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구름과 장미의 나날

 

 

 

 

지난 주말에 저자로부터 <나의 우울한 모던보이>(창비, 2005)를 선물받고 가장 먼저 읽어본 건 3부에 실린 '구름과 장미의 나날'이란 글이다('술과 장미의 나날'이 아니다!). 김춘수(1922-2004)의 처녀시집 <구름과 장미>(1948)의 표제작인 '구름과 장미' 읽기인데, 작년 11월에 타계한, 한국시의 이 대표적 시인 한 분을 기억하는 겸해서 그의 글을 읽었고 이 글을 쓴다. 시인의 죽음에 기대어 그의 처녀작을 읽는다?

 

 

 

 

그게 억지스러운 일은 아닌 게 시인의 대담을 포함하고 있는 <춘아, 춘아, 옥단춘아, 네 아버지 어디 갔니?>(민음사, 2001)에는 (이전에 지적한 바 있지만) 김춘수의 데뷔시집 <구름과 장미>가 <죽음과 장미>로 오기돼 있다(233쪽). 이러한 예기치 않은 우연/은유에 기대어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시작되는 시 '구름과 장미'의 후렴은 '죽음과 장미 되어 오는 것'으로 다시 읽을 수도 있는 것. 장미 가시에 찔려 죽은 시인 릴케를 떠올린다면, '죽음과 장미'는 한편 그럴 듯한 커플이 되기도 한다.

해서, 작년에 나온 시인의 유고시집 <달개비꽃>(현대문학)이 이어서 김춘수의 시와 에세이 선집들이 올해에도 연이어 출간되었으나 거기에 동참한 바 없는 나는 나대로의 애도의 뜻을 이 자리에서 표하고자 한다. 그건 모든 시는 결코 아니지만 김춘수의 어떤 시들이 나를 즐겁게 했던 기억을 내가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애도의 뜻을 담고 있는 페이퍼이지만 이 글은 '즐거운 책읽기'로 분류된다. 하긴 친구의 책을 읽는다는 건 살짝 흥분되면서도 즐거운 일 아니겠는가?   

1948년이면 김춘수의 나이 26살 때이고 청마 유치환의 서문을 달고 있는 이 처녀시집은 자비로 출판된 시집이다. 그러니까 이 글의 대상은 '원로 시인' 김춘수가 아니라 '새파란' 김춘수, 반세기가 넘어갈 그의 시의 여정을 이제 막 시작한 '풋풋한' 청년시인 김춘수이다. 나 자신도 더듬어보아야 할 그런 시절의 시인. 그때 그는 이런 걸 써놓았다.  

저마다 사람은 임을 가졌으나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직접 확인하지는 않았으나 <구름과 장미>의 맨앞에 실려 있다는 이 시는 시 자체보다는 제목의 상징성 때문에 자주 회자되는 시이다. 그 출처는 바로 김춘수 자신이며 이장욱도 곧장 인용하고 있는 대목에서 시인은 이렇게 설명했다: "구름은 우리에게 아주 낯익은 말이지만, 장미는 낯선 말이다.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도 많이 나오고 있지만, 장미는 전연 보이지가 않는다. 이른바 박래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구름을 보는 눈이 장미도 보고 있었다. 그러나 구름은 감각으로 설명이 없이 나에게 부닥쳐왔지만, 장미는 관념으로 왔다."

인용한 대목은 이장욱의 책에서 재인용하지 않고 <김춘수 문학앨범>(웅진출판, 1995), 187쪽에서 인용했다('이른바 박래어다'라는 한 문장이 더 들어간다). 이 책은 김춘수 시의 독자라면 필히 소장할 만한 책인데, '앨범'인 만큼 연대기와 작품론, 자선 대표작들은 물론이고 시인과 관련한 사진자료들을 다수 싣고 있다. 시인의 서문에 따르면, "사진을 중심으로 한 이런 따위 문학앨범은 나 자신에게는 하나의 좋은 기념물이 되겠고, 나의 독자들께는 하나의 참고물 또는 흥밋거리가 되어 주리라고 기대해" 볼 만한 책이다. 이른바 종합선물세트 유형이다.   

이 인용에 대해서 이장욱은 시인의 발언을 시인 자신에게 되돌리고자 하는 게 아니라고, 그러니까 이 시가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를 환기시킨다는 식으로 얘기하려는 게 아니라고 밝히면서 그가 원하는 건 '텅 빈 오독'이며, "이 잘못읽기로 그의 시적 편력을 은유하는 것"이라고 미리 단서를 단다. 요컨대, "구름과 장미의 나날. 이것은 그의 기나긴 시적 편력을 요약하고 있는 표현일는지도 모른다"(287쪽)는 것. "이 기나긴 시적 편력은 구름과 장미의 '사이', 혹은 구름과 장미의 '너머'에서 한 시인의 필생이 거쳐온 고투에 다름아니다"(288쪽)라는 것. 그의 생각을 조금 따라가보고, 나는 나 대로의 '오독'을 제시해보겠다.

"보편적 세계의 저 헛것으로 떠도는 관념(구름)들과 구체적 세계에 피고 지는 이 부질없는 실존(장미)에 대해서라면, 하긴 세상의 어느 시인이 하염없지 않았을 것인가. 그가 한때 머물렀던 무의미, 혹은 비대상의 시학이란 이 하염없는 자유에 다름아니었을는지도, 혹시 모른다. 이 하염없음에 자유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은, 그가 말했듯 허무의 산물이어서 역설적이다. 그것은 구름(관념)과 장미(세계) 어느 쪽에도 온전히 귀의하지 못했던 자의 비애일 터이다."(287-8쪽)

데뷔작이라 할 만한 한편의 시 읽기를 통해서 이렇듯 한 시인의 시적 편력 전체를 읽어내는 건 '오독'이란 전제하에서도 과감하며 경탄스럽다. 비록 그 시적 편력이 거의 완료된 시점(2001년)에 씌어진 글이어서 예언적이라기보다는 사후적인 성격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긴 하지만. 나에게 흥미로운 건 사실, 이러한 과감한/경탄스런 결론이 아니라 '잘못읽기'의 과정이다(어차피 죽음으로 마무리될 거라는 점에서 모든 생애는 '비애'의 정조를 지우지 못한다. 해서, 내 생각에 '비애'는 시인 김춘수만의 것은 아니다). 이장욱은 2연부터 읽어나간다(1연은 전제이지만 3연에서 반복되기에 뒤에 읽어도 무방하겠다).

눈뜨면

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밤엔 뜰 薔薇와 

마주앉아 울었노니

 

"시 속으로 바람은 불고 구름은 흘러간다. 구름은 눈뜨면 물 위에 담기는 부드러운 가상(假象)이다. 그것은 형태를 지니지 않아 만져지지 않으며, 그것은 수면에 스스로를 비추며 흘러갈 뿐이어서 인간의 규정을 허용하지 않는다. 구름은 드러냄과 사라짐의 경계를 스스로 지우며 저 하늘에 유구하다. 그래도 그는 이렇게 말한다: 님은 구름이 되어 온다."

 

우선 1-2행에 대한 읽기인데, 공감할 만하지만, 구름과 장미에 대한 시인 자신의 규정과는 다소 어긋나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는 구름/장미를 낯익음/낯섬, 감각/관념의 짝으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데 이장욱은 구름을 '일부러' 가상관념으로 읽어낸다. 그건 물론 예고된 바대로의 '잘못읽기'이다(한데, 그는 어째서 이 '잘못읽기'를 통한 결론을 시인의 시적 편력에 대한 요약으로 제시하는 것일까?). 그리고 이어지는 3-4행 읽기.

 

"장미는 밤의 뜰에 피어 그의 울음을 받아준다. 그것은 제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어둠속의 그를 위무하며, 그것은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인 것이어서 허허로울 수 없다. 장미는 꽃 지는 계절에 지는 꽃잎들 속으로 흩어질 유한(有限)을 제 운명으로 지니지만, 그래도 님은 장미가 되어 온다."

