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이란 무엇인가 - 연기법, 세상의 ‘자아 없음’을 말하다
신용국 지음 / 김영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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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건의존성 연기법의 불교에선 책임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자리는 어디에?

최근에 나온 불교 저작인데, 불교의 무아를 무자아로 해석하고 조건의존성으로 이해한다.

필자가 이 책에서 말하는 불교 내용들에 공감하고 동의하는 내용들도 많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절반은 공감하고, 나머지 절반은 심각한 오류가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우선 필자가 저자의 주장에 대해 공감하는 지점들부터 말씀드리면 다음과 같다. 이 책은 기존의 마음불교, 견성불교, 유식불교, 혜능이 틀렸다고 언급한 대목들은 필자 역시 공감하는 지점에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선 오히려 기존 불교 사상가들 사이에선 논란도 있을 수 있겠다.

분명한 사실은 불교의 현주소는 그만큼 불교진영 안에서도 정리되지 않은 혼란과 서로 간에 상충되는 갈등들이 있다는 점을 이 책을 통해서도 여실히 확인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에 따라 불교 철학이 어떻게 잘못 이해되고 왜곡되어 있는지 그러한 점도 이 책의 저자는 그 나름으로 잘 정리해서 들려주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대목도 없잖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화이트헤드 유기체철학과 불교 사상이 유사하다고 하면서도 불교를 결국 '비실재론'으로 제시한다. 아마도 저자는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실재론realism이라는 점은 잘 몰랐던 걸로 보인다. 만약에 알았다면 실재론의 또 다른 범주가 가능하다는 점도 함께 제시했어야 하는데 그런 내용은 찾을 수 없었다. 실재론인 화이트헤드 철학과 비실재론인 불교가 서로 유사하다고 보는 주장은 되려 의아하게 만드는 대목이다.

아마도 '실체'와 '실재'를 혼동했을 수 있다. 관계와 과정의 실재론인 화이트헤드 철학은 비실체론적 실재론이다.

그럼에도 필자가 결정적으로 비판하고 싶은 지점은, 저자의 불교 이해에서도 그 역시 책임적 자아를 말할 수 있는 지점은 아예 상실되어 있다는 점에 있다. 이를 테면 무자아를 언급한 다음의 내용을 직접 들여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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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의 책에서 발췌 인용, 밑줄은 나의 표시)

무자아에 대한 질문들

내 생각과 내 의지로 움직이는데 그런 나를 어찌 없다고 하는가요?

― 내 생각과 내 의지가 아니라 인연(조건)에서 생각이 생겨나고 욕망이 생겨나고 의지가 생겨나는 것입니다. 십이연기가 말하듯이, ‘나’라는 것은 그런 조건의존적 생각, 욕망, 의지의 쌓임[集]일 뿐입니다. ‘나’라는 것이 생각, 욕망, 의지의 주체라는 관념은 의식이 조작한 기만에 불과합니다.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것 아닌가요?

아닙니다. 생각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가 생각들로부터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 조건들에 의해 만들어진다고만 본다면 책임적 주체를 논할 수가 없잖은가. 여기서 보듯이 타자원인성만 얘기하고 있기에 자기원인성(자기창조성)을 실재적으로 논할 자리가 없다.)



만일 욕망과 그로부터의 생각을 ‘나’라고 하면 무슨 문제가 있는가요?

― 생각, 욕망, 의지는 인연에서 형성된 것이고, ‘나’는 생각, 욕망, 의지로부터 형성된 것입니다. 내가 생각, 욕망, 의지의 원인이라는 주장은 만들어진 요리가 요리를 만드는 재료들의 원인이라는 주장과 다르지 않습니다.



형성하는 주체가 있다면 그것을 나라고 할 수 있지 않나요?

― 내 생각으로 나를 형성한다는 말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이미 내가 존재하는데 왜 다시 나를 형성하겠습니까? 생각은 내 생각이 아니라 연기한 생각이고, 연기한 생각들로 나를 형성하는 것은 무명한 욕망의 탐진치 습성입니다. 왜 무명한 욕망이냐면 자아가 없는데 이를 알지 못하고 기어코 자아의 존재로서 존재하려는 망상의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탐진치 습성은 이 망상의 욕망이 삶에서 축적하는 버릇, 습관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욕망은 습관들이 갈애하는 생각들에 취착합니다. 취착은 또한 생각을 붙들고 놓아주지 않지요. 이 갈애와 취착으로부터 ‘나’라는 존재가 형성되는 것입니다.



