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여행가방 - 박완서 기행산문집
박완서 지음 / 실천문학사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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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햇빛 따사로운 창가에서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전해받고, 편안하고 아스라한 느낌으로 커피 한잔과 함께 시작한 여행은, 일주일이 못되는 여정이었지만, 마지막장을 덮고 창밖을 보니 지금은 다시 건물사이로 매서운 바람이 불고 있어서, 이른봄에 여행을 떠났다가 아주 오랜 여행을 하고 이제 막 돌아와 겨울의 초입에서 이번 여행의 시작을 회상하는 듯하다.  설레는 마음으로 여행을 준비하고, 초이선사를 찾아가는 다산의 산행으로 시작하여 네팔의 파슈파티화장장까지 지난 지난 5박6일간의 숨찬 여정을 끝내고 책상앞에 앉았다. 이번 여행은 혼자하는 여행이 아니고, 나와 많이 다른 작가의 시각과 함께 했던 여행이라서 더더욱 풍성한 추억을 만들었다.

작가는 다산이 험준한 산고개를 넘을 때에 생각과 뜻을 나눌 친구를 찾아가는 기쁨이 그만큼 컸으리라 짐작한다. 문득 달빛이 너무도 밝고 아름다워서 산넘어 친구와 함께 느낄 요량으로  밤새 달려가서 새벽에 도달한 친구집 앞에서 다시 발길을 돌려왔다던 어느 스님이 들려준 일화가 생각난다. 달려가 차를 함께 마시든, 집앞까지 갔다가 돌아와 혼자 차를 마시든 그렇게 함께 하고픈 대상이 누구든 있고, 또 그래서 행복한 법이다.

해일로 20만이 넘게 희생된 현장의 참담함이나, 할일이 없이 서성대는 가난한 아프리카 젊은이의 무력함을 읽어내는 작가의 마음을, 이들과는 다른 삶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고 해도, 이들의 존재를 인식하면서 분리된 채로 동시에 살고 있다는 것 그 자체를 지옥으로 여기셨을 것으로 유추함이 지나친 사고의 비약일까? 함께하지 않는 삶에서 영원한 평화나 안식은 찾을 수 없을 것으로 여겨진다.

여행하는 곳마다 느끼는 작가의 자연에 대한, 자연으로 돌아가고 싶은 소망은 내 자신의 그것과 일치한다.  그래서 티벳고유의 완전무결한, 헛되게 쓰이는 것이 없는 검소함으로 자연과 합일된 삶은 내게 이상향으로 느껴졌다. 늘 넘치는 재화들을 보면서, 그 버려지는 재화들을 만들기 위해 낭비된 나를 비롯한 어떤이들의 삶을 되새기게 되고, 그래서 더 허무해지고 찾을 길 없는 삶의 의미를 그 곳, 티벳에서는 가지고 있으리라.. 짐작했다. 그것이 그들이 느끼는 평화의 근원이리라...  

나는 네팔에 두 번 갔었다. 1996년과 2005년, 10년을 사이에 두고, 주마간산격으로 다니는 여행객은 강산이 변한다는 10년의 차이를 느낄수가 없었다... 이른아침 네팔차로 시작하여 하루 세끼의 식사를 따뜻하게 장만해주는 셀파에게 우리가 지불하는 금액이 무척 적었다는 것과 아이가 배가 고프니 우유값을 달라고 따라오던 부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고 돌아서 왔던, 어두워 오는 저녁 타멜 골목길의 기억만이 선명하다. 작가는 네팔에서는 티벳에서보다 한결 편안한 시각이 되어 있었다. 거기에는 작가가 말하는 침략자에 대한 분노가 있고, 또 생활환경의 절대적인 차이가 있었겠지만... 네팔에 대해 나와 다른 작가의 시각으로부터, 경험한 만큼 안다는, 아는것 만큼 본다는 말의 의미를 새삼 느끼게 된다.

이제 나는 길을 떠날 때에, 옷과 선물을 넣을 가방말고, 충분히 느끼고 보고 나눌 수 있을 준비된 마음을, 또 여행하면서 더 크게 늘릴 수 있는 그런 여유와 함께 나서야 함을, '잃어버린 여행가방'을 내려놓으면서 새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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