 

앞에서 구름을 '부드러운 가상'으로 읽은 이장욱은 이번엔 '장미'를 '구체적인 아름다움'으로 읽는다. 한데, 내가 읽기에 이 시에서 장미는 '그 장미'의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어서 "그의 밤 그의 뜰에 피어 있는 바로 그 장미"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인지는 의문이다. 책에 실린 다른 글 '단 하나의 장미'에서 그가 적어놓은 바를 참조하면, 보통명사로서의 장미에 대해서 우리는 아름답다거나 아름답지 않다고 판단할 수 없으며, "아름다움을 판단하는 것은 '장미 일반'이 아니라 '바로 이 장미'에 대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예술'이라는 것은 삶과 세계를 끊임없이 '고유명사화'함으로써만 존속한다. 대상을 '고유명사화'하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자질이다."(97쪽)

 

 

 

 

 

 

 

 

 

그 '고유명사화'가 '이미지화'가 환치될 수 있는 말이 아니라면, 내 생각에 김춘수는 시인으로서의 자질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다. 그는 '이 장미'가 아니라 '장미'에 대해서 노래하며, 더 나아가 '꽃'에 대해서 노래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유명사화한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것과 동의어이다"란 이어지는 단언에 기대어 말하자면, 김춘수는 사랑을 현저하게 결여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사실, 시에서 '의미'까지 배제하려고 했던 시인이 사랑타령을 늘어놓는다는 건 상상하기 어렵다. '쨍한 사랑노래'야말로 反김춘수적이지 않을까? 유일한 예외라고 할 만한 것이 먼저 사별한 아내에게 바치는 시들을 모은 시집 <거울 속의 천사>(민음사, 2001)일 듯싶은데, 그런 경우에도 내 기억에 시인은 단 한번도 아내의 이름(고유명사)를 시에서 호명하지 않았다. 아내는 '거울 속의 천사'로 이미지화되면서 오히려 일반화/추상회되었을 뿐이다.

 

해서 다시 확인하게 되는 것은 이장욱의 읽기가 그의 약속대로 '잘못읽기'라는 것. 그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장미로서의 님은 나와 더불어 구체적으로 울고, 구름으로서의 님은 물 위에 가상으로 떠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구름과 장미의 대비가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구름을 물위에 담고 밤뜨락의 장미와 마주앉아 우는 자의 자세이다. 그가 기다리는 님은 구름과 장미가 되어 올 것이지만, 이것은 예정이나 필연 혹은 당위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는 슬프고 한량없으니, 그 슬픔과 한량없음을 서술하는 동사들은 온전한 능동형으로 스스로를 견뎌내고 있다. 그는 하염없는 나날을 지나며 물위에 구름을 '담고' 장미와 '마주앉아 운다.'"(286-7쪽, 강조는 나의 것)

 

나는 장미의 구체성과 구름의 가상성이라는 대비에 의문을 제기했지만, 중요한 건 그러한 대비가 아니며 '우는 자의 자세'라고 하니까 굳이 더 캐묻지는 않도록 한다. 대신에 구름과 장미의 관계에 대해서 한번 더 생각해보자. 1연에서 '임은 구름과 장미 되어 오는 것'이라고 명료하게 전제돼 있지만, 이때 구름과 장미를 연결시켜주는 등위접속사 '과'는 연의 구조에 있어서도 병렬성을 낳는다. 해서 2연의 내용을 산문적으로 풀면, 이렇게 될 것이다.

 

(아침에) 눈뜨면 나는 (눈)물 위에 구름을 담아보곤 했다.

밤엔 뜰 장미와 마주앉아 울었다/울곤 했다.

 

'밤엔'이란 시간부사가 전제로 하는 것은 '아침에'이며 그것은 전제되는 것이기에 생략 가능하다. 그리고, 구름을 '물 위에' 담아본다라고 돼 있지만, 이때의 2행 문두의 '물'은 1행 문두에 나오는 '눈'과 호응하면서 쉽게 '눈물'을 연상시킨다. 그것은 물 위에 담기는/비치는 구름이면서 나의 눈물에 맺히는 구름이기도 한 것. 그리고 그렇게 '눈물'을 떠올릴 때 우리는 4행의 '울었다'는 동사와 자연스럽게 조우할 수 있다. 3행에서 '뜰에 핀 장미' 대신에 왜 ('뜰장미'도 아닌) '뜰 장미'를 고집했을까? 나는 그것이 '눈면'의 '뜨'와 호응을 이루게 하기 위해서라고 본다. 시어의 경제를 위해서 공통되는 내용들이 생략되긴 했지만, 1-2행과 3-4행은 구문적으로, 의미론적으로 반복이며 이 경우 구름과 장미는 말 그대로 등가적이다(즉, '구름이거나 장미'가 아니라 '구름과 장미'인 것이다).

 

그렇다면, 구름은 뭐고 장미는 뭔가? 시인 자신의 설명에 따르면, 구름은 우리의 고전 시가에 많이 나온다. 그럼 장미는? 서양의 현대시에 많이 나온다(특히 릴케의 시). 이런 식의 설명이 암시하는 것은 소재로서의 '구름'과 '장미'가 막바로 우리시와 서양시를 제유하고 있다는 것. '구름과 장미' 자체가 시집의 제목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시인-화자의) 임으로서의 구름과 장미는 바로 '시' 혹은 시의 뮤즈이며 다른 것이 될 수 없다.

 

고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임을 가졌으나 시인으로서 나의 임은 시, 즉 구름과 장미이다, 라는 게 내가 읽는 이 시의 1연이다. 여기서, 이장욱이 의도적으로 배제한 바이긴 하지만, "미당의 구름이나 릴케의 장미"가 다시 환기되는 건 불가피하다. 물론 이 경우 미당과 릴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시인의 제유이지만.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시의 2연은 낮이나 밤이나 임(=시) 생각을 했다는 것 정도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우는 자의 자세'를 이장욱은 강조했지만, 김춘수의 초기시들에서 '울다'란 동사는 마치 상투어처럼 빈번하게 등장한다. 가령 '부재'라는 시에서 "어쩌다 바람이라도 와 흔들면/ 울타리는/ 슬픈 소리로 울었다"나 '길바닥'이란 시에서 "언덕에는 전봇대가 있고/ 전봇대 위에는/ 내 혼령의 까마귀가 한 마리/ 종일을 울고 있다" 같은 연, 그리고 잘 알려진 시 '꽃을 위한 서시'에서 "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無名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같은 시구들을 대하자면, 이 '울음'은 서양시에서 "새들이 노래한다"를 "새들이 운다"라고 우리말로 옮길 때의 그 울음인 것이어서 '한량없긴' 하지만, '슬픈' 것은 아니다(그것이 슬픈 경우엔 "슬픈 소리로 울었다"라고 명시된다). 즉, 김춘수 시의 '울다'란 동사에서 우리가 읽을 수 있는 건 어떤 태도이지 정조가 아니다. 이제 3연이다.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

임은 

구름과 薔薇 되어 오는 것

 

이장욱의 해설: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그는 중얼거린다. 저마다 사람은 님을 가졌으나,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 그는 저 온전한 님을 온전히 볼 수 없어서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망연할 것이지만, 결국 그 기다림의 자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염없는 날일수록/ 하늘만 하였지만"에서, 하늘'만'의 그 '만'이 비교급의 조사인지 유일함을 표시하는 조사인지를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 다만 그와 더불어 50여년 전의 저 구름과 장미에서 오늘의 구름과 장미에까지 흘러갈밖에."(287쪽)

 

1행의 "참으로 뉘가 보았으랴?"에서 생략된 것은 목적어이다. 이장욱은 "참으로 누가 제 님을 보았을 것인가?"(=아무도 님을 보지 못했다)로 풀고 있지만, 사람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님을 그들 자신은 누구도 보지 못했다라는 건 다소간 모순되는 진술이다. 내 생각에 이 '보다'란 동사의 목적어는 2연이고 2연의 '나'이다. 밤낮으로 님(=시)을 그리워하며 눈물짓고 울고 있는 '나'를 참으로 누가 보았을 것인가, 라는 것.

