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스테르담
이안 맥완 지음, 서창렬 옮김 / 현대문학 / 1999년 7월
평점 :
절판


한 여인이 죽고, 그녀의 최후를 소유했던 마지막 남자와 한때 그녀의 애인이었거나 정부였던 세 명의 남자가 화장장 앞에 모였다. 언론사의 지분을 소유한 갑부, 외무장관으로 차기 총리를 노리는 정치인, 새천년을 기념할 교향곡을 의뢰받은 작곡가, 그리고 판매부수가 날로 떨어져가는 신문사의 편집국장.

그들은 서로에 대해 증오, 또는 혐오, 또는 우정의 감정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의 관계가 얽혀가며 이야기는 매우 극적으로 예상치 못한 파국을 향해 달려간다. 흔들리는 우정, 가장된 예의. 숨겨진 악의. 잔인한 얼굴로 돌아보는 분노.

그래서 그들은 세계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한 네덜란드의 수도, 암스테르담으로 향한다. 그들의 손에는 미리 준비한 샴페인이 들려져 있다. 한 손에는 적을 위해, 한 손에는 나를 위해. 잔이 교차하고 네 명의 사내는 다시 한 자리에 모였다. 업계에서 이미 매장당해버린 편집국장과 새천년 교향곡의 참담한 실패로 괴로워한 작곡가. 그리고 그 둘의 관을 고국으로 운구할 임무를 맡은 신문사의 지분을 갖고 있는 갑부와 전 외무장관. 그들은 이렇게 다시 모였지만, 이미 연적은 아무도 남지 않았다.

네덜란드는 희안한 나라인 듯도 싶다. 우리야 오로지 미국과 영국과 프랑스, 독일, 스위스, 뭐 이런 기존의 '소위' 선진국들만을 중시하고 초점을 맞추지만, 세계의 변방에서 악전고투하는 우리의 위치를 되돌아본다면 그렇게 화석화된 시각을 고집하는 건 결코 현명하지 않은 태도일 것이다. 거스 히딩크라는 걸출한 인물을 배출하여 우리나라 축구를 '수렁'에서 건져준 네덜란드는 세계에서 최초로 안락사를 합법화하는 법안을 통과시켰으며, 아마도 내 기억이 옳다면 매춘 역시 합법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으며, 동거하는 동성연애자의 혼인신고를 가능하게 한 나라이기도 하다.

이쯤 되면 단순히 '합리적'이라거나 '현실적'이라는 표현의 수준을 넘어서는 듯도 하다. 거스 히딩크가 언론의 난타와 난도질에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던 것도 네덜란드라는 나라의 뚝심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엄연한 무게로서 지금 당장의 논의를 요구하는 문제들을, 사실, 우리는 모르는 척 외면하는 경우가 많다. 너무 곤란하거나, 고통스럽거나, 정치 생명에 영향을 주거나, 뒷수습을 감당할 수 없을 것 같거나, 귀찮거나, 돌덩어리 또는 솜뭉치 같은 머리로 생각하기엔 너무 복잡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짐짓 토론하는 척, 고민하는 척, 논쟁하는 척 하면서 시간만 끌거나 사회의 여론이 슬그머니 사그라들기만을 기다린다.

그런데, 네덜란드는 그런 일을 옷 걷어부치고 씨름해서 결판을 짓는 용기(이것은 용기라 해야 마땅할 것이다)를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암스테르담. 그리하여,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이 이 책의 제목이 되었다.

부커상은 영국에서 가장 권위있는 문학상으로, 이 책은 1998년도 부커상 수상작이다. 한가롭게 이야기하는 듯하면서도 결론을 향해가는 길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 있지 않은 이 작품의 짜임새는 대단히 탄탄하고, 단조롭지 않으면서도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다. 모든 것을 정확한 자리에 정확히 배치한 탁월한 스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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