구원만을 구원으로 여기는 이들도 있으니까요. 어쨌든 1차적으로 친숙한 신앙은 예수이며 부처가 아닙니다. 그러나 타종교의 좋은 점이 있다면 굳이 마다할 이유는 없다고 보여지며 종합적으로 합리적으로 고려해서 소화할 필요도 있겠습니다. 여기에는 좀 더 많은 논의와 설명들이 필요한데 일단은 여기까지만 해두도록 하겠습니다.

Dr.Slump 2019-05-06 1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세주와 구원관도 차이가 있는거군요.
간단하면서 충분한 설명이였습니다.
저로서는 계속 개혁신앙이 일테지만 성서비평학의 입장을 좀더 아는 계기가 되었으며, 다른 관점에서 이해하므로 유익했습니다.
한글자 한글자 답변에 고맙습니다.
항상 아바아버지의 은혜가 가득한 나날이 되길 바랍니다!

니꾸마 2025-03-30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션..하나님을 만나셨기를

니꾸마 2025-03-3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선님..그동안 부디 하나님을 만나셨기를..

니꾸마 2025-03-30 0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선님..그동안 부디 하나님을 만나셨기를..
 
노장의 생성론 - 동양의 빛으로 본 서양의 그림자
김경수 지음 / 문사철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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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성=변화/존재=불변(p.64)이라는 단순 도식으로 서양철학 비판한 책, 정작 서양철학 이해는 얕은것 같음. 화이트헤드 철학의 경우엔 생성이 변화보다 더 근본적인 점, 가능태보다 현실태 우위라는 점, 존재는 생성으로 대체됨 등 빼먹고 목적인 오해로 존재 비판 몰이를 하는 건 허수아비 오류 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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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밝 변찬린 : 한국종교사상가
이호재 지음 / 문사철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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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석 유영모와 신천 함석헌만 알고 계셨던 분들에게도 정말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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