 

이어서 "(그리움이) 염없는 일수록/ 하늘만 하였[다]"는 건 이장욱의 지적대로 문법적으로나 의미론적으로 모호한 표현이지만, 음성학적으론 '하-날'/'하늘'로 호응하기에 정당화된다. 즉, 그건 동어반복이다. '하늘만 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님은 단호하게 "구름과 장미 되어" 온다. 이건 사실의 확인이면서 시적 화자의 결의이다(시집 맨처음에 왔다면, 이 시는 '서시'의 기능을 수행한다). 그렇게 읽을 수 있는 건 이미 충분히 암시되었지만 내가 이 시를 일종의 시에 대한 시, 즉 메타시로 읽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이쯤에서 상기해볼 필요가 있는 것은 김춘수가 우리시사에서 시를 쓴다는 것에 대한 가장 강하면서도 분명한 자의식을 평생 유지했던 시인이라는 점이다. 내 견문으로 그는 가장 많은 분량을 '시론'들을 써낸 시인이다(낱권으로 7권이고 전집 2권 분량이다. 페이지수로는 1,200쪽 가량). 25살 이후에도 시론을 갖지 않고 시를 쓰는 시인들을 그는 '아마추어'라고 부르며 신뢰하지 않았다. 해서 내가 보고 읽기에 그는 이성적인 통제에 매우 능한 대표적인 지성파 시인으로서 감상성과는 거리가 먼 태도를 평생 견지했다.

 

비록 이 시에서 '장미'란 시어가 등장하지만, 그때의 장미는 구체적인 꽃이라기보다는 '장미'라는 기표이고 추상이다(김춘수는 생화(生花)를 싫어한 조화(造花) 예찬론자였다). '하염없다'란 표현도 나오지만, 나는 그것이 '울다'와 마찬가지로 시적 상투어라고 생각한다. 때문에 "하염없는 날들이 흘러가고 그의 님은 아직도 구름과 장미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을 것이다. 형체 있는 것과 형체 없는 것, 만져지는 것과 만져지지 않는 것, 구체적인 것과 보편적인 것, 높은 것과 낮은 것, 그리고 결국에는 죄와 구원 사이."(290쪽)라는 이장욱의 지적에 유보적이다. 분명 '구름과 장미 사이'에 김춘수는 놓여 있지만, 그때 '구름과 장미'가 의미하는 바는 시의 전통이자 시의 테크닉이라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의 내부는 나도 모르는 어느 사이에 작은 금이 가 있었다." 시인 자신의 해설에서 나의 눈길을 끄는 건 바로 이 문장이다. 그 금은 구름(=감각=전통)과 장미(관념=서양) 사이의 금이며, 김춘수라는 시인의 주체를 (정신분석학의 용어를 가져오자면) '빗금쳐진 주체'로서, 그러니까 진정한 주체로서 정립시켜주는 금이다. 알려진 바대로, 그가 시에 입문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는 1939년 일본에 유학을 가서 대입을 목적으로 학원에 다니던 시절 한 고서점에서 구해 읽을 일역판 릴케 시집을 발견하고서이다. 그리고, 이어서 만난 일본인 교수의 시론 강의에 매혹되어 그는 시인으로의 길에 들어선다(2002년에 나온 <쉰 한편의 悲歌>(현대문학)는 그가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를 모델로 하여, '마침내' 그와 대결하기 위해 쓴 작품이다).  

 

그의 첫시집이 나온 것이 (그는 '의미에서 무의미까지'란 글에서는 1947년으로 기억하고 있지만) 1948년이니까 대략 9년만의 일이다. 릴케의 시에 영감을 받아 시를 쓰게 됐지만(=의식) 한국어로 시를 써야 한다(=언어)는 자의식, 그것이 흔한 해석대로. '장미'와 '구름'이 의미하는 바이다. 나는 이러한 사정이 정서적으로 '비애'의 함축을 갖는다고 보지 않는다(비록 그가 역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를 견지했지만, 이때의 허무는 분명 비애와 구별된다). '구름과 장미의 나날'은 무의미시만큼이나 그리고 형이상학만큼이나 테크니컬하고 건조하다. 적어도 김춘수의 경우에는.

 

05. 12. 22.

 

P.S. 김춘수의 '구름과 장미'란 시에 대해서 나는 한번도 주목해 본 적이 없다(이 시에 대한 시인의 언급은 물론 유의미하지만). 따라서, 이장욱의 글이 아니었다면 이 글은 씌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방향으로 씌어졌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김춘수의 초기시는 따로 있는데, 그건 'VOU'이다(아마도 내 친구와 나는 시에 대한 취향이 많이 다른 듯하다). 아래는 그 전문이다.

 

VOU라는 음향은 오전 열한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고, 저녁 다섯시의 바다가 되기도 하다.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사람에게는 마음 즐거운 한 때가 되기도 하고, 마음 우울한 사람에게는 紫色의 아네모네가 되기도 한다.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그만한 이유가 되기도 한다.

 

김춘수답지 않은 이런 시에는 다른 시들과 비교할 때 특별한 테크닉이 구사되고 있지 않다. 하지만, 한때 '사랑하고 싶으나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었던 내게는 좋아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던 시이다. 그러니 '구름과 장미'보다 나는 '자색의 아네모네'를 기꺼이 더 사랑해마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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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의 여인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1
윌리엄 아이리시 지음, 최운권 옮김 / 해문출판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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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에 기대어 이 책을 끝까지 읽고 나면 아마 허무함을 느낄 가능성이 크다. 세계 3대 추리소설로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타 작품들에 비해 미스테리적인 재미는 다소 떨어진다. 더군다나 반전에 목숨거는 영화들을 매해 수편씩 만나는 현대독자들이 이 옛날의 구닥다리 반전에 얼마나 '쪼금' 놀랄런지 안봐도 비디오다.

이 작품의 매력은 차라리 작품 내에 깔려있는 고혹적인 분위기에서 찾는게 더 나을 것이다. 일련의 반전물이 어둠 속에서 갑자기 터트려지는 후래쉬로 인해 가려져있던 물건들이 확 보이면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는 충격요법이라면 이 소설은 나지막하게 조명이 쳐진 오래된 바에서 분위기를 음미하는 느낌이다. '여인'보다는 '환상'에 더 치중해서 읽기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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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낭만적 사랑과 그에 뒤따르는 행복, 그 환상의 종말에 대하여.
위대한 개츠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5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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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젊은이의 동일한 죽음

내 나이 또래인 두 젊은이의 죽음을, 서로 다른 곳을 바라보는듯한 이야기의 동일한 결말을 본다. 순수한 사랑이 등을 돌린 시점에서 개츠비는 오해와 음모가 절반씩 뒤섞인 흉탄을 맞고 떠났다. 노희경의 드라마 ‘우리가 정말 사랑했을까(이하 우정사)’의 재호는 진실한 사랑의 품에 안겨 다시 눈을 뜨지 않는다. 보라. 지고지순한 사랑, 흔히들 말하는 순애보의 패배와 승리를 보여주는 두 인물의 끝은 동일하다. 주인공의 죽음을 ‘파국’이라고 받아들인다면 두 이야기 모두 비극임에 틀림없을게다. 그렇지만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 닉 캐러웨이(이하 닉)는 저 비극적 사나이의 이름 앞에 ‘위대한’ 이란 형용사를 붙이며 찬사를 보내고 있다. 다시 눈을 뜨지 못하는 재호를 품에 안고 눈물 흘리며 ‘나는 그를 깨우지 않겠다’라 말하는 신영을 바라보며 느끼는 감정이란 슬픔만은 아닐 것이다.

개츠비의 죽음을 마주하고난 다음에야 재호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재호의 죽음을 이해하고 나니 개츠비가 죽을 수 밖에 없었다고 결론짓게 되었다. 사랑이 완성된 순간 세상을 떠난 재호의 삶도 지고지순한 사랑에 배신당하고 세상을 등진 개츠비의 인생도, 둘의 사랑도 모두 비극적이다. 이 글은 행복하고 아름다운 이야기를 바라는 대다수 독자들의 바람을 왜 피츠제럴드와 노희경이 저버릴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추측이자 변론이다.

