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
임레 케르테스 지음, 박종대, 모명숙 옮김 / 다른우리 / 2002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작년 11월경에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읽었다. 의사인 저자는 나치에 의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 수용되어 ‘또 다른 삶’을 경험한다. 그 경험은 인간은 극한 상황에 처하면 ‘의지’를 통해 새롭게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거기서 얻은 경험을 토대로 저자는 실존분석을 제창하고 로고테라피라는 정신분석의 한 분야를 창시한다.

이 책을 언급한 것은 운명도 이와 비슷하게 저자인 케르테스가 자신의 강제수용소 수용경험을 토대로 소설을 지었기 때문이다. 다만 한 사람은 회고록 형식을, 다른 한 사람은 소설 형식을 빌려 이를 표현했다. 두 사람 다, 나치 수용소라는 인간이 처할 수 있는 어쩌면 가장 극한 상황에서의 ‘실존’을 글에서 다루고 있다. 이들의 글을 통해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삶을 사는 것조차(산 다기 보다 그냥 있다고 표현하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힘겨운 상황에 처한 인간을 경험한다.

저자는 15세 소년의 눈으로 ‘운명’을 전개한다. 그런데 운명은 소설이라기 보다는 회고록에 가까운 것 같다. 그것도 꽤 객관적인... 15세 소년의 눈은 청소년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세심하고 차분하다. 강제수용소에서의 끔찍한 경험조차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어 ‘비정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만큼 케르케스는 강제수용소에서의 경험을 철저하게 체득하고 인식했는지 모른다. 전체적으로 독일인과 그들의 행동을 한 걸음 물러나 바라보며 그곳에서 경험한 어떠한 사람이나 사건도 판단하기를 유보한다. 이런 작가의 시선으로 오히려 나는 ‘소년’에게 초점을 맞출 수 있었다. 강제수용소를 만들고 유대인을 탄압한 독일인은 악하고, 아무 이유 없이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은 불쌍하다는 생각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다.

저자는 수용소에서의 생활이 몸과 마음을 단순히 고통스럽게 하는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소년의 육체와 생각이 어떤 한계선을 넘나들며 운명에 부대끼는 모습을 통해, 수용되었던 경험이 그 이상의 의미가 있음을 암시해준다. 소년은 자신에게 이런 고통을 준 사람을 충분히 미워할 만한데, 곳곳에는 그런 모습보다 호기심 많고 사람, 자연을 긍정하는 순수한 소년의 모습이 보인다.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는 전쟁이 마치 스포츠인양, 전쟁상황을 생중계하고 사상자나 무기성능을 선수의 전적을 소개하듯, 수량화하여 보여주는 곳이다. 또한 흡사 게임을 즐기는 것처럼 어느 나라가 더 센 지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인간이 인간을 괴롭히고 죽이는 현실을 즐기고 있는 난, ‘소년’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 책을 읽는 내내 얼굴이 화끈거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