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 속의 검은 잎 문학과지성 시인선 80
기형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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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책...

어느 날, 이미 내 안에는 울음이 차 있었다. 나는 짐짝처럼 흔들리며 지친 몸뚱이로 집으로 왔다. La maison du vent. 손에는 알록달록한 책들이 들려 나는 그것만으로도 즐거웠으련만, 짐짝처럼 내동댕이쳐지는 인생의 아무것도 아님이 힘겨워. 가슴에 차오르는 울음은 뜨거운 폐타이어 같은 일상으로 인해 금새 말라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채로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기형도를 이야기하는 프로그램에 시선이 멈췄다. 기형도라고.

얼마전이 그의 13주기였는지 씩씩하고 우렁차게 찬송가를 부르는 누이의 가족 뒤로 담배 연기 내뿜으며 무덤가를 서성대는 친구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마치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기라도 한 양, 나는 갑자기 내가 잃어버린 모든 것이 그리워졌다. 그리고 그에게 '죽음의 시인'이라는 아우라를 씌우고 진혼했으나 역시 세상을 떠난 한 평론가도.

나는 왠지 덧없이 슬프고 그리워서 해야하는 일들은 하나도 하지 않고 그의 시집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두 사람을 함께 만나기 위해 맨 뒷장부터 펼쳐 읽었다. 먼저 떠난 사람들은 뒤에 그리움을 남긴다. 여러 가지 얼굴을 갈아치우는 슬픔이라는 감정은 맨 마지막에는 그리움으로 잦아든다. 그리고 몇 알갱이의 앙금은 생이 부대끼고 흔들릴 때마다
불현듯 수면 위로 솟구쳐 오른다. 잃어버린 모든 것들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것이라 할지라도 늘,언제나, 이렇게 그리웁다.

La maison du vent. 바람은 어디에 머무는가. 아무것도 담을 수 없는 이 구멍 뚫린 삶에도 바람은 머무는가. 삶은 공회전으로 뜨거워진 낡은 타이어처럼 다만 어디로도 달려나가지 못한 채, 그저 굉음으로 울부짖다 닳고 버려질 뿐이다. 그러나 눈물을 말려주니 감사하다. 바스락거리다 가루가 되어 날리겠지. 죽은 그들 때문에 나는 살아서 조금 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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