 

현대에서 사랑의 조건

결혼을 전제로 한 사랑을 다루는 드라마를 본다. 잊혀질 여유도 없이 드라마에서 빈번하게 다뤄지는 갈등의 축 중 하나는 연인간의 빈/부 격차다. 부유한 여자(혹은 남자)가 가진 것은 없지만 빛나는 매력을 지닌 남자(혹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다. 당연히 주변과의 불화와 갈등이 뒤따른다. 언제나 주인공은 고민한다. ‘진실한 사랑’을 택하고 모든 것을 버릴 것이냐, ‘적당히 좋아하는’사람을 택하고 지금의 부귀영화를 그대로 안고 살아갈 것이냐. 주목해야 할 지점은 사랑에 대한 고민에서 고려해야 할 주요한 요소 중 하나로 ‘물질적 조건’이 빠지지않고 언급된다는 데 있다. 멀리 갈 필요 없다. ‘진실한 내 사람을 찾았습니다.’라 미소짓는 사람의 행복한 모습을 실은 광고지의 결혼정보회사는 서울대부터 고졸까지, 부모님의, 혹은 자신의 재산에 따라 노블레스부터 C급까지 등급을 매긴다. 결혼이 어디 두 사람만 좋아서 하는 거냐고, ‘집안’과 ‘집안’간의 결합이라 하는 윗세대들의 조언과 당부를 심심찮게 들을 게다. 인정하자. 이 시대 사람들이 생각하는 사랑의 요소 중 하나는 ‘물질적 기반’이다. 간혹 이런 류의 갈등이 중심축이 되는 드라마에서 표독하게 생긴 시어머니가 내뱉는 말, ‘사흘만 굶어봐라, 어디 사랑이 눈에 들어오나’라는 소리는 이 구조를 꿰뚫고 있다.

개츠비의 사랑을 본다. 한때 죽자살자 사랑했던 데이지는 개츠비를 기다리지 못하고 그간 부자집 딸로서 자신이 누려온 화려한 생활을 물질적으로 보장해 줄 수 있는 톰과 결혼한다. 이상적인 사랑의 양상에 대한 고찰, 톰의 바람기, 바르지 못한 됨됨이는 그녀에게 우선적인 고려 사항이 아니었다. 그 결단이 “사랑이나 돈 또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현실적인 이유(p. 213)”에 의해 이루어졌음을 주목하라. 군생활에서 받은 마지막 봉급을 데이지와의 추억이 서리진 곳을 찾는 데 소진해버린 개츠비는 아마도 이렇게 뇌까리지 않았을까. “아직도 난 그녀를 사랑해. 그녀가 원하는 ‘황금 모자(여는 시, …황금 모자를 쓰고 높이 뛰어오르는 사랑하는 이여, 당신을 차지해야겠어요! P. 7참조)’ 를 손에 넣기만 한다면, 그녀를 얻을 수 있을거야. 그렇게, 그녀를 얻고 말겠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만만치 않은 물질적 풍요를 차지한 개츠비, 다시 데이지를 만나 그간 자신이 지켜온 순수함을 그녀에게 강요한다. “그에게 진실을 말하기만 하면 되는 거요. 그를 한 번도 사랑한 적이 없다고. 그러면 그 일은 영원히 씻겨 나가는 거지.(p. 187)” 그러나 위대하지 못한 사람, 평범한 사람은 순수함을 완벽히 지키거나 받아들이지 못한다. “저 사람을 한 번쯤은 사랑했단 말이에요… 하지만 당신도 사랑했어요.(p. 188)” 보라. 물질적 풍요는 평범한 사람의 사랑을, 혹은 그 사람이 사랑이라 생각하는 바를 집어삼킬 수 있다. 혹 그걸 돈지랄하며 기간 동안 쌓인 ‘정’ 때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중요한 건, 개츠비가 이뤄낸 순수한 사랑에 대한 자세와 부의 완벽한 결합조차, 평범한 여자의 풍족하지만 행복하지 않은 일상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는 데 있다. 이럴 때 사람들이 흔히 택하는 길은 도피이다. “겁에 질린 그녀의 눈은 혹시 지금껏 어떤 의지나 용기가 있었다 해도 이제는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음을 보여주었다.(p. 191)” 평생을 걸고 매진한 목표가 신기루처럼 스러진 남자에게 남은 건 파국 뿐이다. 결국 데이지는 이제껏 익숙해진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주고 앞으로도 그러할 톰 곁에 남아 개츠비의 죽음을 방조하고 만다. 개츠비의 죽음을 전해들은 그녀는 슬퍼했을까? 며칠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다시 톰의 재물과 환락 속에서 생동감넘치는 미소를 지어가며, 간혹 톰의 바람기에 짜증내며 살아갈 것이다. 그게 그녀 행동반경에서 벗어나지 않는 삶이다.

 

현대에서 사랑의 완성을 찾고 싶다면

그럼 순도 100% 사랑의 완성을 현대에서 찾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방법은 있다. 조건이 잘 맞아들어가던가(같은 계급의 비슷한 사람끼리 눈이 맞는 등), 아니면 저 무자비한 구조의 힘을 비틀 정도의 극단적 상황이 온다면 가능할지도 모른다. 이 양상을 나는 노희경의 우정사에서 본다. 자신에게 물질적 풍요를 제공해 줄 수 있는 현수와 진심으로 좋아하는 신영 사이에서 갈등하던 재호는 꼬이고 꼬이는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현수를 택한다. 그 순간 간간히 자신을 괴롭히던 두통의 원인이 급성뇌종양임을 선고받는 재호. 절망하며 일에 매달리는 재호를 어떻게든 병원에 데려가고 하는 현수에게 재호는‘이대로 죽어버리겠다’고 받는다. 그러나 재호는 자신의 삶을 하루하루 이어나갈 수 있도록 병마와 싸우는 것이, 사랑하는 사람 옆에서 하루하루 더 살아나가려고 안간힘쓰는 것이 신영을 사랑하는 것과 동시에 자신의 삶을 사랑하는 것임을 깨닫고 신영에게 돌아가 그녀 품에 안겨 눈을 감는다. 구조의 힘을 무너뜨린 사랑의 완성에 감동받기 이전 재호에게 씌워진 굴레에 가슴이 미어진다. 보라. 저 무서운 구조의 힘을 비틀고 완전한 사랑을 완성시키기 위해서 한 젊은이의 삶이 제물로 바쳐졌다고 하면 지나친 표현일까. 거꾸로 생각해보자. 뇌종양에 재호가 걸리지 않았다면 결국 현수를 재호는 사랑했을 것이다. 몸 가는데 마음 안 갈 수 없는 게 사람 마음이기에. 물질을 사랑의 조건으로 삼는 구조의 힘을 비틀기 위해서는, 이 구조에서 완성된 사랑의 모습을 현실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는 그 힘을 뛰어넘는 극단적 상황이 필요하다. 그래서다. 노희경이 순수한 사랑 완성을 설득력있게 그리기 위해서, 재호는 죽어야만했다.

 

설득력있는 사랑이야기를 쓰는 방법

정리하자. 물질이 사랑의 조건이 되어버린 시대에 완벽히 순수한 사랑을 평범한 사람에게 요구할 수 없음을 피츠제럴드와 노희경은 꿰뚫고 있다. 개츠비의 비극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사랑의 조건과 물질적 기반이 헤어질 수 없는 시대의, 구조의 탓이다. 이 소설의 시대상이 전간기 US자본주의의 황금기, 재즈 시대임을 떠올려본다면 저 시대상을 ‘자본주의 일반’으로 확장시켜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을 늘였을 때, 아주 씁쓸한 결론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평범한 사람이 사회구조를 뛰어넘어 완벽히 순수한 사랑을 이룰 수는 없다. 가능해도 그건 보통 일이 아니다. 라는. 이런 구조에서 사랑의 모습을 설득력있게 그리려하는 작가가 택할 수 있는 길도 두 가지이다. 자본주의 현실 구조에서 순수한 사랑이 무너져가는 비극적 양상을 그리던지, 그 무서운 구조의 힘을 비틀 만큼의 극단적 상황을 설정하여 그 완성을 써내려가던지.

