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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방
요시모토 바나나 지음 / 청운 / 1995년 4월
평점 :
품절
<푸른방>은 오래 전에 절판된 요시모토 바나나의 '전설의' 단편집입니다. 이 책이 비치된 도서관 목록이 바나나 팬사이트에 떠돌 정도니까, 전설이라고 말해도 틀림없겠지요. 저는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구했습니다만(도서관 검색 프로그램에 작가 이름은 '요시모도', 책 이름은 '…걸작선'이라고만 되어 있어서 영영 못 찾을 뻔했어요).
<푸른방>에는 [물거품] [백하야선] [밤과 밤 나그네] [어떤 체험], 이렇게 세 편의 중편과 한 편의 단편이 실려 있어요. 표제는 '푸른방'인데 같은 제목의 소설은 없다니 이상한 일이지만, 책에는 여기에 대한 아무런 주석이 없습니다. 어쩌면 네 편 모두 주인공의 방에서부터 소설이 시작하기 때문일까요.
[물거품]은 '닝교'라는 여자아이 이야기입니다. '닝교'는 엄마와 단 둘이 살고 있고, 아버지는 돈 많은 바람둥이로 따로 살고 있어요. 하지만 두 사람은 성격이 맞지 않아 같이 살지 않을 뿐, 여전히 사랑하는 사이랍니다. 한편 아버지는 '아라시'라는 남자아이를 옛 친구로부터 맡아 키우고 있는데요. 그러다 아버지가 사업으로 네팔로 떠나는 길에, 엄마가 동행하게 됩니다. 각각 혼자 남은 '닝교'와 '아라시'가, 그전까지는 서로 존재만 알고 있던 상대방을 우연히 만나면서 상큼한 느낌의 사랑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백하야선]은 '데라코'라는 여자아이 이야기입니다. 일을 그만두고 언제부터인가 잠에 취한 듯 살고 있는 '데라코'는 유부남과 사귀는 중입니다. 하지만 그 속사정은 남자의 아내가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상태라 인정상 이혼해 버릴 수는 없어서, 불륜으로 남아 있다, 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얼마전 자살한 '데라코'의 친구 '시오리'의 스토리가 겹쳐지는, 죽음의 이미지와 절실한 사랑이라는 테마의 소설입니다.
[밤과 밤 나그네]은 '시바미'라는 여자아이가 들려 주는 사랑 이야기입니다. '시바미'의 오빠 '요시히로'는 1년 전 사고로 죽었습니다. '시바미'의 사촌이자 '요시히로'의 연인이었던 '구회'는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행한 연애가 사별로 끝맺게 되자, 아직도 실의에 빠져 허위적거리는 상태입니다. 여기에 '구회' 직전의 '요시히로'의 연인이었던 미국인 '사라'가 일본에 찾아옵니다. 이들을 중심으로 작가는 예의 익숙한 전개방식을 통해 마음과 추억의 소중함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어떤 체험]은 [백하야선]과 비슷하면서도 다른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여자아이 '문'은, 역시 무직 상태로 이번에는 왠지 모르게 과음의 유혹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한때 사랑의 치열한 라이벌이었지만 지금은 소식이 끊긴 '하루'의 모습이 자꾸만 꿈에 떠오릅니다. 새로운 남자친구 '미즈오'와 함께 자기한테 벌어지는 이상한 일들의 이유를 추적하는 '문'은, 연애나 질투보다 확고한 소통의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단편. 제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기도 해요.
네 편의 소설에 걸쳐 감각적인 문체, 초현실적인 소재들, 가족과 소통이라는 주제와 같은 요시모토 바나나만의 스타일을 그 독특한 향기로 한껏 들이마실 수 있습니다. 벌써 사라진 군소출판사의 책 치고는 번역도 매끄러운 편이니, 구할 수 있으면 당장이라도 가까운 도서관을 뒤져 보시고, 아니면 기다려 보세요. 최신작 위주로 내던 민음사가 지난 여름에는 초기작인 <티티새>를 냈으니까, 이 책에 실린 소설들도 조만간 출판해 주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