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로 우리가 하나의 시공간, 병원 앞 카페나 정욱연의 원장실에 마주 앉아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삼차원의 우리 인생이 강요하는 가장 일상적이고 악랄한 착시현상이다. 어떤 각도에서 바라보면 우기 겹쳐져 한 점에서 만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알고 보면 우리는 두 개의 직선처럼 각기 서로 다른 방향의 우주를 향해 달리고 있을 뿐이다. 우리가 가장 가까워지는 순간조차도 우리 사이에는 삼억팔천만 킬로미터의 거리가 있을지도 모른다.-213쪽
"글쎄, 내가 과연 그랬을까? 아닐 것 같아. 혜나씨는 나를 실제보다 훨씬 더 괜찮은 인간으로 생각해주는 거야. 혜나씨에게 솔직하게 말하자면, 병원에서 보여주는 내 모습은 아주 일부분에 불과해. 실제의 나는 훨씬 더 정떨어지는 인간이야. 내 진짜 모습을 알면 별로 나를 좋아하지 않을걸.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분명히 있었어. 상당히 억울하기도 하지만, 이젠 누구를 원망하고 싶지 않아. 그냥, 우리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무게가 어찌해볼 수 없을 만큼 무거웠던 거겠지. 망가진 건 망가진 거야. 어떤 최악의 일이라도, 막상 닥치면 어떻게든 견딜 만하더라고.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215쪽
처음에는 먹고살아야 하니까 돈을 벌지. 살아야 하니까. 그런데 한번 돈을 벌기 시작하면 먹고사는 일은 금세 끝이 나버려. 먹고 사는 걱정 없이 돈을 벌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돈 버는 게 재미가 있어져. 이렇게 해도 돈이 되고 저렇게 해도 돈이 되니까 신이 나. 세상이 엽전 구멍만해지고 사람들이 나한테 굽실거리는 모습이 재미있어. 그래서 한세월 또 돈을 버네. 내 생각에, 이만큼에서 멈추어야 좋아. 잔챙이일 때가 재미있어. 그래야 사람답게 살아. 돈이 돈으로 쓸모가 있는 건 이만큼으로 족해. -235쪽
우린 정말 치열하게 사랑했어. 그렇게 죽을 만큼 사랑했다는 점이 중요한 거야. 끝까지 잘되었으면 좋았겠지만, 이렇게 끝나더라도 크게 여한은 없어. 인생을 건 진짜 사랑은, 그 자체로 훈장처럼 느껴질 때가 있거든. 어차피 사람은 죽으면 헤어지게 마련이니까.-312쪽
"혜나씨, 인생은 다면적인 거야. 그래서 어떤 한 면만 생각하면 전체가 우스꽝스럽게 비틀려 보이기도 하는 거지. 나도 대략 굶지나 않으면 다행인 형편이었지만, 가끔은 좋은 물건을 손에 넣거나 잘 차림 음식을 먹을 때도 있었다고. 횟수의 문제일 뿐이지. 인생은 길거든."-320쪽
"난 수진씨가 이해되는데. 아무리 잘 버티는 사람이라도,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어떤 일이 있거든. 다른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흔한 일이라도, 어떤 사람에게는 더이상 견딜 수 없는 일격이 되기도 하니까."-3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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