 

군말_두 가지 사실을 남는다.
하나. 개츠비는 진정 위대했다. 순수를 지키는 것이 불가능한 시대상황에서 파국적 종말 앞에 서서도 마지막까지 이를 고수하려는 삶의 자세 때문에 말이다. 그러기에 닉은 극히 진취적인 독백으로 개츠비의 삶을 마무리지을 수 있었을 게다. “그리하려 우리는 조류를 거스르는 배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려가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전진하는 것이다.(p. 255)”

둘. 재호와 신영은 진정으로 사랑했다. “내가 신형이 그 사람한테 보여 주고 싶은 모습은 전처럼 건강한 모습이 아니예요.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그 여자 때문에 버티려고 하는... 바로 이 모습이예요. 내가 그 여잘 사랑하는 건, 내 인생을 사랑하는 거야.(우정사 41회, 재호의 절규. 우정사의 주제가 압축되어있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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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로고스적 뮈토스: 감성적 기록을 논리적으로 풀어내는 이성의 힘
그리스 신화의 세계 1
유재원 지음 / 현대문학북스 / 1998년 5월
평점 :
절판


"신화"가 차고 넘치는 요즘이다. 조엔 롤링의 헤리 포터와 톨킨의 반지의 지배자가 영화화되어 '뜨기'시작한 탓도 있겠고, 디지털 세대의 사람들이 열광하는 비디오 게임과 판타지 소설의 세계관이 결국 신화에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 여하튼 중요한 건 하루가 다르게 '신화'를 주제로 한 책과 글이 쌓여가는 데 있다. 그 결과, '신화'를, 특히 그리스 로마 신화를 다루는 책은 양적으로 지난 몇 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게 늘어났다. 이렇게 정보의 홍수속에 파뭍혀 살 때일수록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 볼 필요가 있다.

"도대체 왜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읽는가?"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고 싶을 뿐이라면 판타지 소설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게임과 판타지 소설에 등장하는 등장인물들에 대한 배경과 그 이름의 유래를 알고 싶은 거라면 신화의 세계에 대하여 간단간단히 요약된 웹 게시물을 찾아 읽던가, 신화 사전을 그때그때 뒤지는 편이 나을게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이루고 있는 세계의 단편적인 모습을 살피고 싶다면 멀게는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나 벌핀치의 '그리스 로마 신화'를, 가깝게는 이윤기의 '뮈토스' 등을 읽으면 그걸로 족하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는 즐거움'은 이렇게해서도 충분히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한 발 더 나아가, 그리스 로마 신화의 세계관에 대해, 등장 인물들과 에피소드의 배경에 대해, 도대체 왜 그런 이야기가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오늘까지 내려오는지, 왜 신화를 '인간 모듬살이의 꿈'이라고 지칭하는지 알고 싶다면 그저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전해주는 것과 또 다른 접근방법이 필요하다. 그 길라잡이는 바로 '로고스(logos)', 즉 이성적인 통찰력이다.

이윤기는 자신이 세 권으로 정리하여 풀어 쓴 그리스 로마 신화 세 권의 책 제목을 '뮈토스(mythos: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허구의 이야기. )'라고 붙였다. 논리적으로 설명될 필요가 없는(설명할 수가 없는. 이 아니다)이야기, 그 자체의 매력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를 지닌다는 뜻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이다. 조금 과장을 섞어 말하자면, 그리스 로마 신화를 묶은 책에 '뮈토스'라는 이름을 붙인 행위 자체가 지극히 뮈토스적이다. 그렇기에 이윤기의 '뮈토스'는 재미있고 흥미진진하다. 신과 영웅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보면 자연스럽게 그 이야기 자체에 빠져들고 열광하게 된다. 뮈토스적 화자는 뮈토스적 독자를 낳는 법이다.  

그렇지만 유재원의 이 책은 제목부터가 지극히 로고스적이다. '그리스 신화의 세계'. 저자는 그저 재미있고 허황된 이야기에 지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이야기들의 뿌리와 근원을 하나하나 캐어 나간다. 이를 위해 그리스에서 언어학을 전공한 저자의 풍부한 언어학적 배경 지식과 글로 쓰여진 역사가 존재하지 않던 시대를 풀어가는 인류학, 고고학적 지식, 그리고 그 지방의 지리학적 지식까지 저자는 총동원시켜 하나하나 이야기의 뿌리를 캐어 나간다. 이 방법을 간단히 요약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언어학적 지식: 등장하는 모든 신의 이름을 음절과 형태소로 끊어 그 기원과 뜻을 밝히면 몇천 년 전의 사람들이 숭배했던 초자연적 존재의 대상과 그 성격이 드러난다. 저자는 주신 디오니소스의 이름이 어떻게 지어졌는지에 대한 형태소 분석 몇 개 만으로 소아시아 지방의 지신(地神)이 그리스 로마 신화에 편입되었음을, 가부장 사회의 신이었음을 논리적으로 밝혀 내는 과정은 그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인류학적, 고고학적 지식: 제우스의 아내 헤라,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달의 여신 아르테미스 여신의 설화를 시대순으로 설명하면서, 점점 이들의 권능이 미약해짐을 지적하고있다. 모계 사회의 전능한 여신 헤라는 그리스 신화에 편입되며 제우스의 난봉질에 투기를 일삼기만 하는 가부장 사회의 본처 역할로 축소된다. 무생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인간의 운명을 제우스라는 절대신의 간섭 없이 쥐고 흔들던 아프로디테는 뒤로 갈수록 힘이 미약해져 인간 남자의 몸과 마음을 얻고자 거짓을 몸에 두르며 사랑을 갈구한다. 이런 설화 속 여신의 권능 축소 과정을 문명의 변화에 따라 모계 사회에서 부계사회로 전환되며 여자들의 힘이 축소되는 과정과 일대일 대응시키는 저자의 능력은 놀랍다.

지리학적, 역사학적 지식: 제우스와 아폴론, 그리고 포세이돈 등의 강력한 신들은 어찌 보면 다들 난봉꾼에 지나지 않는다. 조금 예쁜 여자가 보이면 신으로서의 체면 염치 다 접어두고 왼다리짓을 해 댄다. 저자는 이를 그리스 신화가 그 지역 전체로 퍼져나가며 각 지방의 통치자들이 자신의 권력 강화를 위해 '나는 너희 평민들과 다른 혈통을 지녔다'는 신성화 작업의 일부로 해석한다. 그 전래 통로까지 살피는 건 물론이다.

이렇듯 저자는 몇 가지 도구를 효과적으로 사용하여, 그리스 신화를 통해 몇천년 전 사람들의 살림살이 양상을 손에 잡힐 듯 복원시킨다. 그의 눈을 통해서 신화는 그저 이야기로 머무는 게 아니라 문자가 없던 시절의 은유를 통한 역사적 기록임을 알 수 있다. 작은 글씨로 1차적인 신화 내용을, 조금 큰 글씨로 그 해석을 제시하는 책의 구조상, 1차적인 신화의 이야기 전달이 다소 딱딱한 구석이 있다는 걸 단점으로 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신화 컨텐츠를 재미있게 전달하는 능력은 이윤기나 오비디우스, 혹은 다른 훌륭한 저자들에 기댈 수 있으나 유재원의 이 책만큼 통찰력있게 이성적으로 뜻모를 이야기의 의미를 풀어나가는 책도 없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나, 이윤기의 '뮈토스'정도와 같이 서가에 꽃아두면 훌륭히 균형이 맞지 않을까 싶다.

재미있는 이야기로서의 신화를 받아들인 사람이 한 발자욱 더 나가고 싶을때 강력히 권해주고싶다. 몇 년 전 학교다니던 때 이 책에 열광하던 매너가 다시 이 책을 읽고 싶어 검색했을 때, '절판'이란 빨간 글자가 알라딘에 찍히는 순간 헉겁한 나머지 할인 한 푼도 안되는 서점에서 잽싸게 주문하고 받은 다음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1차적 이야기 전달에만 머무는 신화 서적이 대부분인 요즘 이 책 옆에 붙은 붉은 글씨는 너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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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mannerist > 개츠비 주제에 의한 아홉 개의 변주곡
피츠제럴드 단편선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123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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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EMA.

