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한 연구 - 상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1
박상륭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사실 이 책을 다시 읽는 데 이렇게까지 시간이 오래 걸릴 줄은 몰랐다. 읽으면서 자꾸 조바심이 쳐져서, 서두르려는 마음을, 저 혼자 바쁜 마음을, 먼저 다스려야 했다. 박상륭의 작품을 대한 사람이라면 백이면 백, 모두 손사래라도 치며 눈을 동그러니 뜨고 말할 터이지만, 그를 읽는 일은 결코, 결단코 쉬운 일이 아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그는 '너무 일찍 온 나머지, 너무 오래 외로웠지만' 지금이라고 해서 그 외로움이 한 커풀이라도 덜해졌을지는 알 수 없다.

하여, 모든 소설이 다 이렇게 공부하듯이, 씨름하듯이, 도 닦듯이 읽혀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게으름과 방일함의 핑계로써 나를 옥죄고 있는 무의미한 일상의 버거움을 지목하며 지낼 때, 나는 이 책에 그리운 시선을 던지며, 저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내야된다고, 저 책을 다시 한 번 읽어내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무의미한 일상으로부터 한 걸음 비껴나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이 책은 앞으로도 몇 번은,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질 때까지 몇 번이라도 더 읽어야 한다.

몇 년 전, 그의 문학제에서 만난 그는 조심스런, 조용한, 인상이었다. 책 속에도 등장하는 '이민감'이라는 말. 그것이 꼭 실제적 공간으로부터 나온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아마 고국에 존재하면서도, 매일 눈뜨면 걷는 길을 걸으면서도, 사람 사는 데 다 똑같다는 인식을 곧잘 얻으면서도, 아마 기꺼이 섞여들지 못하는 이질감을 느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의 소설이 쓰여진 모국어의 공간으로 되돌아왔지만 그렇다고 그 이민감이 하루아침에 사라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문학제에서 봤던 영화 <유리>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중간에 그의 부인이 자리를 떴고, 아마, 그도 중간에 들어왔다 나갔던 것 같고, 사전지식없이 그 영상에 내던져진 친구도 끝까지 견뎌내지 못했다. 방대한 에너지의 응축. 그것을 제대로 담아내고 풀어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성경을 사유의 기본으로 삼고 있으되, 그 위에서 선(禪)적으로 명상하지만, 인간 본성의 오욕칠정과 나고 죽음의 고민을 연금술적으로 해석해내려 한다. 결국 종교란 생명이 어디서 발원하여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한 세상 사는 삶의 평등치 못함에 대한, 그 평등치 못함을 견뎌내거나 이해하기 위한, 그 세상을 치리하기 위한 한 수단으로서의 사고와 해석과 방법과 고민이 때로는 과학이 되고 때로는 신화가 섞여 적당한 당근과 적당한 채찍으로써 버무리된 것이 세월에 쓸리고 깎이며 정교해진 것에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그 안에서 진정으로 고민하는 자는 겁이 걸릴 깨달음의 길에 한 생에 한 겨자씨만큼 다가서겠지만, 그저 주어진 신을 찬양하고 세상에서 짓는 죄의 면피쯤으로나 종교를 덮어씌우려 한다면 그것은 아이들 가지고 노는 가짜 돈을 가지고 대처에 나가 연명할 거리를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이나 다를 바 없는, 어리석고도 순진한 노릇이다.

이제 매너리즘으로 저 혼자 잘도 굴러가는 잘생긴 조약돌이나 같은 기존의 종교들은 내버려두고, 나고 죽음의 문제를 그렇게 허랑방탕히, 생각지도 않은 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그는 다시, 인식을 3세로 확장해 깨달음을 성취하려 한다. 남과 죽음의, 한 연구. 탁월한.

감히 말하지만, 이 이상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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