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을 담는 집
김화영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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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글을 쓰는 불문학자 김화영의 산문들은 어중이떠중이, 한글 읽고 쓴다는 사람들은 모조리 책 한 권씩 써서 출판해내는 듯한 헛되고 가볍고 고민 없는 말과 글들의 잔치 속에서 만나는 긴 쉼표 같다. 이 속내 깊은 침묵의 행간은 열에 들뜬 도시의 아스팔트 위로 내리는 소나기마냥 반갑고 시원하다.

그가 작가의 말을 통해 미리 밝히고 있는 것처럼 그로 하여금 글을 쓰도록 하는 힘은 여백에의 희구이다. 비어있음. 공간. 그리고 침묵. 생이라고 하는 한정된 공간이 이토록 어지러이 채워지고 휘둘러지기 전, 그 가능성이라는 공간을 미래라는 이름으로 밝히고 있던 젊음과 청춘의 시절에 대한 그리움... 그의 글은 이 모든 비어 있음, 그 여백에 대한 갈증과 애정에 바쳐지고 있다. 그가 읽고 보고 이해하며 살아 온 삶의 이야기를 이처럼 조촐하게 단정하게 듣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그의 글을 읽다 보면 그의 감수성. 그 한없는 심연으로 내가 가라앉아 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조금씩 조금씩. 어쩔 도리없이,그러나 어쩐지 평온하게. 어느 날이었던가. 그저 우연히 그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글들을 접했던 날 이후로 아, 벌써 얼마나 많은 날들이 흘러갔는지.

그 사이에 나도 변하고 그도 변했다. 아직도 저처럼 순수한 웃음을 웃을 수 있는 그는, 그러나 이미 '추억하는 세대'에 속해버린 걸까. 침묵의 열망에도 불구하고 조금은 말이 많아졌다. 글쓰는 사람이 말이 많은 거야 어쩌겠느냐마는, 언제나 침묵을 통해, 그 텅빔 속에 오래오래 메아리지는 여운을 통해 이야기하던 그가 똑같은 얘기를 반복해서 얘기하려는 모습은 어쩐지 그가 이제는 그 젊음을 접고 추억이라는 안락의자에 파이프라도 물고 앉아 있는 것만 같아 그를 위해서는 편안해 보이지만 조금은 쓸쓸해지는 걸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이상 속에서 아름다움을 꿈꾸던 젊은이가 어쩔 수 없이 나이를 먹었구나 싶은 건, '저기 시냇물 건너 선산에' 내려앉은 학의 무리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다가도, 그 환상의 거리를 두고 관조되던 아름다움이 문득 현실에 다다라서는 깨어져버리고 마는 그 아름다움에의 동경의 파괴를 아무런 충격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젊은 날의 치기어린 진지함과 순수로부터 그가 많이 떠나와 이제는 여론을 이끄는 지식인으로, 건실한 생활인으로서 자리매김했구나 싶었다. 그런데 이 생각 끝에 이토록 깊은숨을 내쉬어야 하는 건 무엇 때문일지...

그러나, 이런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은 '아까 어디까지 읽었었던가 하고 확인하다가 그만 처음부터 다시 읽는 책, 그래도 전혀 섭섭하지 않은 책, 문장의 질감을 곰곰이 되씹어보고 그 순간의 억양, 침묵, 망설임, 아쉬움, 그리고 또 침묵을 마음속에 되살리고 싶을 때 읽기 좋은 책'임은 변함이 없다.

바람을 담는 집. 침묵을 담고 있는 마음. 이 몸서리쳐지는 수다스러움의 세상 속에서 자신을 둘러싼 '주위의 정적과 바람과 햇빛 -- 그리고 그 속에 고여있는 삶을 전신으로 받아 껴안는' 그의 투명한 몽상들이 이 책 속엔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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