(재즈시대 미국, 늦가을 어느 토요일 밤 뉴욕, 이스트 에그. 개츠비 저택의 해변가.  '불길하고 위협적인 또 한 차례의 십 년'을 목전에 둔, 서른 살 생일을 맞은지 얼마 안 되는 남자가 '모래 위에 벌렁' 드러누워있다. '조류를 거스르는 배' 어쩌구 중얼거리던 그 남자와 눈이 마주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무슨 일이오. 형씨[old sport]? 후후... 아. 그런 표정으로 이 말, 이상하게 듣지 말아요. 당신 얼굴을 보니, 내가 지난 여름 바로 이곳에서 개츠비가 나를 그렇게 불렸던 게 기억나네요. 그래요. 이상한 말이죠? 그게 나한테는 생면부지의 사람을 무장해제시키는 친근함이었는데, 어떤 사람에겐 질투와 증오에 불을 붙이는 말이덥디다. '경솔한 사람들[careless people]'말에요.

내일이면 뉴욕을 떠난다우. 이제 동부라면 지긋지긋해. 교양? 세련? 웃기는 소리에요 다... 아. 형씨는 어떻게 생각하우? 지금은 차가운 비 맞으며 묘지에 누워있을 이 집 주인 말이오. 뉴욕 사람치고 이 집 주인을 모를 리는 없을테니. 아... 제발. 노란색 쿠페, 치정극 이야기는 꺼내지 말아요. 그런 식으로 사람들 입에 오르내려선 안되요. 그 사람은... 그야말로 영웅없는 이 평화로운 시대에 '위대한'이라는 형용사가 어울리는 남자란 말이오. 뭐라구? 좋아할만한 가치가 없는 경솔한 여자 좋아하다가 비명횡사한 사람 아니냐고? ... 당신 역시 경솔한 사람이구만. 이봐요. 형씨. 내 한 번만 이야기해줄테니 잘 들어요. 그 남자. '희망에 대한 탁월한 재능', '낭만적 민감성' 그 자체였던 그 남자가 얼마나 위대한 가치를 온 삶에 걸쳐 밀어냈는지 알기나 하시오?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 좀 더 적나라하게 말해서 '돈'으로 환원되어, 가장 순수한 감정 마져도 그 쇳가루의 비린내에 밀려버린 이 빌어먹을 자본주의 속에 살면서도, 얻을 수 없을 거 알면서, 그 경솔한 여자의 가치가 이미 빛바래었을걸 알면서, 자신이 가진 순수한 감정에 대한 믿음과 확신을, 끝까지 밀어부친 남자가 무가치하다는 말이오? 사랑의 시지푸스란 말이오.

 그와 비슷한 삶을 밀어낸 눈 밝은 글쟁이가 있다면 주저없이 '위대한'이라는 형용사를 붙이고 그의 삶을 써내려갈거요. 아니, 거기서 그칠 리가 없지. 분명히, 그 글쟁이는 이 남자의 삶을 평생동안 명도만 다르게 해서 그릴 게 틀림 없소. 부도 명예도 없던 시절의 비참함과 이루지 못한 사랑, 그리고 세속적 성공에 대한 갈망, 설사 그중 하나를 손에 넣었다 하더라도 나머지는 이룰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것들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지켜나가는 순수한 사랑과 낭만적 민감성, 그리고 그 과정에 짙게 배여나오는 우수와 쓸쓸함, 또 파국적 결말까지... 그는... 개츠비는. 그런 남자였다는 말이오. 알겠소? 형씨?

 

variation I. 어리석은 자만이, '다시' 바빌론을 찾는다.

모든 것을 다 가진 개츠비를 생각해 보자구. 부와 명예같은 물질적 성공에 사랑스러운 아내와 귀여운 딸. 걱정할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고. 이들이 가장 화려한 날을 보내기에 어울리는 곳은... 그래. 아마도 파리일거야.

이봐. 자네. 사람이 언제 망가지는지 알아? 더 이상 추구할 게 없을 때, 지금의 삶이 더할 나위없이 만족스러울 때라고. 물질적 성공과 사랑. 두 가지 모두 자기 손 안에 있는데 뭐가 더 아쉽겠냐고. 그저 하루하루 즐기기에 바쁘겠지. 아무리 가까운 친척이 - 그게 처제라 할 지라도 - 눈에 뭐 보이겠어. 오늘도 내일도 없는 듯이 감각적 쾌락을 즐기기에 바쁠거야. 자 근데 그 삶의 기반이 송두리채 무너져내린다면 어떨까. '사소한' 다툼이 어떻게 꼬이다보니 아내는 세상 저버리고 대공황 맞아 하루아침에 전재산이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려 어쩔 수 없이 처제 집에 사랑하는 딸까지 맡겨 버리고 그 왠수놈의 '돈' 때문에 홀로 타향을 떠돌아야한다면.

다시 그 남자는 파리로 돌아와. 대공황 전 흥청망청하던 파리의 호화로운 분위기는 흩어저려버렸겠지. 어깨를 같이 들썩이며 샴페인을 기울이던 사람들도, 눈이 부신 네온사인도 없이, 파리 거리거리를 걷는 이 남자의  몸과 마음에 그저 추적추적 비만 뿌려지고 있다면. 한국 사람들이 절터라는 데에 가서 흐트러진 수풀 가운데 넘어진 댓돌 위에 앉아 어둑어둑한 저녁 하늘을 바라보는 기분이 그럴 거야. 이쯤되면 알 거야. 그남자가 처제에게 넘어간 양육권을 되찾아 옛날의 행복을 조금이라도 되찾으려는 꿈이, 한낮 미망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 가혹하지 않느냐고? 분명 그 남자는 달라졌는데말이지? 건실한 기반도 다져놓고 그의 달콤한 시절을 무너뜨렸던 알콜중독의 마수에서도 벗어났는데도? 모르는소리. 한 번 아닌 건 돌이킬 수 없는 거라고. 쾌락에 젖어 흥청망청 살던 시절의 작자들이 처제의 집으로 들이닥쳐 깽판을 벌였기 때문에 그가 쓸쓸히 파리를 뜰 수 밖에 없던 게 아냐. 모든 걸 가졌던 시절의 그림자 때문이라구 그 날건달들의 모습이 곧 그의 과거였고 차마 다 떨쳐내지 못한 현재였다고. 동양에서 말하는 업보라는 말이 어울릴지 모르겠어. 중요한 건 돌이킬 수 없는 걸 추구하는 것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걸 이 남자가 몰랐다는게지.

이제 알겠어? 오로지 바보들만이 좋던 시절을 그리워한다고. 더 머저리같다면 혹시나 하고 그때 그 장소로 돌아가려하겠지. 그리고 남은 평생동안 그걸 후회하고 괴로워할거야. 그러니 돌아보지마. 그리워하지도 말고.

 

variation II. 가장 지독한 사랑, 자기애. 혹은 순수와 위선 사이.

육체적 아름다움을 지녔지만 그에 발맞추지 못하는 더없이 빈약한 정신세계를 가진 여자의 추한 모습을 그리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남자 저남자 문어다리 걸치듯 만나며 서로 다른 종류의 짜릿함만을 추구하는 여자가 결국 파멸하는 모습을, 건실하고 예민한 낭만적 감수성을 지닌 청년의 눈을 빌어 간접화법으로 비난하고 싶은 마음 말이다. 하지만 이 역시나. 이 소설을 끌어나가는 건 물질적 성공을 착실히 이루어나가는 청년 덱스터이다.

가진 건 없지만 미래에 대한 희망과 이를 성취할 능력이 있는 청년이 캐디 노릇을 하며 하루하루 연명하던시절부터 선망해오던 아름다운 주디. 그 여자를 옆에 둘 만한 물질적 성공을 거며쥐었을 때에도 이승환의 노랫말마따나 "많은 사람들 중의 하날 뿐"으로 머무를 수 있을 뿐이다. 여자 하나에 열 두명의 남자. 번갈아가며 서로 다른 매력을 즐기는 이 여자, 남자 다루는 솜씨도 능수능란해서 어느 한 남자가 '삐질'타이밍이면 어느새 달려와 달래주어 그 '일부다처'적 관계를 이어가는 이 여자를, 덱스터는 진정 사랑한 것일까. 성실하고 착한 약혼녀를 등져버리고 파국으로 치달을 걸 알면서도 주디를 안은 덱스터는 대체 무슨 생각이었을까.