나를 의식의 기만이라고 하는 말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 사람들은 의식이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의식의 주체인 듯이 생각합니다. 하지만 의식은 욕망의 습성이 취착하는 생각의 무더기에 불과합니다. 붓다는 오온연기에서 생각의 무더기인 의식을 ‘식온識蘊’이라고 이름하셨지요. 생각들의 무상한 무더기에 불과한 줄 모르고 의식은 ‘나는 생각의 주체로서 원래부터 존재하는 것’이라는 생각(망상)에 빠져 있습니다. ‘나’라고 하는 관념은 그런 망상의 결과인 셈이지요. 그래서 ‘의식의 기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신적인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지금 여기 있는 이 몸이 생각, 욕망 등의 주체라는 것은 분명합니다. 그렇다면 이 몸을 ‘나’라고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요?

― 만일 몸이 나라면 나에게 병(나 아닌 것)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생긴다고 해도 금방 알 수 있어야 하겠지요. 그러나 나는 몸(나)을 알지 못하고 병이 생기는 것도 알지 못합니다. 나도 알지 못하고 나 아닌 것도 알지 못하는 나는 있을 수 없습니다.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은 몸이 ‘조건의존적 신경계’라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몸을 나라고 말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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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글에서도 보듯이 생각, 욕망, 의지에 대해선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오히려 그것이 어떤 욕망인지 어떤 생각인지 어떤 의지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한 관건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컨대 생명살림과 평화실현를 향한 욕망들도 있을 터이고 다양한 맥락적 생각, 욕망, 의지들이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렇기에 생각, 의지, 욕망들 자체를 부정적 관점으로 보거나 굳이 부정시 해야만 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어쩌면 욕망 집착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욕망하고 집착할 것인가 하는 점이 더 중요할 지 모른다. 자비로운 보살되기를 욕망하고 집착하는 것은 어떤 류의 욕망 집착에 속하는 것일까? 필자의 입장에선 욕망 자체를 부정시야 할 이유도 없으며 그것은 오히려 창조의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려되는 바는, 나는 이러한 불교 사상에서는 책임적 자아를 성립케 하는 자리를 찾긴 힘들다는 점이다. 왜 그토록 자아를 부정시해야 하는 것일까?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 설령 '가상의 나'라고 하더라도 이를 꼭 굳이 부정적으로만 봐야 할 것인가?

아니나다를까 이 책의 저자는 조건의존성과 대척된다고 보는 자유의지를 관념으로 보는 입장(뇌과학의 실험 등을 근거로)을 내세우고 있어, 그야말로 자유의지에 따른 책임적 주체를 말할 자리마저 찾기 힘들다.

자유의지마저 관념으로 보게 되는 건, 이미 저자가 연기 현상을 조건의존성으로만 설명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 한계를 엿볼 수있다. 왜냐하면 조건의존성은 화이트헤드 철학에서 보면 타자원인성에만 속하는 것이며, 자기원인성은 아니다(참고로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타자원인성과 지기원인성을 함께 인정하고 있다)

저자가 이해하는 관계의존성은 타자원인성만 자리하고 있고 자기원인성은 이미 상실되어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이 책이 현재까지의 불교 사상을 그 나름으로 정리해서 일별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읽을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마음불교, 유식불교, 혜능, 견성불교를 대놓고 까는데 불교를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본다.

이 책에선 여래장, 불성, 참나를 주장하는 불교를 붓다가 그토록 반대했던 힌두이즘의 '범아일여'로 다시 회귀한 것으로 보고 있다. 사실 이 점은 본인도 일정 부분 공감하는 바다. 하지만 기존 불교 진영 내에서도 이 점은 여전한 논쟁점으로 남아 있다.

따라서 최근에 나온 이 책을 통해서도 결국 불교에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거대한 혼동, 혼란들이 각각의 불교 입장들로서 남아 있다는 점을 여실히 확인해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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