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덮어둘 일이지 - 미당 서정주의 아우 우하 서정태 90세 시인이 들려주는 노래 90편
서정태 지음, 권혁재 사진 / 시와 / 2013년 2월
평점 :
절판


 

 

 

인상깊은 구절

16p

나비야

머문 흔적 없으면 어떻다냐

그냥 가자 산 넘어

훨훨 날아 먼 길 가자

 

 96p

보리 섞인 밥 한 공기와

무국과

김치 한 접시

김 두 장

아침상 차려 먹고 나니

천하는 다 내 것이다

 

 

 

90세 시인의 90편의 시를 읽으니 시 속에는 봄, 여름, 가을, 겨울이 담겨 있다. 꽃이 아름답게 피었고, 새가 즐겁게 노래한다. 자연과 벗하며 사는 서정태 시인의 시와 권혁재 중앙일보 사진 전문 기자의 사진이 어우러져 평화를 도란도란 이야기하고 있다. 표지 사진에서 환하게 웃는 시인은 “그냥 덮어둘 일이지”하신다. 무엇을 덮어두라는 것이었을까? 세상의 일들을 다 캐어낼 일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젊은 사람은 결코 할 수 없는 말. 인생의 연륜이 담긴 말이 자꾸 목구멍을 간질인다.

 

뉴스에서 몇 개의 단어들이 들려왔다. 고창 선운사, 미당의 생가, 미당 서정주의 동생...... 그 순간 많은 것들이 조합이 된다. 가끔은 건드리지 말아야 할 것들까지도 ......서정태 시인은 55세에 칩거를 시작해 정읍, 춘천, 고창 그리하여 현재에 이른다. 미당 서정주 시인과 서정태 시인은 형과 동생이니 살면서 많은 것들이 결부될 것이고 주위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는 못하셨을 것 같다. 이쯤에서 가족사와 관련된 일은 궁금하나 ‘그냥 덮어둘 일이지’ 싶다.

 

 

이른 봄 1

 

거기 누가 있어 귓속말을 하나

산수유꽃 혼자 피게 내버려두고

계곡물은 그냥 흘러가거라

 

산중에 외로운 삼간초가

봄이 한꺼번에 몰려오느니

솔바람 스치듯 지나가거라

 

지난밤 온갖 시름에 시달리어

늦게사 잠드신 임

천릿길 고운 꿈 행여 깨실라

 

시인이 바라는 봄은 만물이 소생하고 반길 일이지만 근심과 걱정과 같은 힘든 여정을 겪은 임이 염려스러워 모든 것이 그냥 흘러가길 바란다. 혹간 꽃이 색깔이 진하니 흐리니, 송아리가 탐스럽다거나 그렇지 않다는 등의 불필요한 말을 하기도 하고, 온갖 꽃으로 화려하게 시작하는 것이 봄이고 보니 자랑보다는 사철 푸른 솔숲에 부는 바람처럼 그렇게 지나가길 바란다. 임은 시인 자신은 아닐지. 이쯤에서 또, 한번 ‘그냥 덮어둘 일이지’하고 자연에게 도 부탁을 해 본다.

 

바람의 소식

 

동녘 바람이 불어와서

창가에 매화가 피면

그 향기에

난 그댈 생각하리

 

서해 바람이 준령 넘어

해 뜨는 곳으로 가서

태화강변

감나무에 가을빛 알리거든

그때엔 날 생각하게

 

너와 내가 사는 세상

바람의 소식이면 그 뿐

우리는 그렇게 살아왔거니

세월이사 간들 어떠하리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는 말이 있다. 어떻게 들으면 소식이 없으니 무심하다고 할 것이나 이 말 속에는 배려가 담겨있다. 우리나라에 있던 크고 작은 전쟁사를 보면 700여회 이상이라니 좋은 소식을 전하기보다는 나쁜 소식이 더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지금이야 호시절이라도 세상사는 일은 예나 지금이나 나름으로 힘들고 어렵다. 동분서주하다 보면 어느 사이에 세월은 황혼으로 우리를 데려다 놓을 것은 분명하고 이미 그 황혼에 닿아 있는 시인은 그런 세월을 겪었으니 그리움도 슬픔도 안달복달할 일도 아니다. 그저 ‘그냥 덮어둘 일이지’하시며 바람의 소식으로 살아가라 한다.

 

 

꽃밭

 

도나 닦겠다고

임은 떠나시고

나는 남아서

꽃이나 가꾸며 산다네

 

뻐꾸기와 소쩍새 울음

가을하늘과 풀벌레 소리

눈 내리는 들길

이런 것 다아 심어두고

 

언젠가 오시면

보시라

자잘한 잔정도 꽃으로 피어 있거니

내 그리움의 꽃밭에는

 

 

시인의 임은 미당 서정주 시인은 일 것 같다. 그 떠난 형의 빈자리에서 형을 그리워하며 고향을 지키며 사는 시인이다. <국화 옆에서>에 등장했던 소쩍새는 이 시에서도 운다. 서정태 시인의 꽃밭에서 말이다. 윤회의 입장으로 형은 다시 올테고 그리움으로 화사하게 피어나 반길일이다. 바라고 원하는 것이야 지난 세월 아쉽다 하여도 소용이 없을 것이고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덮어둘 일이지’ 싶다.

 

제목이 주는 느낌을 가지고 시 몇 편을 읽으며 감상했다. 짧은 식견으로 어눌한 시 읽기가 되었을까 송구하기도 하다. 시는 쓰는 사람이 주인이 아니고 읽는 사람이 주인이고 보니 나도 시인이라는 명패를 갖기는 몇 년이나 쓰는 것이 쉽지 않다. ‘그냥 덮어둘 일이지’싶어도 그러면 내가 손해 보는 것은 아닌가 싶어 온데다 떠들고 그랬던 것이 부끄럽기도 하고 꽃과 나무, 바람 소리, 물소리를 벗삼아 살아야지 싶은 소망이 더 한층 생겨나게 하는 시간이었다.

 

시인의 작품이 2013년 2월 12일 1쇄를 찍었는데 2013년 3월 20일에 벌써 5쇄나 발행이라니 너무나 반가운 소식이다. 시인이 한 명 생기면 도둑이 열이 준다는 말이 있다. 쉽게 읽히나 가벼운 시집이 아니니 이 시집을 읽으며 시인의 마음을 따라하고 배우는 독자가 많아진다면 그것은 참으로 좋은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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