덱스터가 사랑한 건, 정확히 말해 덱스터에게 중요했던 건 '누군가를 지고지순하게 사랑할 수 있다는'  자신의 순수함일거다. 사랑에 빠져 있는 자기 모습, 이 때만은 누구보다도 순수하다는 생각(혹은 착각)에 빠져 있던 게 아닐까. 그렇기에 고작 한 달도 지속되지 못한 자신에 대한 주디의 호감에도, 그녀의 거짓에도, '어떤 반감도 어떤 즐거움도 초월해(p. 83)'있던 거 아닐까. 이렇게 읽으면 마지막에 흐르는 그의 눈물, 더 이상 '순수의 시대'가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음에 애통에 하는게 가증스러움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그런데말이지. 그의 위선과 개츠비의 순수 사이의 거리는 얼마나 될까?

 

variation.III 그 버릇 어디 못 간다.

서른 두 살의 장년이 된 두 사람이 학창시절의 애틋한 감정을 떠올린다. 점점 고조되는 분위기만큼 십여 년의 세월을 건너 뛰어 그때의 핑크빛을 다시 찾아가는거. 이거 뻔한 얘기지만 옆에서 보긴 더없이 즐거운 이야기잖아. 그런데... 이렇게 뒤통수치면서 끝을 ? 꼭 비슷한 시대 살다 간 오헨리를 생각하게 되잖아?  짤막한 길이에 뒤통수 치는 반전과 여운. 한번쯤은 이런 단편을 누구나 쓰고 싶나봐. 근데 피츠제럴드는 어쩔 수 없나봐. 글 전체에 이루지 못한 사랑과 물질적 성공, 그리고 그 시절에 대한 동경을 짙게 드리우는게. 도회적이고 쓸쓸한 분위기는. 좀더 냉소적이고 세상 물정 좀 더 아는 오헨리의 단편이라고 할까. 아니아니. 피츠제럴드는 피츠제럴드일 뿐이야. 그저 그가 쓴 의외의 결말이 뒤통수친다고 해 둬야지. '개츠비스런'인물의 냄새는 풍기면서말이지. 순수를 찾는 남자와 다소 줏대없고 어리석기까지 한 여자.

그러고보니 도대체 피츠제럴드 소설에 나오는 여자들 왜 다 이모양인거야? 남자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멋진데.

 

variations. IV 분별 있는 남자의 항변.

날 '개츠비적' 인물로 분류하지 말아주슈. 뭐 비슷한 구석이 있는 건 맞지. 물질적 성공과 사랑을 꿈꾸는, 충동적인 구석이 있으면서도 기본적으로 건실한 청년이긴 하지. 그런데.첫번째 변주곡의 웨일스나 두번째 변주곡의 덱스터처럼 무분별하게 유혹에 완벽히 굴복하지는 않잖수. 그저 불화와 의심 속에 서로 망가져가는 한 커플을 옆에서 지켜보기만 할 뿐이지. 그래요. 뭐 그여자가 자꾸 나한테 꼬리치는게, 그들의 파국에 일조했다는거. 크게 부정하지는 않겠어요. 하지만 캘먼 씨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래서 스텔라가 내게 매달릴 때, 늦긴 했어도 무엇을 잘못했는지 깨달았다구요. 내가 '다시 돌아올게요'라고 했다고, 나도 파국이 뻔히 보일 사랑에 매달릴 어리석은 남자라고 생각하지 말라니깐. 난 그때 더없이 화가 난 목소리(p. 136) 있었다구.

난 그런 사람이라구요. 한때 유혹에 흔들리긴 해도 금방 사리판단을 냉철히 해 내는. 알겠어요? 아마 개츠비의 판단력이 지난 시절의 사랑에 대한 미련과 갈망에 흐려지지 않았더라면 나와 똑같이 행동했을거라고. 마지막,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경솔한 여자를 내쳤을 거라고.

그래서말인데. 그 과부 집을 떠나온 뒤 내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지 않수? 그 이야기를 왜 끊었나몰라. 아마 그 벌이었을지도 몰라. 자기가 맨날 여자와 주위 환경때문에 결국 주인공 망가지는 이야기만 쓰다가 나처럼 분별력있는 남자 이야기를 쓰다보니깐. 젠장. 나도 성공한 모습 길이길이 남기고 싶었는데. 쳇. 그래도 그것만은 변하지 않을거유. 나 조얼 콜스가, 이 글쟁이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분별력 있는 사람이라고. 뭐? 뒤에 아예 제목에 '분별력'을 박은 사람 얘기가 나온다고? 쳇...

 

variations V. 이루지 못할 꿈, 차라리 모른다면.

개츠비가 왜 불행해졌는지 알아? 이루지 못할 꿈을 모든 걸 던져서 이뤄내려고 했기 때문이라고. 안되는 걸 어거지로 되려 하는게, 억지 부리는 게 다 그쪽으로 흘러 갈 수밖에 없는 거지. 파. 국. 이란 걸로.

근데 사람이라는게. 알면 어떻게든지, 좋든지 나쁘든지 그쪽으로 몸을 던질 수 밖에 없잖아? 그런 거잖아? 근데말야. 아예 그 꿈을 모르게 하는 게 어떨까. 그게 이룰 수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기 전 시점으로 어떤 사람을 머물게 하는 게 말야. 오랜 몸과 마음의 병에서 깨어난 이 여자, 남편이 오는 길에 교통사고로 죽은지도 모르고 조금 늦는 거라고 하루하루 기다리면서 더없이 행복해 하겠지. 이 행복을 최대한 늘려주는게 이 여자에게 좋은지도 모르잖아.

근데 문제는 옆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처음에 그 의사가 이 여자의 이야기를 어디서 꺼냈는지 생각해봤어? 중세의 고성 이야기 하다가 그랬잖아. 분위기 어둑어둑해지려고 그러니까 이 이야기를 꺼냈다고. 그녀가 얼마나 행복한지. 불가능한 사랑에 대한 무지와 미망을 옆에서 지켜보는게 얼마나 괴로운 것인지 아냐고. 그 괴로움이 얼마나 크면 이 의사가 또 그럴까. '제발... 비밀 지하 감옥 이야기로 다시 돌아갑시다.' 정말. 사랑이란거. 어느 정도는 차라리 모르고 그냥 좋아만 하고 살아가는게 나은지도 몰라.

 

variations VI. 피츠제럴드의 지독한 빨간 구두.

가끔 난 생각한다우. 젤다와의 불행한 결혼 생활 때문일까. 피츠제럴드가 여자주인공에 대해 도무지 좋게 쓴 글을 찾을 수 없는걸 보고는 지독한 여성 혐오에 빠져 산 게 아닐까.

대략 분위기 보니깐. 이블린은 젊은 시절, 피츠제럴드의 소설에 나오는 '경박하고 가볍고 경솔한'여자야. 오죽하면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난 당신에게 당신과 마찬가지로 딱딱하고 아름답고 속이 텅 비어 있고 쉽게 속을 훈히 들여다볼 수 있는 물건을 선물로 보내겠어(p. 149).'라는 저주 섞인 말을 던졌을까. 그런 '경솔한'여자의 댓가가 어떤 건지, 작정하고 펜을 잡았던 것 같네.

좀 해도 너무하지 않아? 젊은시절 좀 경솔하게 행동해 어느 남자에게 상처주고, 결혼하고 바람 좀 폈기로서니 딸은 '컷글라스 그릇' 모서리에 손 벤 데 패혈증 올라 손목 자르게 되고, 남편 사업도 아작나며, 아들이 죽었다는 이야기를 '컷글라스 그릇'에 담겨진 전사통지서를 통해 받더니, 결국엔 '컷글라스 그릇' 안고 '절망의 소리를 부르짖으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 땅 아래로....(p. 185)'라니. 그녀는 피츠제럴드의 '빨간 구두'가 아니었을까. 설마. 여기에 젤다를 투사하지는 않았기만을 바랄 뿐이야.

