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은 사람을 비춘다. 얼굴을 비추고 눈동자를 비춘다. 그것은 단지 물리적인 작용일 뿐, 그 사람의 내면을 비추는 것은 아니다. 거울은 아무런 관심도 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마음 놓고 그 앞에 서서 자신을 내보일 수 있는 것이다. 기쁨이나 자랑스러움을, 세상을 눈을 의식하지 않고 그대로 드러내 보일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이 세상에 거울이 존재하지 않고 서로가 서로의 얼굴을 점검해주고 자신이 자신을 관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면, 사람들은 지금보다 훨씬 철저하게 자신을 점검해야 할 것이고, 불안에 떨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99쪽
농담이 농담에서 벗어나 정체 모를 불안을 자아내고 있었다. 불안이 불안에 지나지 않을 때는 그래도 행복하다. 불안의 정체를 모를 때까지는. -121쪽
병실이란 한 인간이 자신에 대해서나 타인에 대해서나 얼마나 외로운 존재인가를 확인하는 곳이고, 그런 자신의 모습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장소이다. 지금까지 손에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애정과, 쌓아왔다고 확신했던 인간관계가 그저 거짓과 무관심과 착각과 기대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절망에 빠지는 일이 종종 있다. 두 달에 걸친 입원생활중에 요시코 자신도 그것을 몸으로 느꼈고, 그런 사례들을 봐왔다. -189쪽
누군가를 향해 손을 내밀고 내가 곁에 있으니 괜찮다고 말을 거는 순간에, 그는 다른 사람이 기댈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처음부터 듬직한 인간은 없다. 처음부터 힘있는 인간은 없다. 누구든 상대를 받아들일 결심을 하는 순간에 그런 인간이 될 수 있는 것이다. -365쪽
기억, 기억, 기억. 인간이란 존재는 기억으로 만들어져 있는 모양이다. 그런 통찰이 번개처럼 뇌리를 가로질렀다. 처음에는 서서히, 그러다 점점 폭포수처럼 터져나오고 있다. 기억이라는 내용이 다 빠져나가 버리면, 히로미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그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 것이다. -382쪽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왜 그런 시를 썼는지. 그것은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끌어올린 말이었다. 작문은 사방에 널린 언어를 조합해서 만들 수 있지만, 시는 그렇지 않다. 시를 쓰는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 내시경을 넣고 거기에서 조직의 일부를 떼내 표본을 만드는 것과도 같다. 그래서 위험하다.-387쪽
"잘 들어. 인간이 사실을 정면으로 마주한다는 건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야. 절대로 그러지 못해. 물론 사실을 하나뿐이야. 그러나 사실에 대한 해석은 관련된 사람의 수만큼 존재해. 사실에는 정면도 없고 뒷면도 없어. 모두 자신이 보는 쪽이 정면이라고 생각하는 것뿐이야. 어차피 인간은 보고 싶은 것밖에 보지 않고, 믿고 싶은 것밖에 믿지 않아."-49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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