근데말이지, 이 짧은 소설에 끌린다면 아마도 한때 유행하던 컷글라스 그릇 세트의 운명과 이 기구한 팔자를 지닌 여자의 일생을 병렬적으로 대비시켜가며, 그리고 그 영롱한 빛깔의 섬뜩함과 이여자의 운명을 정교하게 묘사해 낸 데 있을거야. 그래서 그냥 기분나쁜 현대판 '빨간구두'이야기 듣고 치워버리자. 하는 느낌이 덜할지도 모르지.

 

variations VII. 사랑의 가장 지독한 변수, 시간에 대하여.

'4월은 흘러갔다. 이제 4월은 지나가버렸다. 이 세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랑이 있건만 똑같은 사랑은 두 번 다시 없을 것이다.(p. 213)' 마지막 이 문장 하나만으로도 이 연애소설 역사에 남을 것이다.

지금은 사랑할때가 아니고 다른, 뭔가 중요한 일을 할 때라고. 이 일을 먼저 하고 사랑을 찾을 거라고. 그래. 그때의 마음만은 진지하겠지. 그리고 진심이겠지.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야 소년과 소녀는 알게 된다. 시간과 함께 사랑도, 마음도 흘러 버림을. 다시 찾는 마음은 그때의 사랑이 아님을. 만물유전이라는 말이 그처럼 서글픈 게 없음을. 그걸 인정하고 난 다음에야 소년은 청년으로, 소녀는 숙녀가 되는지도 모른다. 첫사랑, 한때 사랑했던 사람 다시 보는 게 아니란 말 괜히 나오는 소리가 아니다. 그래서 겨우 서른 페이지 남짓한 이 짤막한 변주는, 옛사랑에대한 그리움에 가끔 가슴 울컥하는 사람들에 대한 헌정이다. 돌아보지 말기를 이처럼 간곡하고 애절하게 쓰기도 힘들테니. 그래서 별 말 붙이기 힘들다. 그냥 이렇게나 말해보리라. 지나간 사랑이 떠오르는 사람들, 그저 붙잡고 읽어보라고 말이다.

'분별 있는 일 - 그들은 분별 있게 행동을 한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젊음을 능력과 바꾸었고, 절망으로 성공을 빚어냈다. 그러나 삶은 젊음과 함께 그의 사랑의 신선함까지 앗아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p. 210)'

 

variations VIII. 파멸하지 않는 개츠비는 행복할까.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영웅은 그 가치를 잃는다고 했던 게 조셉 캠벨이던가. 개츠비를 읽은 사람들이 간혹 그런 생각을 할 지도 모르겠다. 개츠비가 자신의 예민함과 순수를 적당히 억제할 수 있다면 좀 더 행복한 삶을 살지 않았을까. '부잣집 아이'앤슨이 그렇다. 개츠비가 바라마지않던 세속적 부와 명예는 처음부터 갖추고 있었고 손만 제대로 뻗는다면 자신에게 호감있는 여자와도 행복한 삶을 보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문제는,  자신의 순수한 감정을 유지하는 것이 그에게 최우선의 가치가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경솔한 행동을 하고도 그녀에게 진심으로 사과하고 다가가지 못하며 잡아야 할 시점에서도 자신에 대한 지나친 과신으로 그 타이밍도 놓쳐버린다. 이후 그의 일생은 그녀, 폴라에 미치지 못하는 여자들과 그냥저냥 호감과 혐오를 오가며, 주위 사람들에게 그저 '좋은 사람'으로 인식될 뿐이다.

'주인공'이란, '영웅(주윤발大人같은 통속적 분위기 말고, 조셉 캠벨이 말하는 "영웅" 말이다)'이란 그런 거 아닐까. 극단적적 가치를 끝까지 추구하지 못하는 인물은 이렇게 흐지부지 묘사될 수 밖에, 살아갈 수 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저 이 변주의 마지막처럼, 자신의 마음을 다 던질 상대를 찾지 못하고, 그러지도 못하고, 그저 남들에게 잘 해주는 걸로 자기가 괜찮은 사람이라는 우월감 속에, 그 외로움 속에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살아갈지도 모른다. 그래서다. 극단적 감정의 문제에 있어서, 애매함과 적당함은 그 어느 것 보다도 나쁘다.

"세상은 오로지 극단적인 것을 통해서만 가치를 가지고 오로지 평균적인 것을 통해서만 유지된다." 츠바이크의 이 금언을, 피츠제럴드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평균. 행복하지는 않지만 불행하지는 못하는, 비참한 상태를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내가 작곡을 한다면, 이 변주곡의 선율이 아마도 가장 지독한 단조로 작곡될거다.

 

variations IX.  개츠비의 시대는...

난장판. 오월제라는 제목은 명목상에 지나지 않는다. 모두모두 미쳐돌아가는 카니발이라는 표현이 걸맞는지도 모르겠다. 1차세계대전의 종전 후의 희망찬 분위기. 라고 썼으면 좋겠지만 실상은 긴장이 완전히 풀려 다들 자기 욕망을 분출해 내기에 정신없는 시대다. 재능에 대한 확신을 잃은 어느 화가 지망생은 푼돈을 '잘 나가던 시절'의 옛 친구에게 구걸하고 그 친구는 적당히 비웃고 적당히 외면한 채 '지금까지도 잘 나가는'친구들과 어깨 들썩이는 파티에 나간다. 이 흥청망청한 분위기에 사회 밑바닥 인생으로 여기저기 치이는 승전국의 패잔병 - 자기 나라의 승리가 참전 군인 일생의 승리가 아니기에 - 들이 끼어든다. 당연히, '잘 나가던 시절'의 옛사랑도 그 자리를 거듬은 말할 필요도 없고. 모두다 자기의 욕망을 분출하기에 여념이 없던 오월제가 흐르자, 광란의 분위기에 휩쓸려 누군가는 다리가 부러지고 누군가의 인생은 머리가 깨어져 으스러진다. 역시나 '피츠제럴드적'인 여자는 세속적 가치가 머물지 않는 옛사랑 앞에 매몰차게 뒤돌아서고, 이에 그 남자도 그날의 오월제도 미쳐 돌아간다. 사랑도 명예도 세속적 성공도 모두 손아귀에서 빠져나간 남자는 끝내 자기 머리에 방아쇠를 당긴다.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미망만 남은 사람은 그런 거다.

아마도 피츠제럴드가 바라보았던 재즈 시대의 아메리카가 그랬을거다. 물질적인 풍요와 동시에 넘쳐 흐르는 말초적 쾌락의 충족, 전세계적으로 유래가 드문 '금주법'의 도덕적 위세는 허구에 지나지 않았음을.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그의 글이 어둑어둑하게 마무리되는지도 모른다. 다들 미쳐돌아가는 카니발의 끝이란 그런 거다. 지독한 숙취에 머리 지끈대며 침대 짚고 일어날 때, 어제 파티에 썼던 구겨진 가면을 밟았을 때의 기분 말이다.

 

Finale.  Adagio Catabille

날이 밝아오는군요. 어이. 올백머리 형씨. 당신 직업이 뭐요? ...없어요. 광고 회사에 다니다가... 관두고... 글을 쓰고 있어요. 글? 후훗... 한때 예일 뉴스를 쓰던 시절도 있었는데... 난 형씨가 작곡가였으면 좋겠수. 이 남자의 삶, 꽤나 로맨틱한 음악이 될 것 같아서 말이지. 이를 말입니까.

...형씨, 형씨는 찾고 싶은 게 있어요?
황금 모자, 황금 모자요.
형씨?
그리고 뛰어오를거요. 그녀가 외칠 때까지... 당신을 차지하겠노라고.
...
고마웠소. 말 섞어준거. 형씨라 불러준거. 이름이?
닉 캐러웨이. 당신은?
(올백 머리가 인상적인 남자는 엷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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